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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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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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위 | |
1558년 ~ 1603년 | |
성 명 | {{{성명}}} |
별 명 | 처녀왕 |
왕 비 | {{{왕비}}} |
황 후 | {{{황후}}} |
왕 후 | {{{왕후}}} |
부 군 | 미혼 |
왕 가 | 튜더 |
황 가 | {{{황가}}} |
부 왕 | 헨리 8세 |
부 황 | {{{부황}}} |
부 친 | {{{부친}}} |
모 비 | 앤 볼린 |
모 후 | {{{모후}}} |
모 친 | {{{모친}}} |
앞선 왕 | 메리 1세 |
앞선 황제 | {{{이전 황제}}} |
앞선 천황 | {{{이전 천황}}} |
다음 왕 | 제임스 1세 |
다음 황제 | {{{다음 황제}}} |
다음 천황 | {{{다음 천황}}} |
잉글랜드의 여왕 |
성공회 |
서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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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종교 개혁 사도 계승 로마 가톨릭 주교 행정 |
인물 |
토머스 크랜머 헨리 8세 리처드 후커 엘리자베스 1세 존 웨슬리 |
교회법 |
캔터베리 대주교 램버스 회의 자문 회의 주교 회의 |
전례와 예배 |
성공회 기도서 고교회파 · 저교회파 광교회파 옥스퍼드 운동 39개조 신조 설교집 사제 감사성찬례 성인 |
각국의 성공회 |
영국 성공회·미국 성공회 아일랜드 성공회·오스트레일리아 성공회 뉴질랜드 성공회·캐나다 성공회 대한 성공회·대만 성공회 일본 성공회·홍콩 성공회 |
엘리자베스 1세(영어: Elizabeth I, 1533년 9월 3일 - 1603년 3월 24일)는 1558년 11월 17일부터 1603년 3월 24일까지 44년간 잉글랜드 왕국 및 아일랜드 왕국을 다스린 여왕이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튜더(영어: Elizabeth Tudor)이다. 열강들의 위협,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 전쟁 등으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던 16세기 초반 당시 유럽의 후진국이었던 조국을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기 때문에 ‘처녀왕(The Virgin Queen)’이라 불렸고, 그녀를 마지막으로 튜더 왕가는 단절되었다. 그녀는 늘 “과인(寡人)은 국가와 결혼하였다” 는 말을 공공연하게 입버릇처럼 말해 국민들을 기쁘게 하였다. 이러한 여왕의 독신주의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계모가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한 데서 받은 충격, 그리고 그녀에게 최초로 청혼한 시모어 제독이 정부의 허가없이 공주에게 청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 것이 크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차 |
[편집] 생애
[편집] 즉위 이전
엘리자베스 1세는 1533년 9월 7일 그리니치에서 헨리 8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앤 볼린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 앤 볼린이 간통과 반역죄로 참수형을 당한 뒤 엘리자베스는 궁중에서 늘 불안하고 위험하기기만 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복 언니이자 헨리 8세의 첫째 딸인 메리 공주가 항상 그녀를 감시하고 견제하였으며, 부왕인 헨리 8세마저 그녀를 아들이 아닌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홀대했기 때문이다.
이복 남동생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국의 여왕이 된 이복 언니인 메리 1세의 재위기간 동안 성공회에 대한 탄압을 피해 가톨릭교도로 위장하였으며, 때로는 죄수로 몰려 런던 탑에 갇히기도 하였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밝고 활기찬 성격을 가졌던 그녀는 결코 자신이 처한 상황에 좌절하거나 자신을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외국어에 밝고 운동을 잘하는 재주꾼이었다고 한다.
[편집] 재위 기간
1558년 11월 17일에 메리 1세가 병으로 죽자, 엘리자베스가 뜻하지 않게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런던에 입성하여 25살의 나이로 화려한 대관식을 치루며 여왕으로 즉위하였다.
[편집] 중용(Via Media)정책
메리 1세의 로마 가톨릭 복고 정책 그리고 성공회와 영국 종교 개혁의 온건성에 불만을 품고 생긴 청교도에 대한 탄압으로 약 300명이 화형당한 공포 정치에 시달리던 국민들을 성공회 신자인 엘리자베스 1세의 즉위를 환호로 맞이하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종교는 성공회였지만, 국민들의 바람과는 달리 독실한 성공회 신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이었고 같은 기독교인들끼리 죽고 죽이는 분쟁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종교적 광신을 극도로 혐오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1559년 헨리 8세의 반(反)교황법령을 되살린 《수장령》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로마 가톨릭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였으며, 영국 성공회를 다시금 영국의 국교로 확립하여 자신을 영국 성공회의 수장-흔히 성공회하면 영국 국왕이 수장인 영국 국교라고 생각하는데, 세계성공회에서 영국 국왕이 형식적 수장인 교회는 영국 성공회 뿐이다. 그외 성공회 교회들은 모두 관구장(주교)의 지도를 받는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관구교회들이다.-으로 선언하였다. 또한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간의 극단을 피하는 중용(Via Media)노선을 걸음으로써, 종교 문제로 혼란스러웠던 사회를 바로잡았다. 엘리자베스 1세의 중용정책은 성공회가 개혁하는 보편교회(Reforming Catholic Church)로 설명되는 고유의 정체성을 갖게 하였다. 즉, 중용정책을 통해 성공회는 개신교 사상과 보편 교회의 전통을 포용하는 고유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편집] 경제정책
대내적으로는 추밀원을 중심으로 유능한 정치가들을 등용했으며 정치는 성실청을 통해, 종교는 특설고등법원을 통해 통제하였다. 모직물 공업을 육성하고 장려하였기 때문에 농촌을 중심으로 급속히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지만 양을 키우기 위해 목초지를 확대한 인클로저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이 전국을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치안에 문제가 생겼다. 당시 농지를 잃은 농민들의 방황은 심각해서 토머스 모어가 《유토피아》에서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자 엘리자베스 1세는 1601년 구빈법으로 부랑자를 돕는 사회복지정책을 펼쳤다. 그녀는 최측근에 윌리엄 세실(Sir William Cecil), 프랜시스 월싱엄(Sir Francis Walsingham), 니콜라스 베이컨(Sir Nicholas Bacon), 니콜라스 스록모턴(Sir Nicholas Throckmorton), 로버트 더들리(Sir Robert Dudley) 같은 경험이 풍부하고 믿을 만한 조언자들을 주위에 두는 지혜로움을 보였다.
[편집] 애민정책
엘리자베스 1세가 실시한 정치 방식의 핵심은 민중의 소리를 듣는 애민정치였다. 그녀는 1년에 두 번은 순시를 하면서 민중들의 여론을 들었는데, 이는 다른 유럽의 왕들에 비해 비교적 많은 횟수이다.
[편집] 반(反)에스파냐 정책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의 국력이 프랑스나 에스파냐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을 알고, 표면적으로는 세력 균형 정책을 펴면서도 뒤로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 해적들을 지원하여 에스파냐를 견제하였다. 모직물 공업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네덜란드의 독립 전쟁에서는 네덜란드를 지원했다. 그 결과 에스파냐와의 관계가 금이 가게 되었고, 그 이래로 두 나라는 숙명의 라이벌이 되었다. 그 무렵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로마 가톨릭교도인 메리 스튜어트가 장로교를 믿는 귀족들의 반란으로 어린 아들인 제임스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1586년 잉글랜드로 망명하였다. 메리는 그 후 20년 동안 자신이 헨리 8세의 여동생의 손녀딸임을 내세워 엘리자베스 1세를 제거하여 영국의 왕위를 차지할 온갖 음모를 꾸몄다. 그러다가 1587년 마침내 엘리자베스 1세 암살 계획이 모의된 배빙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 메리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를 견제하는데 필요한 메리 스튜어트가 처형되자 에스파냐는 잉글랜드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1588년 펠리페 2세는 당시 유럽 최강의 해양국가였던 에스파냐가 자랑하는 ‘무적함대(Armada)’를 출동시켜 잉글랜드를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무적 함대는 영국 해협에서 교묘한 작전을 사용한 영국 함대에 패하고, 그 후 폭풍우를 만나 재기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 전투의 결과 에스파냐의 지위는 크게 흔들렸고, 유럽에서의 주도권도 상실해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편집] 르네상스 시대
그 반면 잉글랜드는 이러한 내적 발전과 외국과의 대결 속에서 국민들의 정신적 결속과 일체감이 생겨났으며, 이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를 국민 문학의 황금기로 만들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문학과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험론 철학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성과였다. 당시 영국 민중들은 집안에 악기를 갖추어 문화활동을 즐길 정도로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영국 문화는 꽃을 피웠다. 또한 아메리카 대륙에 독신인 엘리자베스 1세의 이름을 딴 버지니아라는 이름의 식민지를 개척하였고, 아시아에는 후에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모방하기도 한 식민지 착취기관인 동인도회사를 창설하여 그 세력을 세계로 뻗어나가 훗날 잉글랜드 왕국이 대영제국으로 발전하는데 필요한 발판을 만들었다. 이 시대를 훗날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시대’라고 부르게 된다.
[편집] 말년
이처럼 화려했던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의 말년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무리 엘리자베스 1세가 ‘훌륭한 여왕 베스(Good Queen Bess)’라고 불릴 정도로 절대적인 인기를 받았지만, 그녀 역시 절대군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녀는 권력이 돈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손쉽고 빠른 수입을 올리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한 예로 신흥 사업에 대해서 멋대로 독점권을 설치하여, 아첨하는 신하나 귀족 또는 상인에게 팔았다. 이런 그녀의 행동에 그동안 순수하게 복종하면서 협력하던 의회도 반대의 조짐을 보이더니 치세 말기에는 의회가 반(反)독점 논쟁의 도가니로 변했다. 또 엘리자베스 1세가 원했던 의회조종법도 언론 탄압이라는 이유로 의회가 반대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잉글랜드는 1596년~1597년의 흉년과 무역 쇠퇴로 인해 지속적인 물가 폭등 및 실업자 대량 발생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국민들의 사기도 땅에 떨어졌다.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여왕의 총신들은 대중의 증오심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아일랜드를 정복하기 위한 일련의 군사적 시도는 엘리자베스 1세의 마지막 총신인 에식스의 백작(Earl of Essex) 로버트 데버루(Robert Devereux)의 반란에서 절정에 이른다. 데버루는 아일랜드 총독의 자격으로 아일랜드의 반란 진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반란 진압에 실패하고 불리한 조약을 체결해야 되는 상황에 이르자 갑자기 총독의 위치에서 이탈하여 여왕에게 직접 해명하겠노라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엘리자베스 1세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하였고 반란 진압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의 관직을 박탈했다. 데버루는 이에 앙심을 품고 30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1601년에 런던에서 대중 봉기를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가 런던에서 겪은 반란의 후유증은 심각하였다. 우울증과 지병이던 노인성 질환들이 심각하게 발생되면서 기력을 잃어가던 그녀는 1603년 3월 24일 70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신하들이 쉬어야 한다고 하자 엘리자베스는 “무엇을 해야 한다, 하는 것이 좋다는 왕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했고, 얼마 뒤 죽었다. 그녀는 죽을때까지 전제 군주의 품위를 흐트리지 않았던 것이다.
[편집] 같이 보기
[편집] 바깥 고리
전 임 메리 1세 |
영국의 군주 1558년 - 1603년 |
후 임 제임스 1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