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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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는 한국의 고대 국가이다. 온조왕을 시조로 하여 기원전 18년 현재의 한강 하류의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해 건국되었다. 백제는 고구려, 신라와 함께 삼국의 하나이다. 538년 이후의 공식 국명은 남부여(南扶餘)이며,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을 받고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며 멸망하였다.
목차 |
[편집] 역사
[편집] 백제의 국가 성립
백제 건국 설화는 여러가지 논란이 있지만, 기원전 18년에 부여 또는 고구려 계통의 유민 세력과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최초의 백제의 이름은 십제였다.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유한 고구려 유민 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한나라의 군현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차츰 성장해 나갔다.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중국 대륙의 선진 문물들을 받아들여 정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 무렵 백제는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복제를 도입하는 등 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또다른 사유로는 졸본부여 사람인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남쪽으로 함께 내려온 뒤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각기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으며, 비류가 죽자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옮겨오므로 비로소 백제(百濟)라는 큰 나라로 성장했다고 한다.
[편집] 백제의 정치적 발전
4세기 중반 백제는 근초고왕 때 크게 발전하였다. 이때 백제는 마한의 나머지 세력을 모두 정복하여 그 영토가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립하였다. 또한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오늘날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와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도, 황해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점차 전제군주화가 되어가고 부자 상속에 따른 왕위 계승이 확립되었다. 아울러 침류왕 때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편집] 백제의 흥성
4세기 근초고왕은 남으로 마한 지역을 완전히 병합하고 탐라를 복속시켰다. 북으로는 고구려의 침공을 막아내고, 북진하여 오히려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일부 학자들은 근초고왕 때 중국의 요서 일대 및 산둥 반도, 일본 큐슈에 세력을 뻗었다고 주장한다.
송서,양서 등의 남조 계열의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이 요동 일대를 점령한 시기(397년 이후)에 백제가 요서 지역에 영토를 획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백제는 광개토대왕의 공격을 받아 58개 성을 빼앗기는 등 어려운 상황에 있어 사실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장수왕에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웅진성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대외 팽창이 위축되었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으며, 문주왕 때는 해구와 같은 무인 실권자가 등장하여 백제의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5세기 후반 동성왕 때부터는 다시 사회가 안정되면서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은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고, 무령왕은 양직공도에 의하면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백제 중흥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북제서에는 571년 위덕왕을 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로 임명한 기록이 있어 이를 백제가 산둥 반도를 점유한 근거로 보기도 한다.
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개명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성왕은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 대륙의 남조(南朝)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또한 왜에 불교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한편,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수복하였지만, 얼마 안 가 배신한 신라에게 빼앗기고 성왕 자신도 신라군과 싸우다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편집] 백제의 쇠망과 부흥운동
고구려가 수나라·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백제에서도 무왕과 의자왕이 신라에게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의자왕 2년에는 대야성을 비롯한 신라의 성 40여개를 점령하기도 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회담이 결렬되자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삼국를 통일하려 하였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먼저 백제를 공격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왕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한 백제는 결국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이 들고 일어나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복신과 흑치상지, 도침 등은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200개의 성들을 되찾고 사비성과 웅진성에 주둔한 당나라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결국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의하여 진압되고 만다.
이때 왜가 백제에 원군을 보내, 신라-당나라 연합군과 백제-왜 연합군이 백촌강에서 격돌하였다 (백촌강 전투). 그러나 백제-왜 연합군은 대패하고, 백제의 부흥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900년에서부터 936년 동안 백제라는 이름의 국가가 신라의 장군이었던 견훤에 의해 다시 세워지나 역사가 짧고 연관성이 비교적 적다. 학계에선 편의상 후백제로 부른다.
[편집] 사회
백제의 언어, 풍속, 의복은 고구려와 큰 차이가 없었다. 상무적인 기풍을 간직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고 형법의 적용이 엄격한 점에서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반역자나 전쟁터에서 퇴각한 군사 및 살인범은 목을 베었고, 도둑은 귀양을 보냄과 동시에 2배를 물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횡령을 했을 때는 3배를 배상하고 종신형에 처하였다.
백제의 지배층은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며 선진문화를 수용하였다. 중국의 고전과 역사책을 즐겨 읽고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였으며, 관청의 세무에도 밝았다. 투호와 바둑, 장기는 백제 지배층이 즐기던 오락이었다.[1]
[편집] 일본과의 관계
백제는 근초고왕 시기 때부터 왜와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고 당시 백제가 왜에 보낸 칠지도는 양국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 중의 하나이다. 왜는 백제로 부터 불교와 한자등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며 아스카 문화를 꽃피웠고 백제는 왜로 부터 군사인력을 제공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 중 백제가 왜와 교류가 가장 깊었기 때문에 왜의 귀족층에는 백제계 도래인의 자손이 많이 있었다. 풍장(豊璋)의 남동생·선광(善光)의 자손은 조정으로부터 구다라노 고니키시(百濟王)의 성을 받아, 백제의 왕통을 전하게 된다. 덧붙여 간무 천황의 어머니인 다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는 무령왕을 조상으로 하는 도래인 야마토(和)씨의 출신이다. 현존하는 인물화상경은 백제의 무령왕이 게이타이(繼體)천황에게 선물로 보낸 거울로 백제와 왜의 친밀한 사이를 증명한다.
[편집] 백제의 요서 경략
백제가 중국의 랴오시 지방에 진출했었다는 이른바 ‘백제요서경략설’은 송서, 양서 등의 남조계 사서에서 비롯한 것이다. 다만 지리적으로 랴오시 지방과 인접한 북조계 사서에서는 관련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학계에서 지속적인 논란이 되어왔다.
일반적으로는 백제의 요서진출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학계의 시각이 대세이지만(대표적인 예로 〈백제의 요서영유(설)〉(유원재, 1995, 《한국사》 6, 국사편찬위원회, 132~150쪽), 최근에는 다시 백제의 요서 진출을 신중하게 실재한 것으로 바라보는 입장도 제기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4세기 백제의 遼西 지역 진출과 그 배경〉(강종훈, 2003, 〈한국고대사연구〉30, 한국고대사학회, 5~37쪽)이 있다.
한편, 재야사학계에서는 백제의 요서 경략을 인정하는 편이다. 대륙사관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백제의 위치를 한반도 서남부가 아닌 황허 강과 양쯔 강 사이에 비정하면서, 백제의 요서 경략이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또다른 재야사학자이자, '한권으로 읽는 왕조실록' 시리즈의 저자인 박영규는, 대륙사관은 부정하지만, 산둥 반도 일대에 대륙백제가 존재했다는 주장을 펴면서, 백제가 요서 경략을 했을 뿐 아니라, 그 지역에 태수를 임명하기까지 했다고 주장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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