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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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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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손에 폭탄을 들고 태극기 앞에서 절명사를 가슴에 붙인 채 촬영한 그의 마지막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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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8년 6월 21일 대한제국 충청남도 예산군 |
사망 |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 시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총살형 |
직업 | 독립운동가 |
부모 | 윤황(부), 김원상(모) |
윤봉길(尹奉吉,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본명은 윤우의(尹禹儀), 호는 매헌(梅軒)이고,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다.
목차 |
[편집] 초기 생애
아버지는 윤황(尹璜)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 김원상(金元祥)이다. 1918년 덕산보통학교(德山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어 최병대(崔秉大)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尹聖儀)와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21년 성주록(成周錄)의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익혔다.
청년 시절에는 농민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갔다.
[편집]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야채장사를 하던 그는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를 찾아, 독립운동에 몸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김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연(천장절)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며, 협의 끝에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의하였다.[1][2] 당시 폭탄은 폭발물 전문가인 김웅에 의해 폭탄 투척에 적합한 도시락 모양과 물통모양으로 제작되었는데, 두번의 실험을 거쳐 완성하였다. 당시 첫번째 실험에서 폭탄이 터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실험을 한 것이다. 윤봉길은 스프링코트를 말쑥하게 차려입고 오른손에는 일장기, 왼손에는 물통과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들고 삼엄한 경계망을 뚫으면서 훙커우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11시가 되자 중국주둔 일본군(천진군) 총사령관인 사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이 등장했고 상하이에 있는 외교관과 내빈이 자리를 잡았다. 군악이 울려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과 내빈은 돌아가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하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열였다.
11시 50분 일본 국가가 울려퍼지는 순간 윤봉길은 물통폭탄을 단상으로 힘차게 던졌다.[3] 경축대 위에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다시 바닥에 놓아둔 도시락폭탄을 집어들려는 순간 일본 헌병이 덮쳤다. 윤봉길은 팔목이 잡힌 채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외쳤다.[4]
훙커우공원에서의 폭탄 투척을 실행한 윤봉길은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리카와,상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 등을 죽이고,총영사 무라이,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에게 중상을 입혔다.
폭탄 투척 직후 체포,사형을 선고 받고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어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金澤陸軍刑務所)에서 총살 당했다.
당시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제스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에서의 폭탄 투척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하였고, 이것은 장제스가 조선에 관심을 갖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편집] 사형 순간
-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
1932년 12월 19일 새벽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 시 형무소. 요란한 총성이 음침한 겨울안개를 뚫고 작업장에 울려퍼졌다. 형틀에 묶인 사형수는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뒤에 숨졌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편집] 함께 보기
[편집] 참조
- ↑ 이 때 윤봉길 의사가 김구선생에게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직전에 “선생님의 시계보다 제 시계가 더 비싼 것인데, 저는 이제 몇 시간만 시간을 더 보면 되니 시계를 바꾸어 찹시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김구의 저서 《백범일지》에 실려 있다.
- ↑ 한겨레신문 2007년 4월 27일자 기사에 의하면, 윤봉길 의사는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을 이틀 앞둔 1932년 4월 27일 "나의 철권(鐵拳)으로 적(敵)을 즉각으로 부수려 한다"는 내용의 출사표를 수첩에 남겼다.[1]
- ↑ 윤의사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달리, 물통 폭탄이 저격용, 도시락 폭탄이 자결용이었다고 한다. [2]
- ↑ 윤봉길은 스프링코트를 ~: 이이화, 《한국사이야기21. 해방 그날이 오면》,한길사, 2004년,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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