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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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인 환웅 (신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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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고 대 원 삼 국 | 삼 국 | 남 북 | 후 삼 |
고조선 - 단군 | ||||||
진국 | |||||||
삼한 | 옥 저 |
동 예 |
부 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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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한 |
변 한 |
마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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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야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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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구 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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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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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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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백 제 |
태 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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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
・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 원의 간섭기 / 삼별초의 난 ・ 홍건적의 고려 침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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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 |||||||
・ 역대국왕 / 조선왕조실록 ・ 임진왜란 / 병자·정묘호란 ・ 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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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 |||||||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대한민국임시정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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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기 | |||||||
대한민국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
신시(神市)는 환웅(桓雄)이 세우고 다스렸다는 고조선 이전의 나라 또는 영역이다. '신시'를 글자 대로 풀이하자면 '신의 시장(저잣거리)'이다. 신시를 신의 도시로 해석하는 것이 종래의 설이나, 시(市)가 도시의 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근대 이후므로 신시를 신불(市:슬갑 불; 巾-총4획)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불은 고대말로 현재의 땅이라는 뜻으로 '벌'이라는 현대어가 남아 '벌판'등으로 쓰인다[1]. 후대의 신라, 서울과 동형으로 보기도 한다.
'신시'는 북애자(北涯子)의 《규원사화(揆園史話)》나 허목(許穆)의 《동사(東事)》에서 '신시씨(神市氏)'로서 지명이 아니라 그 설립.통치자인 환웅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일부에서는 '신시'를 '배달국'으로도 부른다.[2][3][4]
목차 |
[편집] 각 문헌에 서술된 신시
삼국유사 이후로 여러 문헌에서 신시가 등장하는데, 그 내용은 약간씩 다르다.
[편집] 삼국유사
삼국유사(1280년대초)에서 설명되는 신시는 다음과 같다.
- 환웅이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에 내려왔다. 신단수(神檀樹) 아래를 신시(神市)라 하였는데, 이 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하였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수명.질병.형벌.선악(善惡) 등을 주관하고, 모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에 거하면서 다스리게 되었다.
[편집] 규원사화
《규원사화》(1675년)의 조판기.태시기.단군기 중 '태시기'에 해당된다.
- 천지가 나뉘어지고 인간이 생겨난 이후, 인간이 만물의 주인이 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신시씨가 세상에 거하면서 치세를 시작하였다.
- 그 치세가 '궐천년(闕千年)' 또는 '궐백년'으로, 11,000년 또는 10,100년에 해당된다.
- 치우씨, 고시씨, 신지씨, 주인씨 등이 신시씨의 명(命)을 따르는데, 이들 중 치우씨와 고시씨의 후손이 환웅씨에 이어 세상을 다스렸다.
- 환웅씨의 시대에 이어 복희씨, 신농씨, 치우씨, 탁록의 전투와 황제씨의 치세가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고, 다시 치우씨와 소호씨가 마지막으로 언급되었다.
- 신시는 단군 임금의 단국(檀國, 백달국, 또는 박달국)으로 계승되었다.
전체적인 성격으로 본다면, 태시기는 조판기와 단군기를 잇는, 처음 생겨난 인간이 문명을 이룩하여 최초의 나라인 고조선을 세우기 직전의 단계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하였다고 할 수 있다.
[편집] 동사
허목의 《동사(1677년 추정)》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오랜 옛날 구이(九夷)의 처음, 환인씨(桓因氏)가 있었는데, 환인이 신시(神市)를 낳아, ‘백성들과 살며 가르치면서 다스리기 시작하였다(始敎生民之治)’.
[편집] 신단민사
김교헌의 《신단민사》(1904년/1946년)에는 천신(神市氏)이 개천 갑자 상달(10월) 초사흗날(3일) '신시'의 시대를 열고 120년 간 백성을 가르치고, 무진년 10월 단군이 나라를 세워 1026년 간 '배달'의 시대를 다스리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편집] 부도지
《부도지》(1953년)의 환웅씨는 황궁·유인·환인씨에 이어 천부삼인을 계승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무여율법 4조 제정
- 집·여행하는법을 가르침
- 궁전·배·수레의 제작·음식을 익혀 먹는 법 등을 가르침
- 역법·의약·천문·지리 연구
단군이 나라를 세운 후에는 '함께 모여 서로 돕고 화합하고 이치를 배우는' 자리로서 신시를 세웠다. 단군시대의 신시는 10년마다 열렸으며, 마음을 정화하고 하늘을 살피며, 희생물로 제를 지내고 모여 노래하는 형태였다.
신시와는 별도로 육로의 중심지에는 조시(朝市), 해로의 중심지에는 해시(海市)가 세워져 매년 10월 제를 지내고 토산품을 바쳤다. 이 때에는 물품의 교역이 있었다고 한다.
[편집] 환단고기의 배달국
- 이 부분의 본문은 환단고기#배달국입니다.
1979년에 필사본으로만 공개된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신시 배달국이라 일컫고있다. 배달국(배달國[5][6])은 그 명칭이다. 《환단고기》는 단군이 세운 고조선 이전의 만주와 한반도를 중심으로 자리잡았던 한민족(韓民族) 고대국가의 시대를 배달국이라고 지칭하고 있으며, 중국 사서에서 나라 이름이 구리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7]《환단고기》에는 3301년 간의 환국 다음에 1565년 간 환웅이 다스린 나라로 설명되었다. 《환단고기》의 배달국에 대한 내용은 위서논란, 환웅의 재위 기간이 비현실적인 점 등의 이유로 남북 어느 쪽의 역사학계에서도 실제 역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8].
- 건국과 멸망 - 하늘의 주신(主神)인 환인의 아들인 환웅은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등 3000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며 모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에 거하면서 다스렸는데, 이를 신시라 하였다. (신단민사에서는 신시의 건국일자를 10월 3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시의 멸망에 대한 별도의 기록은 없으며, 단지 신시를 이어 왕검이 고조선을 개국하였다고 하였다.
- 배달국의 전쟁 - 치우와 유망(楡罔)의 전쟁과 치우와 헌원(軒轅)의 전쟁이 있다.
- 「신시역대기」에 환웅이 1천 5백여 년 간 18대를 이어 배달국(또는 신시)을 다스린 역년이 기록되어 있다.
[편집] 주석
- ↑ 신종원, 단군신화에 보이는 樹木信仰, 韓國史學史學報 8, 5-22 (2003)
- ↑ 1979년 출간된 '환단고기'에서 처음으로 '배달국'이 신시의 명칭으로 주장되었다. 그 이전에는 규원사화, 최남선의 주장 등에서 박달임금의 나라로서 단군조선의 명칭으로 알려져 있었다.
- ↑ 밝달국이라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이두표기로 백달(白達)이라고 쓰지만 읽을때는 밝달이라고 읽어야 한다. 이두는 단어의 뜻을 나타내는 어근은 한자의 훈을 차용하고, 그 나머지 어미를 표현할때는 한자의 음을 차용한다. 즉, 白의 음은 백이지만 흰색으로 밝다는 뜻을 나타내며, 達의 음은 '달'로 앞의 白을 '백'으로 읽지말고 '밝'으로 읽으라고 붙인것이다.
- ↑ 허종호 著 《고조선력사개관》에서는 박달을 ‘밝다 + 산이있는 지역’으로 해석하였다.
- ↑ 한자를 빌려 倍達國, 檀國 등으로 적기도 한다.
- ↑ 밝달국이라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 ↑ 여운건, 오재성, 과학으로 밝혀진 우리고대사 (2004).
- ↑ 환단고기는 현재 대한민국 사학계는 위서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환단고기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