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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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張繡 ?~207년)는 후한 말기의 무장이자 군벌이다. 후한의 표기장군 장제(張済)의 친족이다. 아들은 장락위위(長樂衛尉) 장천(張泉) 등 여러 명을 두었다.
[편집] 생애
무위군(武威郡) 조려현(祖厲県; 현재 감숙성 무위시 정원현(甘粛省武威市靖遠県)사람이다. 말타기와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 젊을적부터 현의 관리 유준(劉雋)에게 발탁되어 그를 섬겼다. 하지만 얼마 안 가 한수(韓遂), 변장(邊章)에게 호응한 국승(麴勝)이 모반을 일으켜 유준을 살해했다.
젊은 장수는 주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부대를 이끌고 국승을 공격해 그를 죽여 원수를 갚아 무명을 떨쳤다. 계속해서 한수, 변장 등의 양주(涼州)의 군대를 격퇴했기 때문에 동탁에게 인정받아 그를 섬기게 되었다. 동탁이 죽은 뒤에는 친족인 장제를 따랐다.
197년 장제가 남양군(南陽郡)의 양양을 공략하던 중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전사했기 때문에 장수가 그의 뒤를 이었다. 유표(劉表)와 손을 잡고 조조(曹操)에게 대항했으나, 조조군에게 압도당해 항복하였다.
그런데 조조가 절세의 미녀로 알려진 장제의 후처였던 미망인 추씨(鄒氏)와 밀회를 즐기는 것을 알아채고, 격렬한 분노와 치욕을 느꼈다. 여기서 참모였던 가후(賈詡)의 책략을 받아들여 완성(宛城)에서 조조를 야습했다. 이 야습에서 조조의 장남 조앙(曹昂)과 조카 조안민(曹安民; 동생의 아들. 《연의》에서는 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당시 조조의 친위대장이었던 전위(典韋) 등을 합쳐 다수의 병사들을 죽이는 등 커다란 승리를 얻었다.
그후에도 조조와 항쟁을 계속해 유표와 더불어 조조와 싸웠으나, 곧 가후의 조언에 따라 조조에게 귀순했다. 귀순한 후 장수의 딸은 조조의 어린 아들 조균(曹均; 번안후(樊安侯))의 아내가 되었다. 200년 관도 전투(官渡戰鬪)에서 무공을 세우고, 파강장군(破羌將軍)으로 승진하는 동시에 식읍 2000호를 하사받았다. 207년 유성(柳城)의 오환(鳥丸) 정벌 중 진중에서 병사했다. 정후(定侯)라는 시호(諡号)가 내려졌다.
일설에서는 자신이 살해한 조앙의 배다른 동생인 조비(曹丕)가 “당시 아버지와 함께 종군했던 나는 겨우 11살이었다. 장수는 나의 형을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다!”라고 말한 것을 듣게 되어, 괴로워하다가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진위 여부가 불분명하여 지금은 정설로 여기지 않고 있다.
장남 장천은 후한의 장락위위(長樂衛尉)였으나, 219년 친분이 있던 위풍(魏諷)과 함께 위나라 전복을 목표로 쿠데타를 꾸미다가 실패하고, 조비에 의해 그의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로써 장수의 혈통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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