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페르메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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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또는 얀 페르메이르(네덜란드어: Johannes Vermeer 또는 Jan Vermeer, 1632년 8월 31일 - 1675년 12월 15일)는 네덜란드의 화가이다. 델프트에서 살면서 작품활동을 했기 때문에, ‘델프트의 페르메이르(Vermeer van Delft, 페르메이르 판 델프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사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와 동명영화의 소재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편집] 생애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1653년 델프트의 화가조합인 신트 뤼카스(성 루가) 길드에 등록되었고 같은 해에 카타리나 볼너스와 결혼하였다. 결혼하기전 페르메이르는 개신교 신도였으나, 결혼하면서 가톨릭으로 교회를 옮겼다. 이는 볼너스의 집안이 가톨릭 집안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두 부부는 무려 11명의 아이를 낳았다. 1662년 ∼ 1663년과 1669년 ∼ 1670년, 두 번에 걸쳐 길드 간부를 지냈다. 이 날짜들만이 그의 생애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이야기다. 나머지는 갖가지 의문, 불확실, 그리고 추측들로 뒤덮여 있다. 평가도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다가 19세기 중반에야 겨우 진가를 인정받았다. 이름조차도 2가지 다른 설이 있다.
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직업을 계승하였다. 화가카렐 파브리티위스의 영향을 받았는데, 두 사람 사이에 사제관계가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편집] 작품세계
그의 작품 중 현존하는 것은 40정 정도이다. 남은 작품만을 기준으로 놓고 봤을때 1년에 고작 두어 점 정도 그림을 그렸다는 계산이 나온다(물론 전해지지 않은 작품들이 더 있을 수는 있다). 이것은 페르메이르가 예술 시장을 위해서 작업했다기보다는 예술 후원자들을 위해 작업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게 했다. 특히 11명의 아이를 가진 대가족의 가장이 1년에 그림 2점을 그려서는 부양의 의무를 지킬 수 없으므로, 그는 그림 이외의 다른 빵벌이 수단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1653년 결혼 후에 그가 화가 조합이던 신트 뤼카스 길드에 등록한 이유도 이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에는 화가를 포함한 예술가·상인·수공인 등은 길드에 등록해야만 영업을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화가뿐만이 아니라 화상(畵商)으로서 그리고 예술 전문가로서의 이름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름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살기 위해, 생활의 연명을 위해 그랬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일생에는 시련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현존 작품 40점은 거의 대부분 소품들로서 한 두 사람의 가정생활을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그 밖에 루가의 복음서에 나오는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 이야기를 소재로 그림처럼 성서속의 이야기들을 주제로 한 것도 있고, 불과 2점이지만 풍경화도 있다. 풍경화 중에 《델프트 풍경》(헤이그 국립미술관 소장)은 명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옛날 카탈로그에서 언급된 몇몇 작품들은 영원히 소실되어 버린 것 같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메이헤런 사건의 여파로 페르메이르의 새로운 작품이 발견되도 전문가들은 별로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색조(色調)가 아주 뛰어났으며 적 ·청 ·황 등의 정묘한 대비로 그린 실내정경은 마치 개인 날 북구의 새벽 대기(大氣)를 생각나게 한다. 맑고, 부드러운 빛과 색깔의 조화로 조용한 정취와 정밀감(靜密感)이 넘친다. 초기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뚜렷한 대비는 만년이 될수록 완화되었다. 그 밖에 《편지를 읽는 여성》(드레스덴 미술관 소장) 《우유를 짜는 하녀》(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소장)·《터번을 쓴 소녀》(헤이그 국립미술관 소장)·《레이스를 뜨는 소녀》(루브르 미술관 소장)·《화가의 아틀리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