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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스 - 위키백과

파울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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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울로
성 바울로, 렘브란트
사도, 순교자
출생 타르수스
사망 AD 64-67, 로마
교파 로마 가톨릭 교회
동방 정교회
성공회
주보 성당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축일 1월 25일 (개종)
6월 29일 (순교)
상징 서한집, 칼
수호 신학자, 인쇄업자, 밧줄 제작자, 바구니 제작자

파울로스(그리스어: Παυλος)는 초기 기독교의 포교와 신학에 주춧돌을 놓은 사도이다. 개신교에서는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파울로스는 초대교회를 이끈 뛰어난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려는 열정 하나로 아프리카(북아프리카) 지역을 제외한 로마 제국의 주요도시를 돌아다녔다. 무려 20,000km에 이르는 거리를 돌아다닌 그의 선교여행과, 신약성서 27개의 문서 중 13편에 달하는 그의 이름으로 된 서신서들은, 초대 교회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업적이다. 그는 자신이 선교여행 중에 여러 번 죽을 위기를 맞았다고 말한다. 유대인에게 다섯 번 매를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배가 파선되었다는 것이다.(고린도후서 11:23-28) 그렇게 그는 그리스도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는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목차

[편집] 이름

파울로스는 그리스세계에서 흔하게 사용된 그리스 이름이며, 그의 히브리어 이름은 ‘사울’(Saul) 또는 ‘샤울’이다. 재미교포들이 한글이름과 영어이름을 모두 사용하는 것처럼 해외파유대인(디아스포라)들도 히브리이름과 그리스이름을 모두 사용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로도 그리스이름인 바울로와 히브리이름인 사울을 모두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사울이 바울로로 개명했다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주장은 사도 바울로 시대의 문화에 대해서 몰라서 생긴 오해이다.[1]한글개역판에서는 ‘바울’(영어: Paul), 공동번역에서는 ‘바울로'로 음역하고 있다. 천주교 성경(2005년)에서는 바오로라고 한다. 그외 ‘바우로’라고도 음역되는데, 1965년성공회 공동기도문과 성공회 소성인전에는 바우로로 음역되어 있으며, 현재도 한국 성공회 교회에서는 바우로를 신명(信名)즉, 세례받은 신자에게 붙여주는 이름으로 사용한다. 기독교성인. 축일은 베드로와 똑같은 6월 29일이며 흔히 귀족적인 용모에 머리숱이 적고 길고 검은 수염을 기른 남성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1세기이후에 등장한 성화에서 발견된다. 한국교회에서는 사도 바울, 사도 성 바울로, 성 바우로, 성 바오로,바오로 성인등 다양한 호칭으로 불린다.

[편집] 생애

사도행전(22,3)에 따르면 파울로스는 소아시아의 키리키아 지방(길리기아, 현재의 터키)의 중심도시 타르소스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출생 년대는 신학계에서 기원후 5년 즈음으로 추측하고 있으며[2], 출생 지역과 년대로 미루어 보아 파울로스는 로마 제국의 시민권을 가졌으리라 보고 있으며, 이에 관한 간접적인 기록으로 사도행전(22,25-29)에서 파울로스가 선교 활동 중에 로마군에 체포 되었을 때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고 말한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파울로스는 사도행전 21장 39절에서 자신이 타르소스의 시민권을 갖고 있다는 엇갈린 말을 하고 있으며, 또한 사도행전을 쓴 사람이 성 루가이기 때문에 여기에 관한 확실한 단정을 내리기가 어렵다. 여하튼 파울로스는 자신의 유대 혈통을 부정한 적이 없으며, 더군다나 그가 이른바 다마스쿠스(사도 9,1-19)에서 회심하기까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에 앞장 섰다는 점으로 미루어 그의 유대인 혈통에 관해서는 더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2코린 11,22; 로마 11,1).

파울로스의 서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석할 때 그는 아마 흠이 없는 교육을 두루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어디서 그리고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의 고향이 고대 그리스 문명의 영향 밑에 있었던 관계로 당시의 일반적인 고전 교육 및 유대교적 율법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사도행전 22장 3절에 따르면 그는 가말리엘에게서 율법 공부를 받았는데, 가말리엘은 모세 이래로 유대교 최대의 스승이라 일컬음 받는 힐렐의 손자이다. 그 밑에서 구약성서, 율법, 수사학을 공부했을 것이다.[3] 실제로 사도 파울로스의 서신서들은 구약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자신의 신학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천재성을 보이고 있다. 신학계에서는 사도 파울로스가 가말리엘의 제자였다는 사도행전의 설명을 바탕으로 회심하기 전까지 그가 바리사이 파에 적극 협조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파울로스의 출생과 유대교의 율법을 추종하였던 젊은 시절의 활동은 자신의 사목방향이나 신학적인 견해에 맞지 않을 경우 타협하지 않았던 그의 곧은 성품에서 잘 반영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편집] 주요 연대

R.Jewett이 바울 서신과 사도행전, 비그리스도교적 자료를 기초로 파울로스의 연대기를 재구성한 내용[4]

  • 다마스쿠스 사건 34년
  • 제1차 예루살렘 방문 41년
  • 소아시아와 그리스에서의 선교, 제2차 예루살렘 방문 51년
  • 로마로의 송환 59년-60년
  • 사망 62년

성공회 사제이자 바울로 연구자인 박태식 신부가 제작한 바울로 연대기[5]

[편집] 다마스쿠스에서의 개심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회심, 카라바조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회심, 카라바조

사도 파울로스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다마스쿠스에 가던중 예수의 나타남을 보고 그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예수의 제자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스도교인이 된후 성 바르나바의 중재로 사도들과 교제하였다. 기독교 교회 중엔 성 파울로스의 개심을 사도 바울로의 회심일(1월 25일)로 기념하는 곳도 있다.

파울로스의 개심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혁명적이다. 유대교는 전통적으로 유일신 종교이다; 유대교에 의하면 야훼 외에는 '아도나이'(主라는 뜻의 히브리어)라는 호칭을 붙이지도 못하며, 야훼 만이 유일의 구원자이고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며, 또한 야훼와 비등하거나 동급의 존재는 없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여 야훼와 동급으로 여기기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교인에겐 이는 신성 모독일 뿐 아니라 야훼에 대한 유일신 신앙을 파괴하는 것으로 간주, 성경의 법에 따라 돌로 쳐 죽여야 할 죄라고 생각했다.[8] 파울로스가 기도교 핍박에 열성적이었던 것도 유대교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모세 이래 유대교 최대의 스승 중 하나라고 칭함 받는) 힐렐의 손자인 가말리엘 밑에서 수학한 히브리주의의 챔피언이었다. 그러나 그가 다마스쿠스 근처에서 예수를 만난 후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저주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상을 선전하기 시작했다.

[편집] 선교활동

파울로스는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에서 선교 활동을 했는데, 도중에 이들은 결별을 했다. 마르코라는 헬라식 이름을 가진 유대 청년 요한이 도중에 선교 활동을 중단한 적이 있는데, 바르나바가 그를 전도여행에 다시 데려가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고지식한 성격의 파울로스는 이를 거절했고 결국 심한 언쟁(직역하면 엄청난 분노와 성냄)끝에 서로 헤어졌는데[9][10] , 나중에는 루카(루가,누가)와 더불어 자신을 외면하지 않은 마르코의 가치를 높게 보았다.

파울로스는 아테네, 테살로니키, 코린토스, 에페소스 등에서 선교활동을 했으며, 특히 고린토스에서는 브리스킬라와 아퀼라라는 유대인 천막업자 부부와 같이 일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다. 나중에는 마케도니아 지방에서도 선교활동을 할 정도로 활약하지만, 64년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로 순교하였다. 탈 율법적인 신학을 가진 그의 선교활동은 나사렛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유대교 소종파로 남아 있던 기독교를 세계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종교로 발전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또한 영국 성공회 사제인 매튜 폭스 신부의 《순교자》에 따르면, 사도 성 바울로의 선교활동은 에페소스교회의 주교인 성 디모테오에게 계승되었다.

[편집] 다른 사도들과 불편한 관계

베드로와 파울로스-엘 그레코
베드로와 파울로스-엘 그레코
  • 사도권을 둘러 싼 갈등

사도(apostle)는 희랍어 'απόστολος'를 음역한 것이다. 'απο'는 접두어이며, 'στολ'은 '파송하다'는 동사의 어간 'στελ'이 변형된 것이다. 따라서 사도 라는 뜻이 희랍어 원어는, 어떤 임무를 이룩하기 위해 누군가를 앞에 보낸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사도'란 기독교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기독교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공동체의 지도자 역할을 맡긴 사람을 뜻한다.[11]

사도로서 임명 될 자격 중 하나는 에수의 행적을 직접 본 사람이어야 했다. 파울로스는 환상 중에 예수를 만나 뵙고 그에게 사도로서의 임명과 그 분에 대한 지식을 전수 받았다고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이는 쉽게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임명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과연 '사도'인지를 둘러 싼 논쟁이 있었다. 성경에 의하면 바나바의 중재로 그의 진신설이 교회에 받아들여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12]

  • 히브리파 기독교인들과의 신학갈등

초대교회기독교인 중에 특히 히브리파 기독교인 가운데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13][14]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 야고보등의 기존 사도들은 히브리파 기독교인이었고, 순교자 스데파노(스데반)를 비롯한 일곱 보조자(Diakonos)[15]들은 헬라파 기독교인이었다.[16]

사도 파울로스는 자신이 히브리 인 중의 히브리 인이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율법은 옛 언약 (구약) 아래의 언약 공동체에 주신 법이기 때문에 새 언약 (신약) 아래 새로운 배재에 들어온 하느님의 백성들이 구약 법률 체계를 문자적으로 지킬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율법에 드러난 하느님의 뜻은 영원한 것이고, 그것을 성령 께서 이루어 주시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오히려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된다고 주장했다.

[편집] 파울로스의 사회 문화적 정황

바울 후 그리스도교 선교활동은 기원후 35년에서 60년 사이 정도에 이루어졌다.[17] 당시 로마제국은 지중해 전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군사적인 힘을 바탕으로 지중해 주변을 장악한 로마는, 기술 및 정치 조직에서 다른 지중해 주변의 나라들보다 우위에 있었다. 거기에 그리스(헬라)의 예술적이고 지적인 유산이 합쳐져서, 지중해 세계는 하나의 공통된 도시문명으로 통합되었다.[18]

이 부분의 본문은 역사적 예수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우주관은 오늘날의 입장에서는 신화적이었다. 그들은 천상이 세 가지 층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19]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교회에 보낸 서신서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자랑해서 이로울 것은 없지만 나는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신비로운 영상과 계시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내가 잘 아는 그리스도 교인 하나가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까지 붙들려 올라간 일이 있었습니다. -몸째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나는 이 사람을 잘 압니다. -몸째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갔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그는 낙원으로 붙들려 올라가서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을 자랑하려고 하며 나 자신에 관해서는 나의 약점밖에 자랑하지 않겠습니다.(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고린도후서12:1-5)

[편집] 파울로스의 신학

[편집] 파울로스의 예수상과 교회

[편집] 예수상

파울로스는 역사적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 갈라디아서에서 그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갈1:12) 그는 그의 복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나타나심)로 말미암은(받은) 것이라고 적고 있다.(갈1:12) 따라서 파울로스가 만난 예수는 '부활한 예수'이다. 이 점은 고린도전서 15장 3절에서 8절에 이르는, 예수의 부활과 부활 목격자들에 대해 바울이 기록한 대목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중략)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전15:4,8)

그러나 파울로스는 예수가 이 땅에서 한 일을 어느 정도 알았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파울로스는 성만찬을 말하는 가운데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고전 11:23) 예수께서 떡과 잔을 가지고 말씀 하셨다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이 구절에서 파울로스가 예수가 체포되던 그 밤에 일어난 일을 무슨 경로를 통해서 이었든지 간에 알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것은 파울로스가 예수의 지상행적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는 점을 암시해 준다. 왜냐하면 고전 11장 23-25절은 바울이 복음서와 비슷한 내용으로 예수의 삶에 대한 정보를 지니고 있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20]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갈11:23-25)

특이한 점은 위에서 파울로스는 성만찬에 대한 지식을 다른 사도들 또는 제자들에게 전해 들었다고 하지 않고 "주께 받았다"고 한 점이다. 그래서 이 부분 역시 파울로스가 부활한 예수로부터 직접 전달 받은 지식이라고 보는 신학자들도 있다.

[편집] 교회관

사도 파울로스는 에베소서갈라디아서에서 교회를 그리스도 신앙과 세례를 통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보편 교회(가톨릭교회)로 해석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을 입은 사람입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으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을 따라 유업을 이을 사람들입니다.(갈라디아서 3:26-29/표준새번역

바울의 이러한 교회관은 히브리파 기독교인들의 민족주의를 뛰어넘고자 한 헬라파 기독교 지도자의 신학적인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21] 또한 바울에게 교회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다스리는 신적인 공동체요, 진리의 근원이었다.

내가 곧 그대에게 가기를 바라면서도, 이 편지로 이런 지시(주교부제의 자격에 대한 언급)를 써 보내는 것은, 내가 늦어지면, 그대로 하여금, 하나님의 가족 가운데서 사람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가족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디모데전서 3:14-15)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에베소서 1:22-23)

[편집] 신약성서의 해석

[편집] 구원론

바울로의 구원론은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편집] 파울로스의 편지

[편집] 편지의 작성자 문제

신약성서에서 실제 파울로스의 편지가 몇 개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존재한다. 전통적인 교회의 견해에 따르면, 바울로 서신서는 14개에 달한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은 바울로 서신서에서 사용된 언어와 내용을 살펴서 다음과 같이 구분하려 한다.

1. 확실히 파울로스가 작성한 편지: 로마서, 고린도 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 전서, 빌레몬서
2. 파울로스가 썼을 가능성이 있으나 증거가 부족한 편지: 데살로니가후서
3. 파울로스가 쓰지 않았으나 그의 사상이 담긴 편지: 골로새서, 에베소서[22]
4. 파울로스의 이름이 나오나, 그와는 다른 시대, 다른 상황에서 기록된 편지: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5. 파울로스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그와는 전혀 다른 사상과 문체로 기록된 편지: 히브리서[23]
  •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로마서)

파울로스의 신학 사상이 집대성 된 서신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교부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종교 개혁의 주역인 마르틴 루터, 감리교의 창시자이자 영국 성공회 사제존 웨슬리 신부 등 교회사의 쟁쟁한 인물들에게 영향을 준, 파울로스의 대표적인 서신이다.

[편집] 주석

  1. 《타르수스의 바오로》/박태식 지음/바오로딸
  2. 《타르수스의 바오로》/박태식 지음/바오로딸
  3. 《타르수스의 바오로》/박태식 지음/바오로딸
  4. R.Jewett, A Chronology of Paul's Life,(Philadelphia:Fortress Press, 1979), pp. 96-104, 하워드 클락 키이, 《신약성서 이해》, 서중석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1990, pp. 306-308에서 재인용
  5. 《타르수스의 바오로》/박태식 지음/바오로딸 p.3
  6. 성 바르나바와 성 파울로스가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공동사목했다는 내용은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성직자 오경준 목사가 쓴 《우리가 아는 것들 성경에는 없다》'완벽한 성인 바울은 없다'/오경준 지음/홍성사를 근거로 한다.
  7. 《이야기 세계사》/김경묵외 공저/청아출판사
  8. 신명기 13 장.
  9. 며칠 뒤에 바울로는 바르나바에게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한 모든 도시를 두루 찾아다니며 교우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하고 제언하였다. 그 때 바르나바는 마르코라는 요한도 같이 데려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바울로는 자기들과 함께 가서 일하지 않고 밤필리아에서 떨어져 나갔던 사람을 데리고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심한 언쟁 끝에 서로 헤어졌는데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 를 타고 키프로스로 떠나가 버렸다.(사도행전 15:36-39)
  10. 심한 언쟁으로 번역된 헬라어 파록쉬스모스는 엄청난 분노와 성냄을 포함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파울로스와 바르나바간의 언쟁은 서로에게 엄청난 적대감을 드러내며 벌인 감정다툼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들, 성경에는 없다.》'완벽한 성인 바울은 없다.'/오경준 지음/홍성사
  11. 하워드 클락 키이,[신약성서 이해], 서중석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1990, p.349
  12. 사도행전 9장 26,27절
  13. 《하룻밤만에 읽는 성서》/이쿠다 히로시 저/김수진 옮김/랜덤하우스 중앙
  14. 신약성서학자 김득중(전 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은 초대교회의 기독교인들을 유대교와 기독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해석한 유대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와 기독교간의 단절을 주장한 이방 기독교인으로 구분했는데, 바울로는 이방 기독교의 지도자였다고 주장한다.
  15. 보조자는 헬라어 디아코노스(Diakonos, 보조자, 행정가)를 번역한 말로써, 개신교에서는 집사, 가톨릭성공회에서는 부제, 정교회에서는 보제라고 한다.이들은 사도들이 사목에 집중하도록 돕는 보조자역할도 했지만, 필립보처럼 단독적으로 전도여행을 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16. 그래서 신학자중에는 예루살렘교회의 보조자 선출을 초대교회가 율법을 강조하는 히브리파 기독교와 믿음을 강조하는 헬라파 기독교로 분리된 사건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대구성서아카데미 인문학적 성서읽기, 2008년 4월, 갈라디아서 편, 강의자 정용섭) 반대로 일곱 보조자 모두 헬라퍄였다는 사실에서 히브리파/헬라파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극복한 교회의 성숙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17. P. J. 악트마이어, J. B. 그린, M. M. 톰슨, [현대적인 방법을 적용한 새로운 신약성서개론], 소기천, 윤철원, 이달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4, p. 351
  18. 캐롤라인 오시에크, [신약의 사회적 상황], 김경진 옮김, 기독교문서선교회, 1996, p. 76
  19. 정승우 (2005).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책세상, 79-80쪽. ISBN 9788970134888.
  20. 서중석, 《바울 서신 해석》, 대한기독교서회, 1998, pp. 23-24
  21. 《복음서 신학》-마태복음의 신학/김득중 지음/컨콜디아
  22. 신약성서학자이자 성공회 사제인 박태식(요한)신부는 바울로 서신서중에서 에베소서를 바울로학파의 작품 즉, 바울로의 제자들이 쓴 작품으로 보고 있으며, 성서신학자 르네 지라르는 골로새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를 바울로의 제자들이 교회의 요청에 따라 쓴 작품으로 보고 있다. 《타르수스의 바오로》/박태식 지음/바오로딸p.173,《성경, 세계최고의 베스트셀러》/르네 지라르 저/김주경 옮김/시공사 p.104
  23. 파울로스의 편지 분류는 하워드 클락 키이의 것이다. 하워드 클락 키이, [신약성서 이해], 서중석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1990, pp.304-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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