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루이 1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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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6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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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위 | |
1774년 ~ 1792년 | |
성 명 | {{{성명}}} |
별 명 | 마지막 루이 |
왕 비 | 마리 앙투아네트 |
황 후 | {{{황후}}} |
왕 후 | {{{왕후}}} |
부 군 | {{{부군}}} |
왕 가 | 부르봉 |
황 가 | {{{황가}}} |
부 왕 | {{{부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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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비 | {{{모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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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친 | {{{모친}}} |
앞선 왕 | 루이 15세 |
앞선 황제 | {{{이전 황제}}} |
앞선 천황 | {{{이전 천황}}} |
다음 왕 | 루이 17세 |
다음 황제 | {{{다음 황제}}} |
다음 천황 | {{{다음 천황}}} |
프랑스의 군주 |
루이 16세(프랑스어: Louis XVI, 1754년 8월 23일~1793년 1월 21일)는 1774년부터 1792년까지 프랑스 왕국을 통치한 부르봉 왕가 출신의 왕이다. 선량했던 그는 프랑스 사회를 개혁할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나약하여 의지와 추진력이 부족하였고 당시 귀족층의 사치스러운 생활 또한 심각하였다. 결국 프랑스 혁명으로 퇴위당한 후 참수형에 처해졌으며, 그로 인해 ‘마지막 루이(Louis le Dernier)’라는 별명이 붙었다. 본명은 루이 오귀스트이다.
목차 |
[편집] 역사
루이 16세는 1754년 8월 23일, 루이 15세의 손자이자 왕태자인 루이 페르디낭과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의 딸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1세의 외손녀인 작센의 마리 조제프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베리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1760년 9월 8일 보귀용 공작이 가정교사로 낙점되었다. 1761년 부활절 형 부르고뉴 공작 루이 조제프가 결핵으로 사망하고, 1765년에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할아버지의 뒤를 이을 왕태자에 봉해졌다.
오랜 세월 동안 서로 적대시해 온 부르봉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 사이에 화해를 조성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 앙투아네트와 부르고뉴 공작 루이 조제프 간에 정략 결혼이 획책되고 있었지만, 1761년 루이 조제프의 사망으로 인해, 1763년 5월 오스트리아로부터 사절이 파견되어 루이 오귀스트와 대신 결혼하게 해달라고 하였다. 결혼을 반대했던 루이의 아버지가 1765년에 사망한 후 1769년 6월, 루이 15세로부터 허락을 받아내어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약혼 문서를 보내게 하였다. 1770년 5월 16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왕태자 루이 오거스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1774년 5월 10일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서거하자 1775년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왕위에 올랐다. 그 때 그의 20세였다.
1777년 4월, 루이 16세는 선천적 성 불능(포경) 치료를 받았다.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사이에서 1778년 장녀 마리 테레즈와 1781년 장남 루이 조제프(요절), 1785년 차남 루이 샤를(훗날의 루이 17세), 1786년 차녀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요절)를 낳았다.
궁전의 경비 등으로 인하여 초래된 재정 악화는 루이 14세의 치세 말기부터 시작되어 루이 15세 치세하에서도 호전되지 못했고 루이 16세가 즉위할 즈음에는 다른 나라로부터 빚을 지는 처지가 되었다. 특히 영국의 세력 확대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 독립 전쟁에 관여하여, 미국을 지원하였기 때문에 프랑스의 경제는 한층 더 악화되고 말았다. 때문에 루이 16세는 즉위 직후부터 만성적인 재정난에 계속 골치를 썩어야만 했다. 여기에 프랑스의 고질적인 사회적 모순이 사태 해결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구 체제하에서는 실력이 아닌 문벌이 사회적 성취와 출세를 좌우하여 시대적 흐름을 제대로 따를 수가 없었다. 또한 당시 프랑스는 통일된 기준 없이 각 지역별로 서로 관습, 법 등이 달랐다. 북부와 중부지방의 세금이 가장 무거웠으며 파리의 경우가 특히 심했다. 농부들은 추수한 곡식의 10~15%를 세금으로,8%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를 부양하는 돈으로 내야했으며,강제 노역에 종사해야 했다.뿐만 아니라 프랑스 국민들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폐지될때까지 소득의 십분의 일 즉, 소득의 10%를 교회에 헌금하는 헌금하는 십일조를 해야 했다.[1]
루이 16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조세개혁을 통해서 난관을 타개하려고 했지만, 수구적인 귀족들은 이러한 개혁조치에 크게 반발하였다. 이에 루이 16세는 부르봉 왕조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좀더 과감하게 밀어붙여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시간만 질질 끌다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말았다. 1787년 거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145명의 귀족과 성직자들이 모인 명사회를 소집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대책 모임을 가졌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결국 남은 방법은 1614년 이래 열리지 않았던 삼부회를 여는 것이었는데, 바로 이것이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왕족이나 귀족은 삼부회를 소집해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었고, 그러한 속셈을 알아차린 부르주아 계급은 그것을 계기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자 했으니 그 결과는 뻔했다. 우여곡절 끝에 1789년 6월 제3신분의 대표들은 제1신분 및 제2신분에 속한 일부 대표들과 합세, 테니스 코트에 모여 프랑스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선서했다. 이 선서는 훗날 ‘테니스 코트 선서’라 불리게 된다. 그러나 루이 16세가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국민의회의 활동을 방해하자, 팔레 루아얄에 모여 있던 군중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7월 14일 오후 구체제를 상징하는 바스티유 감옥[2]을 습격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였다. 무정부 상태가 된 파리 시내에서 시민들은 혁명을 상징하는 삼색기를 들고 민병대를 조직하였다. 또한 서로 알아보기 위해서 밤나무 잎을 모자에 걸었다.
루이 16세는 권좌에서 물러났다. 루이 16세는 가족들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려 했으나, 국경 근처에서 발각되어 군인들에 의해 파리로 이송되어 탕플 감옥에 감금되었다. 그 곳에서 루이 16세 일가는 엄중한 감시 아래 놓이게 되었다.
한편 유럽의 다른 군주들은 심각한 우려의 시선으로 이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혁명적인 사상이 확산되어 자기들 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유럽의 군주들은 루이 16세와의 연대를 선언하고 그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1792년부터 그들은 동맹을 맺고 프랑스 혁명 세력과의 전쟁을 시작했으며, 프랑스 왕가에 무슨 변이 일어날 경우 파리를 파괴하겠다고 위협했다. 굴욕적인 패배를 당할 위험에 직면한 프랑스는 식량 부족에다가 엄청난 물가 상승까지 겹쳐 다시 소요 상태에 빠져들었다. 1792년 9월 21일, 국민공회라고 불리는 새로운 의회가 구성되어 그 첫번째 회의에서 공화제가 선포되었다. 루이 16세는 혁명 정부로부터 국가반역죄로 기소되어 1793년 1월 21일에 투표를 거쳐 1표 차이로 사형을 언도받아, 콩코드르 광장에서 샤를 앙리 상송에 의해 단두대에 의한 공개 참수형을 당했다.
세간에서는 “나는 망했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발버둥치자 사형집행관이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며 협박해 단두대로 끌고 올라갔다는 것이 루이 16세의 마지막 모습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당시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교적 수련으로 단련된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왕으로서의 당당함을 잃지 않은 채 꿋꿋하고 냉정하게 모든 절차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루이 16세는 단두대 계단 앞에서 코트를 벗기를 거부했다. 함부로 윗옷을 벗는 것은 예의범절에 벗어난다는 이유였다. 사형집행관이 절차이므로 어쩔 수 없다고 설명하자, 그는 스스로 코트를 벗었다. 수갑도 차기를 거부했지만 결국 받아들였다.
단두대의 칼날이 목에 떨어지기 직전에 루이 16세는 몰려든 군중을 향해 “프랑스인들이여, 나는 무고하게 죽는다”라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는 이어 사형집행인들을 향해 몸을 돌린 뒤 “나는 기소된 모든 죄목으로부터 결백하다. 내 피가 프랑스 국민의 행복을 강화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편집] 가족 관계
-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 도팽 루이 조제프 그자비에
- 노르망디 공작 루이 샤를
- 소피 엘렌 베아트릭스
[편집] 주석
- ↑ 《이야기교회사》-십일조는 반드시 해야 하는 걸까?:십일조와 교회세,독일교회의 경우/이성덕 지음/살림 p.247
- ↑ 바스티유 감옥은 흔히 양심수를 수감한 감옥으로 알려져 있으나, 혁명당시 감옥에는 잡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고 한다. 구체제를 상징하는 의미만 있는 것이다. 《교실밖의 세계사》/김성환 지음/사계절
[편집]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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