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원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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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원사화(揆園史話)》는 조선 숙종 원년(즉위년 다음해)인 1675년에 북애자가 저술하였다는 역사서 형식의 사화(史話)로, 단군실사(檀君實史)라고도 한다. 상고시대와 단군조선의 임금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규원사화》의 일부 내용이 처음 정식으로 인용된 것은 1925년 간행된 《단전요의(檀典要義)》를 통해서이다. 《단전요의》에 인용된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이 1929년 간행된 《대동사강》에서 인용되었고, 전체 내용은 1932년 5월 이전에 등사되었다.[1] 1934년에도 그 내용이 직접 인용되었으며[2], 1940년에는 양주동이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후에 국립중앙도서관 측에서 해방 직후(1945~1946년) 북애자의 원본 또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을 구입하여 1972년에 귀중본으로 등록하였다.[3]
대한민국 학계에서 진위(저작 연대 인정)여부는 논란중이며, 북조선 학계는 《규원사화》의 일정한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여 《고조선력사개관》에서 인용하였다.
목차 |
[편집] 저자
- 북애자(北崖子)는 효종 ~ 숙종 시대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선비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다. 붓을 던지고 전국을 방랑하던 중 산골에서 청평 이명이 저술한 진역유기를 얻어 역사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 청평 이명(淸平 李茗)은 고려말에 청평산에 머물렀던 도인으로 추정되며, '선가의 말이 많은(도교 용어가 많이 사용된)' 《진역유기》 3권을 지어 산골에 숨겨두었다고 한다. 조선 선조 때에 씌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조여적의 《청학집》에 도인의 계보를 설명하는 중에 간단하게 언급되었다.
[편집] 구성
〈규원사화서〉와 〈만설〉은 북애자의 글이며, 〈조판기〉, 〈태시기〉, 〈단군기〉에는 설명 중간에 저자와 이전 저자인 이명의 의견이 추가된 듯한 부분이 있는데, 대체로 인용 근거를 표시하고 있다.
- 규원사화서(揆園史話序)
- 조판기(肇判記)
- 태시기(太始紀)
- 단군기(檀君紀)
- 만설(漫說)
[편집] 개요
《규원사화》는 산속의 바위굴에 보관한《진역유기(震域遺記)》를 주로 참조하였으며, 《진역유기》는 고려 말기 사람인 청평 이명(淸平 李茗)이 저술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진역유기》는 다시 발해의 역사서인 《조대기(朝代記)》를 참조하여 저술되었으므로, 《규원사화》는 《조대기》의 내용을 주로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조대기》는 세조 때에 내려진, 잡학(천문, 지리, 역사)의 책을 구하는 유시에서 그 이름을 볼 수 있어서, 조선 초까지는 그 내력이 전해져 내려온 책이다.
단원별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편집] 규원사화서
서문에 해당되며, 저술 배경을 적고 있다.
[편집] 조판기, 태시기, 단군기
〈조판기〉, 〈태시기〉, 〈단군기〉의 세 부분은 《조대기》에서 주로 인용된 것으로 짐작된다.
〈조판기〉는 수백만 년 간의 혼돈의 시대가 지나고 하늘과 땅이 나뉘어지고 환인의 의지, 환웅과 그 거느리는 작은 신들의 무리의 활동으로 동·식물이 땅 위에 나타나 번성하고 사람들이 만들어지는 20만 년 간의 내용이 시간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시기〉는 환웅이 환인의 명을 받아 치우씨(蚩尤氏), 고시씨(高矢氏), 신지씨(神誌氏) 등으로 대표되는 3천의 무리와 함께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1만 1천 년 간의 치세의 내용을 설명한다.
〈단군기〉는 단군임금이 고조선을 세우고 이후의 역대 임금들이 47대에 걸쳐 만주와 요동, 한반도 북부 일대를 다스리는 1천 2백여년 간의 치세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편집] 만설
후기에 해당되며, 북애자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담고 있다.
[편집] 상세 내용
[편집] 조판기
- 환인(一大主神), 환웅천왕, 작은 신의 무리
수백 만 년의 혼돈으로부터 수십 만 년에 걸쳐 천지가 나뉘고 인간과 만물이 탄생하는 과정을 설명하였다.
[편집] 태시기
- 신시씨
- 복희씨
- 신농씨
- 치우씨
- 탁록을 중심으로 벌인 치우씨와 신농씨의 전투에서는, 장군 81명을 선발하여 탁록(涿鹿)에서 출발하여 구혼(九渾)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때 한해동안 9 제후의 땅을 빼앗았다고 기록하였다. 후에 다시 유망의 나라의 도읍인 공상(空桑)을 공격하였으며, 도읍을 공격한 이후로는 한해만에 12제후의 나라를 합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 황제씨
- 소호씨
- 치세 기간은 궐천년 또는 궐백년이다. '궐'은 '만'을 의미한다. 즉, 궐천년은 1만 1천 년이다.
[편집] 단군기
《규원사화》 「단군기」에는 47대의 왕과 치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단군(檀君)임금 : 재위 93년
- 부루(夫婁)임금 : 재위 34년
- 원년(기원전 2240년) 즉위.
- 3년(凡三年) (기원전 2237년)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 가륵(嘉勒)임금 : 재위 51년
- 오사(烏斯)임금 : 재위 49년
- 구을(丘乙)임금 : 재위 35년
- 달문(達文)임금 : 재위 32년
- 한율(翰栗)임금 : 재위 25년
- 우서한(于西翰)임금 : 재위 57년
- 아술(阿述)임금 : 재위 28년
- 노을(魯乙)임금 : 재위 23년
- 도해(道奚)임금 : 재위 36년
- 아한(阿漢)임금 : 재위 27년
- 흘달(屹達)임금 : 재위 43년
- 고불(古弗)임금 : 재위 29년
- 벌음(伐音)임금 : 재위 33년
- 위나(尉那)임금 : 재위 18년
- 여을(余乙)임금 : 재위 63년
- 동엄(冬奄)임금 : 재위 20년
- 구모소(구牟蘇)임금 : 재위 25년
- 고홀(固忽)임금 : 재위 11년
- 소태(蘇台)임금 : 재위 33년
- 색불루(索弗婁)임금 : 재위 17년
- 아물(阿勿)임금 : 재위 19년
- 연나(延那)임금 : 재위 13년
- 솔나(率那)임금 : 재위 16년
- 추로(鄒盧)임금 : 재위 9년
- 두밀(豆密)임금 : 재위 45년
- 해모(奚牟)임금 : 재위 22년
- 마휴(摩休)임금 : 재위 9년
- 나휴(奈休)임금 : 재위 53년
- 등올(登兀)임금 : 재위 6년
- 추밀(鄒密)임금 : 재위 8년
- 감물(甘勿)임금 : 재위 9년
- 오루문(奧婁門)임금 : 재위 20년
- 사벌(沙伐)임금 : 재위 11년
- 매륵(買勒)임금 : 재위 18년
- 마물(麻勿)임금 : 재위 8년
- 다물(多勿)임금 : 재위 19년
- 두홀(豆忽)임금 : 재위 28년
- 달음(達音)임금 : 재위 14년
- 음차(音次)임금 : 재위 19년
- 을우지(乙于支)임금 : 재위 9년
- 물리(勿理)임금 : 재위 15년
- 구홀(丘忽)임금 : 재위 7년
- 여루(余婁)임금 : 재위 5년
- 보을(普乙)임금 : 재위 11년
- 고열가(古列加)임금 : 재위 30년
- 치세 기간은 기원전 2333년 ~ 기원전 1128년으로, 47대 1205년 간 지속되었다.
[편집] 역사적 인식
민족주의사학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인식이 주목된다.[4]
- 민족(我族)을 중심으로 한 역사의 이해
- 사대모화사상에 대한 비판
- 단군의 민족의 기원으로서의 인식
- 북방 중심의 역사인식
- 민족의 우수한 고유문화에 대한 인식
- 동이와 여진에 대한 동족의식
- 만주대륙에 대한 영토의식
- 진취적 기상의 강조
- 역사와 민족애에 대한 인식
[편집] 진위논란
대한민국 사학계에서는 《규원사화》가 조선 숙종년간에 저술되어, 이후 근대기 민족사학과 대종교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과 20세기 초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위작되었다는 주장이 병립하고 있다.[5] 조선 후기의 저술은 인정하지만, 그 내용을 실제 역사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이르다고 여기는 견해도 있다.[6]
북조선 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통치 연대를 《규원사화》와 다른 1500년으로 보고 있으나, 단군조선의 제도에 대한 묘사나 전조선(단군조선)의 1200 년 간 47대왕이 통치한 평균 재위년수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고조선 사회의 설명에 해당 내용들을 채택하였다. [7][8]
[편집] 국립중앙도서관의 인증
1945년 구입한 고서에 대하여 1972년 11월 3일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심의의원인 이가원(李家源), 손보기(孫寶基), 임창순(任昌淳) 3인이 조선 중기에 씌여진 진본임을 확인하여 인증서를 작성하였다. 이 내용은 1989년 사단법인 한배달을 통해 확인, 공개되었다.[9]
[편집] 위서론
《규원사화》는 《단기고사》나 《환단고기》와 함께 '《환단고기》류'로서 20세기에 쓰여진 위서로 간주되기도 한다. 위서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논문은 다음과 같다.
- 송찬식, 〈僞書辨〉, 《月刊中央》, 1977, 9월호
- 조인성, 〈《揆園史話》論添補〉, 《慶大史論》3, 1987, 경남대학교
- 이순근, 〈고조선위치에 대한 제설의 검토〉, 《성심여자대학교》, 1987.5.15
- 조인성, 〈現傳 《揆園史話》의 史料的 性格에 대한 一檢討〉, 《李丙燾 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1987
- 조인성, 〈《揆園史話》와 《桓檀古記》〉, 《韓國史市民講座》2輯, 1988
- 조인성, 〈《揆園史話》論 添補〉, 慶大史論, 1987.3
[편집] 진서론
위서론에 반박하고 진서임을 주장하여 《규원사화》의 내용의 실제 역사로서의 가치를 주장하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 이상시, 《檀君實史에 관한 文獻考證》, 고려원, 1990
- 《규원사화》 〈단군기〉의 중국과의 외교.전쟁 등에 해당되는 중국 사서의 기록과 연대가 부합함을 제시하였다.
- 최인철,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 사회과학원-한국학술진흥재단, 2005
- 《규원사화》는 다른 단군관계비사들에 비해 과장이나 가필이 적다고 판단, 일부 내용의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규원사화》가 숙종 초 북애자가 쓴 진서임은 인정하며, 그 내용은 당시의 전해지는 야승을 모아 재구성된 것어서 실사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지만 아직은 그 내용의 사료적인 가치 보다는 조선 후기의 민족주의의 흐름을 반영하는 자료로서 더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 한영우, 17세기의 반존화적 (反尊華的) 도가사학의 (道家史學) 성장 - 북애의 (北崖) 「 규원사화 (揆園史話) 」에 대하여 -, 한국학보, 1975
- 정영훈, 〈규원사화의 민족사상〉, 고려대학교, 1981
- 정영훈, 〈단군민족주의와 그 정치사상적 성격에 관한 연구 : 한말-정부수립기를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1993
- 정영훈, 〈근대 민족주의사학의 역사인식〉,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술진흥재단, 2005
- 비주류사상인 선가(仙家)의 역사인식에 주목하였다.
- 심백섭, 〈'규원사화'의 본문구조와 세계관 형태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 1993
[편집] 위서론 및 반론의 주장
다음은 현재까지 제시되어 있는 규원사화의 위서론 및 반론이다.[10][11][12]
위서론 | 반론 |
---|---|
19세기 이전의 원본이나 필사본이 존재하지 않는다. | 분야별 전문가의 감정을 거친 조선시대 필사본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
근대어나 사용하지 않았던 말들이 등장한다. ('文化之啓發, 更可速矣'의 '文化', 壬辰之役, 先民, 民氣, 强國之要, 天主 등) | 문맥상 '文化'는 당시에 쓰이던 '문치교화'의 의미로 해석되며, 壬辰之役, 先民, 民氣의 단어들도 그 이전 시대의 서적에서 확인된다. |
후대에 출간된 한치윤의 《해동역사》에 '高麗史 光宗十年 逐鴨綠江外女眞, 於白頭山外居之云'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틀린 내용이다. 《규원사화》에도 같은 내용이 있는데, 《해동역사》는 《규원사화》를 언급하지 않는다. |
|
저자는 〈만설〉에서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고 있으나, 숙종 원년은 전란 후 큰 문제가 없었던 시기였다. | 문맥을 고려하면 문제 없는 내용 전개이다. 빼앗긴 강토는 발해의 영토인 만주와 요동을 의미한다. |
청평이 부연 설명한 고려 시대 '팔성당'의 내용이 다르다. | 청평은 묘청의 불교적 해석을 바로잡았을 뿐이다. |
청평은 고려 시대의 사람이라고 했는데, 고려 시대의 책에서는 임금의 이름으로 쓰인 '治'자를 사용할 수 없다. |
|
20세기 초에 처음 등장하였다. 규원사화나 진역유기는 20세기 이전에 언급된 적이 없다. | 진역유기는 산골 마을에서 발견되었다고 북애자가 이미 설명하였다. 규원사화가 숙종이후 2백여년 간 언급되지 않은 것은, 만설에서 담고 있는 북애자의 (청과 손잡고 만주와 중토를 지배하자는) 의견이 명에 대한 보은과 청에 대한 패배감으로 북벌을 준비하던 당시의 정서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
북애자의 생각을 적은 만설에 적혀 있는 첨성대의 건립 시기가 다르다. |
[편집] 주석과 참고자료
- ↑ 조인성, ‘「규원사화」론 첨보’. 경대사론 3. 1987.
- ↑ 이창환, 《조선역사》, 1934
- ↑ 현존하는 《규원사화》의 필사 및 등사본은 다음과 같다. - 조인성, 「규원사화론 첨보」《경대사론 3》,1987; 최인철,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 사회과학원-한국학술진흥재단, 2005
국립중앙도서관본(조선 중·후기, 필사)
국립중앙도서관본(양주동 소장본, 필사)
고려대본(양주동-손진태 필사본, 필사)
동국대본(권상로 소장본, 필사)
서울대본(방종현 소장본, 등사)
한국학중앙연구원본(이선근 소장본, 등사)
북한 인민대학습당 소장본(필사) - ↑ 정영훈, 〈근대 민족주의사학의 역사인식〉,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술진흥재단, 2005
- ↑ 김정배, 한국사 권4 - 초기국가 – 고조선.부여.삼한, 국사편찬위원회, 1997. pp.53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中 규원사화, 한국학중앙연구원(舊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 1996
- ↑ 허종호, 《고조선력사개관》, 사회과학출판사 남- 도서출판 중심 펴냄, 2001
- ↑ 최인철,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 사회과학원-한국학술진흥재단, 2005
- ↑ 고평석, 《한배달》 6호, 1989
- ↑ 이상시, 《檀君實史에 관한 文獻考證》, 고려원, 1990
- ↑ 정영훈, 〈근대 민족주의사학의 역사인식〉,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술진흥재단, 2005
- ↑ 최인철,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 사회과학원-한국학술진흥재단, 2005
[편집] 참고 문헌
- 북애자, 《규원사화》, 조선시대
- 「17世紀의 反尊華的道家史學의 成長―北崖子의 揆園史話에 대하여―」,한영우, 한국학보 1, 1975
- 이상시, 《檀君實史에 관한 文獻考證》, 고려원, 1990
- 김정배, 《한국사》 권4 - '초기국가 – 고조선.부여.삼한', 국사편찬위원회, 1997. pp.53
- 허종호, 《고조선력사개관》, 사회과학출판사 남- 도서출판 중심 펴냄, 2001
- 북애자.조여적, 《규원사화》.《청학집》, 아세아문화사, 1976
- 조인성, 《규원사화》와 《환단고기》 사료 비판, 『韓國史 市民講座 제2집』, 일호각,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