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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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는 1919년 3·1 운동 이후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상하이에 설립한 망명정부이다. 대한민국 헌법 서문[1]에서는 대한민국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안창호, 이승만, 여운형, 김구, 김규식, 이동휘, 이동녕 등에 의해 설립되었다.
목차 |
[편집] 설립의 준비
상하이는 교통이 편리하고 쑨원이 이끄는 광동정부의 지원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또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조계가 있어서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조건도 갖추고 있었다. 독립지사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우호적인 프랑스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조계에 살면서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런 까닭에 독립지사들이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1918년 조직된 신한청년당은 1919년 1월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여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상하이는 3·1 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하였다.
상하이의 독립지사들은 1919년 여름부터 더욱 민활하게 움직였다. 신규식을 비롯하여 서병호, 여운형, 박찬익, 선우혁 등은 한국과 만주, 연해주, 미주에서 몰려드는 지사를 맞이하기에 바빴다. 상하이의 독립지사들은 프랑스 조계를 중심으로 외지에서 온 사람들의 숙소를 마련해 주고 고려교민친목회를 조직하여 교민 상호간의 긴밀한 연락망을 만들었다. 이 무렵 만주와 연해주의 이동녕, 이시영, 김동삼, 신채호, 조성환, 조소앙 등 명망 높은 독립지사가 상하이로 와서 자리를 잡았고, 한국에서 현순, 손정도 등이 이곳으로 파견되었다. [2]
1919년 3·1 운동 후 독립운동을 계속 확대해 나가기 위해 국내외에서 정부수립계획이 진행되었다. 당시 상하이에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결집되어 있었다.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한 이들은 독립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거듭했다. 먼저 임시정보 수립론이 대두되었는데 조선총독부에 맞서 조선 민족의 망명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그러나 여운형 등은 정부를 조직하기에는 시기가 이르다고 보고 당 조직을 제대로 갖추고 난 뒤에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이것은 먼저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3]
[편집] 설립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에서 여러 지역의 교포 1천여명과 신한청년당에서 주축이 되어 29인의 임시의정원 제헌의원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 후 22일엔 2차의정원 의원 57인이 참석하여 국내의 8도 대표와 러시아령, 중국령, 미국령 등 3개 지방대표가 각각 지방선거회를 통해 의정원 의원을 선출했다. 의장에는 이동녕, 부의장에는 손정도를 선출했다. 의정원은 법률안 의결, 임시대통령 선출 등 국회와 같은 기능을 했다. 의정원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골간으로 한 임시헌장을 채택한 뒤 선거를 통해 국무원을 구성했다. 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하고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 군무총장에 이동휘, 재무총장에 최재형, 법무총장에 이시영, 교통총장에 문창범 등 6부의 총장을 임명한 뒤 4월 13일 정부수립을 선포했다. [4]
같은 시기에 경성에서는 한성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연해주에서도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자연스레 상하이의 임시정부는 통합문제를 제기하였다. 통합교섭은 대한국민의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현실적으로 국내와는 연락을 할 수 없었고 미국에 있는 이승만과도 상의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대한국민의회의 대표로 선정된 원세훈이 상하이로 와서 교섭을 벌였다. 양쪽 모두 정부의 위치를 자기 지역에 두되 산하의 부서만 양쪽에 배치하자는 주장을 폈다. 두 주장이 팽팽히 맞섰지만 그에 못지 않게 단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열망도 높았다. [5] 결국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통합되었다.
[편집] 설립자
조동호(趙東祜)*, 여운형(呂運亨)*, 손정도(孫貞道)*, 조소앙(趙素昂)*, 김철(金澈)*, 선우혁(鮮于爀)*, 한진교(韓鎭敎)*, 신석우(申錫雨)*, 이광수(李光洙)*, 현순(玄 楯), 신익희(申翼熙), 조성환(曹成煥), 이광(李 光), 최근우(崔謹愚), 백남칠(白南七) , 김대지(金大地), 남형우(南亨祐), 이회영(李會榮 ), 이시영(李始榮), 이동녕(李東寧), 조완구(趙琬九), 신채호(申采浩), 진희창(秦熙昌), 신철(申 鐵), 이영근(李渶根), 조동진(趙東珍), 여운홍(呂運弘), 현장운(玄彰運), 김동삼(金東三) 등 29인이었다.
(* 표는 신한청년당원)
[편집] 역대 수반
- 이승만 (1919년 - 1925년)
- 박은식 (1925년)
- 이상룡 (1925년 - 1926년)
- 홍진 (1926년)
- 이동녕 (1926년 - 1927년)
- 김구 (1927년 - 1933년)
- 양기탁(1933년 - 1935년)
- 김구 (1935년 - 1939년)
- 이동녕 (1939년 - 1940년)
- 김구 (1940년 - 1948년)
[편집] 활동
1919년 6월 내무총장으로 안창호가 취임하여 연통제(국내의 비밀연락망) 조직, 기관지 독립신문 발행, 각종 외교 선전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안창호가 대립하였으며, 국무총리인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부르짖었고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여 국무회의 석상에서도 충돌하였다. 임시정부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안병찬, 여운형을 중심으로하는 이르쿠츠크파 와 이동휘를 중심으로하는 상해파, 그리고 김준연을 중심으로하는 엠엘파(ML)로 나뉘어 갈등을 빚었다. 레닌이 보내온 20만 루블을 가지고 개최된 1923년 국민대표회에서 각지의 200여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국민대표회의는 임시정부의 창조론을 내세우는 이르쿠츠크파와 개조론을 내세우는 상해파로 분열되어 결국에는 소련의 지지를 이끌어 내지 못하였고, 내무총장 김구는 국민대표회에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후 재중국청년동맹, 주중국청년동맹 두 공산계열 단체가 경쟁했으며, 좌우 통일을 위하여 유일독립당촉성회가 발족되었으나 공산계열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산하는 등 분열을 거듭하였다. 이후 민족주의 진영이 단결함에 공산계열은 만주로 가서 활동하였다.
1925년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이 미국에 위임통치를 청원했다는 이유로 탄핵당한 이후, 박은식이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고쳐 놓고 사임하였고, 제1대 국무령에 이상룡이 서간도에서 상해로 취임하러 왔으나 각원을 고르다 지원자가 없어 서간도로 돌아갔다. 홍면희가 제2대 국무령으로 뽑혀 진강으로부터 상해에 와서 취임하였으나 역시 내각조직에 실패하였다.
제3대 국무령에 선출된 이동녕의 권유로 김구가 후임 국무령에 취임하였고, 김구는 국무령을 폐지하고 국무위원제로 개정하고 국무위원의 주석이 되었다. 이후 독립 운동 단체들의 분열로 인하여 재정적인 곤란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인원도 줄어 초기 천여명에 달하던 독립운동자들이 수십명에까지 감소하였다. 임정에 참여하였던 김희선, 이광수, 정인과 같은 자들은 변절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고, 각 도,군,면에 조직하였던 연통제가 발각되어 많은 이들이 검거되었다. 또한 생활고로 각각 흩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구는 본국과 만주와 연락이 되지 않자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에게 편지를 써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다. 시카고의 김경이 이끄는 공동회, 하와이의 안창호를 비롯한 여럿, 미주에서는 국민회를 중심으로 김호 등, 멕시코의 김기창과 이종오, 쿠바의 임천택 등, 동지회의 이승만을 비롯한 여럿이 모금에 참여해 주었다.
김구는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을 시켜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해외의 동포들이 격려 편지와 자금을 보내왔다. 이덕주와 유진식에게 일본 총독의 암살을 지시하여 본국으로 보냈다. 또한 윤봉길을 시켜 상해사변 승전기념 천양절에 천황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두 천황 암살의 주모자로 수배된 김구는 숨어다녀야 했으나 남경으로 옮긴 국민당 정부는 이러한 사건들로 임시정부를 협력 대상으로 생각하였고, 김구를 보호하였다. 일본의 영향력하에 들어간 상해에서 피신하여 1933년에는 장제스과 항일전선협력에 합의한다.
이 무렵에 양기탁이 1933년10월 국무령에 선출되어 1935년10월까지 재직한다.[6][7] 그러나 일본군이 중국을 침공함과 함께 임시정부는 상해를 탈출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 남경과 장사를 거쳐 1940년에는 충칭(重慶)으로 그 본거지를 옮기게 된다. 충칭에서 국민당과 미국의 도움을 얻어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태평양 전선에서 확대된 1941년 12월 9일에는 연합군에 가담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발표하지만, 본국 탈환 작전의 준비중에 일본의 항복을 맞이하게 된다.
[편집] 광복군 창설
- 이 부분의 본문은 광복군입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하여 이청천을 총사령으로 임명하였고, 한국광복군의 사령부를 서안에 두고, 이범석을 제1지대장으로 하여 산서 방면으로 보내고, 고운기를 제2지대장으로 하여 수원 방면으로 보내고, 나월환 등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광복군으로 개편하여 제5지대를 삼았다. 김문호를 광복군의 징모처 제3분처 주임으로 삼아 강서성 상요로 파견하였다.
독립당과 임시정부, 그리고 광복군의 일체 비용은 미주, 멕시코,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부담하였으며, 장개석의 부인인 송미령이 이끄는 부녀위로총회에서 중국돈 10만원을 기부하였다.
미국의 OSS(미국 전략 사무국)의 싸전트 박사가 제3지대장인 이범석과 함께 서안에서 광복군에게 비밀 훈련을 실시하였고, 윔쓰 중위는 김학규와 함께 부양에서 비밀 훈련을 실시하였다. 비밀 훈련은 3개월 동안 실시되었고, 이후 정탐과 파괴 공작의 임무로 본국으로 파견될 예정이었다.
[편집] 귀국
일본의 항복 후 충칭에서 해방 소식을 전해들은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귀국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임정 측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주장한 반면, 한반도의 남부에 진주한 미군정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임시정부는 사실상 해체되게 된다. 미군정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며, 정부로 행세하지 않고, 미군정의 질서확립에 협력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였고,[8] 이에 따라 김구 등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다.
임시정부의 법통에 대해선 임시정부 내에서도 우파와 좌파 간에 격렬한 대립이 있었다. 1945년 8월 15일부터 좌파는 국내외 단체와 민중의 기초 위에 임시정부를 다시 세우자는 취지에서 임시정부의 총사직을 요구한 반면, 한독당 측은 임시정부를 가지고 귀국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귀국하기 전 중국공산당 주은래, 동필무가 임정 국무위원을 초청해 송별연을 하였고, 중국 중앙정부와 국민당에서는 장개석과 그의 부인 송미령이 임정 국무위원과 한국독립당 간부와 각계 요인 2백명을 초청하여 환송회를 개최해 주었다.
이후 대한민국 수립과정에서 조선총독부와 미군정에서 활동한 친일파들이 "실세"로 그대로 남았고, 임시정부의 통일노선이 제1공화국에 의해 완전히 무시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것과는 달리 임시정부의 계승은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편집] 상하이 임시정부 유적지
1919년 부터 1932년 까지 13년간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은 머물렀던 곳이다. 임정은 1932년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일어나자, 일본군을 피해 항저우를 비롯한 중국 6개의 도시를 유랑하다 일제 말기인 40년에는 충칭으로 이전하였다.
상하이 유적지는 마땅루 306농4호에 자리잡고 있으며, 신천지(新天地)와 가까워 이곳에서 걸어가면 된다. 오래된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에서 1층과 2층에 유물을 전시하고, 비디오를 보며, 설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다. 내부에는 주요 인사들의 사진과, 태극기 등의 유물, 백범 김구의 집무실, 각 부처의 집무실 등이 있다.
- 상하이: 1919년 ~ 1932년
- 항저우: 1932년 5월 ~ 1935년 11월
- 자싱(嘉興, 가흥): ~1935년 11월
- 난징(南京): 1935년~1937년 4월
- 창사(長沙): 1937년~1938년
- 광저우(廣州): 1938년~1939년
- 치장(?江): 1939년 ~
- 전장(鎭江):
- 류저우(柳州):
- 구이린(桂林):
- 충칭(重慶): 1940년 8월 ~ 1945년 8월 15일
위의 유적지 중 임시정부 유적지가 복원된 곳은 상하이, 항저우, 충칭이다.
[편집] 같이 보기
[편집] 바깥링크
[편집] 주석
- ↑ 대한민국의 헌법
- ↑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3쪽
- ↑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3~24쪽
- ↑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4~25쪽
- ↑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7쪽
- ↑ http://narasarang.mpva.go.kr/person_search/merit_search_view.asp?idx=4348&page=1&search_1=&search_2=양기탁&search_3=&search_4=&search_5=출생지&search_6=내용&orderByName=&orderBy=
- ↑ http://www.snmb.mil.kr/snc_new/web/status/status_02_2.jsp?sTop=3&sLeft=3&sLocal=1
- ↑ 김삼웅, 《한국현대사 뒷얘기》(가람기획, 1995) 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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