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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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李東輝, 1873년 ~ 1935년)는 한국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이다. 대자유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18살이 되던 해 군관 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졸업 후 강화진 위대참령으로 근무하였고, 군대해산후에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다.
미국 소학교에 입학해서 독립 선언서만세를 불렀으며, 링컨 중학교에서 공부 한 후 신민회를 조직 하였다. 37살이던 1909년에는 안중근 사건으로 붙잡혔다. 이듬해 1910년 흥사단을 조직하러 로스엔젤레스로 가서, 1913년 흥사단을 조직했다.
[편집] 상해임시정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했다[1].
이동휘는 공산혁명을 주장하여 대통령 이승만과 노선갈등을 빚었다. 소련으로 보내는 대표단을 파견함에 있어, 심복 한형권을 몰래 먼저 파견하여 독자노선을 걸었으며, 제3국제공산당 운동에 투신하였다.
이후 국민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사회주의계열의 통합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다.이동휘 자신이 중심이 되는 상해파와 여운형이 중심이 되는 이르쿠츠크파 그리고 김중연의 엠엘파는 통합에 실패하였다. 주로 이동휘와 여운형이 주도권 다툼을 하였는데, 여운형은 임시정부의 재조직을 주장하였고, 이동휘는 그냥 두고 개조하자고 주장하였다. 통합을 보지 못한채 김규식이 수반이 되어 임시정부와 별개의 한국정부를 구성하였는데, 소련으로 가서 인정을 요청했으나 실패했다.
레닌이 보낸 독립자금을 수령하는 과정에서, 그 자금을 사적으로 수령하려고 심복 김립을 보냈으나 그가 이를 횡령하자 책임을 지고 국무총리 직을 사임한 후에 시베리아에 가서 일생을 마쳤다.
[편집] 참고자료
-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 이동휘
[편집] 주석
- ↑ 반병률. "[실록 대한민국임시정부] 망명정부 수립서 환국까지(1919∼1945)", 《조선일보》, 2005년 1월 25일. 2007년 11월 30일에 읽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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