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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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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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 1398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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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친 | 환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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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친 | 의혜왕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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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왕 | 정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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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초대 국왕 |
태조(太祖, 1335년 음력 10월 11일~1408년 음력 5월 24일, 재위 1392년~1398년)는 조선의 초대 왕이다. 성(姓)은 이(李), 휘는 단(旦)(초명 성계(成桂)),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 정식 칭호는 태조강헌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 1897년 대한제국 때에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로 추존되었다.
환조와 의혜왕후 최씨(崔氏)의 아들이다.
목차 |
[편집] 생애
[편집] 즉위 이전
1335년 함경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어느 날 이자춘이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하늘에서 오색 구름을 타고 선녀가 내려왔다. 그 선녀는 이자춘에게 절을 하고 “천계에서 그대에게 내리는 것이니, 장차 이것을 동쪽 나라를 측량할 때 쓰십시오”라며 소매 속에서 침척(바느질에 사용하는 자)을 꺼내 바쳤다. 이자춘이 그 자를 받은 뒤에 부인 최씨는 임신을 하였고, 13개월 만에 아들을 낳았는데, 얼굴은 용과 같았고, 눈은 봉황처럼 부리부리했다고 한다. 그 아기가 바로 이성계이다.
고려의 무신(武臣) 가문 출신인 이성계는 어릴 때부터 영웅의 기질을 타고나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용맹하기가 그지없어서 전쟁터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특히 활을 잘 쏘아서 ‘신궁(神弓)’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천하의 명궁으로 알려졌다.
훗날 그의 눈부신 활약상에 관해서는 여러 영웅담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이성계는 30여 년 동안 전장에 나아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1356년 유인우가 공민왕의 명을 받들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아버지와 함께 공을 세웠고, 1361년에 상만호(上萬戶)가 되어 고려의 함경도 지방의 경비를 맡았다.
1361년 10월에 고려 정부의 명령을 받고 출동하여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같은 해 10월에 다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홍건적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영내에 침입하여 삽시간에 수도가 함락당하자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강력한 친병 조직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그는 선봉에 서서 말을 탄 채 장수만 골라 쏘는 맹공을 펼쳐 마침내 홍건적의 괴수 사유(沙劉)와 관선생(關先生)까지 참살하고 수도에 제일 먼저 탈환해 입성하는 큰 전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냈다.
1362년 심양행성승상(審陽行省丞相)을 자처한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가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함경도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고려 정부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아 적을 막게 하였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 평야에서 원나라 군대를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적장인 나하추마저 이성계의 뛰어난 용맹과 탁월한 군사적 재능에 감탄하며 깊이 존경할 정도였다.
고려 말기에는 왜구의 약탈 또한 빈번하여, 고려를 괴롭혔다. 이처럼 왜구의 폐해가 극심해지자 고려 정부에서는 군대를 파견하여 제압하려고 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마침 1380년 이키 섬 출신 아키바츠(阿只拔都)라고 하는 소년이 왜구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여 지리산 일대를 약탈하며 북진을 하자 이성계는 삼도도원수(三道都元帥)로 임명되어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전라도 운봉에 도착한 이성계는 운봉을 넘다가 길 오른쪽의 험한 길을 보고 “적이 반드시 이 길로 우리를 갑자기 습격하려 올 것이니, 우리도 이 길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말하고는 험한 곳에 들어갔는데, 과연 이성계의 예측대로 왜구가 습격해 왔다. 이에 이성계는 화살 70여 발을 쏘아 모두 얼굴을 맞히니, 왜구들이 활시위 소리를 따라 모두 쓰러졌다. 마침내 이성계의 군대가 황산에 진을 치고 왜구와 대치하게 되었다.
아키바츠는 고려군이 토벌에 나선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힘만을 믿고 교만을 부리다가 이성계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에 왜구의 기세는 크게 꺾여져서 물러났다. 당시 이성계는 아키바츠의 투구를 활로 쏘아 맞히어 벗긴 뒤 벗겨진 이마를 향해 다시 활을 쏘아 죽였다고 한다. 이에 왜구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고려군의 공격은 더욱 맹렬해져서 왜구의 정예부대가 모두 죽었다. 기록에 의하면 “죽임을 당하는 왜구의 곡성이 마치 만 마리의 소의 울음소리 같았고, 냇물이 모두 그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고 한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고 한다. 이때 이색과 김구용이 시를 지어 승리를 하례하였다.
이렇듯 고려 말기의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상황은 이성계를 변방의 무명 장수에서 일약 고려 제일의 장수이자 영웅으로 만들었다. 계속되는 승전은 이성계의 무장으로서의 진가를 확실하게 보여주어 고려 내에서 입지를 굳히게 만들었다. 백성들의 신망을 받게 되었고, 그에 따라 벼슬도 올라갔다. 군사력을 갖춘 신망받는 이성계에게는 자연히 신진 사대부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중국이 원나라와 명나라 교체기에 있어 고려에 친원파와 친명파 사이의 대립이 확대되었을 때 위화도회군을 단행하였다. 이성계가 위화도에 있을 때 장맛비가 계속 내렸으나 강물이 불어나지 않았는데 막상 회군하여 군사들이 강을 건너자 갑자기 강물이 밀려와 위화도가 물 속에 잠겨버렸다고 한다. 회군한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하여 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이 때 어린 아이들이 “나무의 아들(木子)이 나라를 차지하리라”라는 동요를 부르자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따라 불렀다고 한다.
이성계가 단행한 위화도 회군 이후, 우왕 때에 정치 일선에서 배제되었던 신진 사대부들도 속속 정계에 복귀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신진 사대부들 사이에는 사원 경제의 폐단과 토지 소유 등 사회의 모순에 대한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하였다. 이색, 정몽주 등 온건 개혁파는 고려 왕실을 보존하여 그 틀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반면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는 고려 왕조를 부정하는 역성 혁명을 주장하였다.
급진 개혁파는 이성계와 연결하여 혁명파를 이루었다. 이들 혁명파는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세우면서 정치적 실권마저 차지했다. 1392년 혁명파는 역성 혁명을 반대하던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 개혁파를 제거하였다. 뒤이어 정몽주가 숨을 거둔 지 4개월도 되지 않아 이성계는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는 형식으로 임금이 되었다. 즉위한 다음날 개경 거리와 궁궐에 단비가 내렸다. 오랜 가뭄 끝에 모처럼 비가 내리자 사람들은 신이 새 임금을 축복하여 내리는 비라고 떠들며 기뻐하였다.
[편집] 재위 기간
1392년 개경(개성)에서 조선을 건국하고 1394년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새 수도의 도시 계획을 구상하였다. 이어서 10월에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1]
또한 태조는 조선의 3대 기본 정책을 내세웠는데, 유교를 건국 이념으로 삼고 나라를 다스리는 숭유정책(崇儒政策)과 농업을 근본으로 하는 농본정책(農本政策), 그리고 이웃 나라와 가까이 하여 국가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사대교린정책(事大交隣政策)이 그것이다.
[편집] 말년
<퇴위 시절> 태조에게는 신의 왕후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와 계비인 신덕 왕후 강씨 소생의 두 왕자가 있었는데,그 가운에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을 몹시 사랑하여 세자로 책봉했다. 한 편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한씨 소생의 다섯 째 아들인 방원의 불만이 쌓였다. 방원은 정도전 일파가 방석을 끼고 자신들을 해치려 한다는 이유를 들어 정도전 일파와 강씨 소생 왕자들을 살해했다. 태조는 이 사건에 몹시 상심하여 왕위를 둘째 아들(정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은퇴했다. 그러나 정종마저 곧 물러나고 방원(태종)이 왕이 되자, 태종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했다. 함흥에 있을 때 태종이 보낸 문안사를 모조리 죽여 이른 바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 만년에 불교에 전념 하다가 창덕궁에서 죽었다. 자는 중결 뒤에 군진 으로 고쳤으며,호는 송헌, 본관은 전주이다. 시호는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 이며,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이다.
[편집] 함흥차사
- 이 부분의 본문은 함흥차사입니다.
태종은 자주 차사(差使)를 함흥으로 보내어 아버지와 아들 간의 불화를 풀고 태조를 환궁시켜 옥새를 얻고자 하였으나, 태조는 차사로 오는 이들을 보는 족족 활을 쏘아 맞추어 죽였고, 그로 말미암아 보낸 사람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의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야담 수필집 《노봉집시장》(老峰集諡狀), 선조 때 차천로(車天輅)가 지은 《오산설림》(五山說林) 등의 책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나 야사일 뿐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니다.
이 함흥차사 고사는 태조와 태종이 왕자의 난 이후로 서로 화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빗대어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편집] 가족 관계
- 신의왕후 안변 한씨(神懿王后 安邊 韓氏) (1337-1391)
- 진안대군 방우(鎭安大君 芳雨, 1354-1393)
- 영안대군 방과(永安大君 芳果, 1357-1419)[조선 2대 국왕 정종대왕(定宗大王)]
- 익안대군 방의(益安大君 芳毅, 1360-1404)
- 회안대군 방간(懷安大君 芳幹, 1364-1421)
- 정안대군 방원(靖安大君 芳遠, 1367-1422)[조선 3대 국왕 태종대왕(太宗大王)]
- 덕안대군 방연(德安大君 芳衍, ?-?)
- 경신공주(慶愼公主), 하가 정사좌명공신 상당부원군 이애(定社佐命功臣 上黨府院君 李薆)
- 경선공주(慶善公主), 하가 청원군 심종(靑原君 沈淙)
- 신덕왕후 곡산 강씨(神德王后 谷山 康氏): 신덕왕후의 무덤은 "정릉(貞陵)"이며 이 "貞"을 따서 이 부근을 정동(貞洞)이라 불렀다.(서울 중구 참조)
- 무안대군 방번(撫安大君 芳蕃, 1381-1398)
- 의안대군 방석(宜安大君 芳碩, 1382-1398)
- 경순공주(慶順公主), 하가 개국공신 흥안군 이제(開國功臣 興安君 李濟)
- 후궁(後宮)
- 의녕옹주(宜寧翁主), 하가 계천위 이등(啓川尉 李䔲)
- 숙신옹주(淑愼翁主), 하가 당성위 홍해(唐城尉 洪海)
[편집] 태조을 연기한 배우들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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