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저위붕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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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저위붕 작전(Unternehmen Weserübung) 또는 베저 작전은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스칸디나비아의 중립국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한 작전의 독일어 암호명이다. 독일어로 "베저 강 훈련"을 뜻한다.
1940년 4월 9일 새벽, 독일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하였다. 그 구실은 프랑스와 영국이 이들 국가를 점령하려 계획(이는 실제로 공공연하게 논의되고 있었다)하는데 대한 자기방어였다. 이들이 도착하자마자 두 나라 주재 독일 대사들이 양국 정부에 독일군이 영국과 프랑스의 침략 야욕으로부터 양국의 중립을 보호하기위해 왔다고 통보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지리, 위치, 기후가 크게 차이가 나기 때문에 양국의 침공도 다르게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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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독일의 덴마크 침공
덴마크는 독일의 입장에서 볼 때 전략적으로 그리 중요한 곳은 아니었다. 노르웨이에 대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징검다리였으며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얼마만큼 관리가 필요했다는 것 뿐이었다. 덴마크는 작고 평지로 이루어져 독일군의 작전 수행에는 딱 알맞은 곳이었다. 그럼에도 새벽 초 덴마크군 몇몇 연대가 독일군에 대해 저항을 하여 열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덴마크 정부는 순식간에 내정에 간섭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항복하였다. 사실 독일 대사가 덴마크 정부를 찾아와 독일군의 진주를 허락하라고 요구하기도 전에 이미 독일군은 국경을 넘은 상태였다. 하지만, 덴마크가 별다른 저항없이 순순히 항복한 관계로, 1943년 여름까지는 독일 점령은 매우 관대했다. 그리하여 덴마크의 유대인들에 대한 체포와 추방도 지연이 되어 그들은 거의 모두 스웨덴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덴마크에서 추방된 유대인의 수는 500명을 넘지 않고 50명 미만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당시 덴마크 국왕은 매일 수도 코펜하겐을 국왕의 정복을 입고 산책하면서 침묵으로 항의했다고 한다.
[편집]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
노르웨이 침공의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 1940년 4월 9일 오슬로 피오르(Oslo Fjord)에서 독일의 순양 전함 '블뤼허(Blücher)' 격침(구식 어뢰와 독일제 크루프포 사용).
- 독일군, 오슬로와 크리스티안산(Kristiansand), 스타방에르(Stavanger)의 비행장 점거, 공중수송된 부대 대량 투입.
- 비드쿤 크비슬링,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라디오 생방송 쿠데타 선언.
- 왕, 정부는 독일 침공군을 피함; 왕, 항복 거부; 미트스코겐(Midtskogen) 전투; 뉘베르그순(Nybergsund) 폭격; 후에 왕실과 정부(국고의 금(金)도 챙겨) 영국과 미국으로 대피, 국외에서 계속 노르웨이 대표 자처.
- 24시간 내에 베르겐, 스타방에르, 에게르순(Egersund), 크리스티안산, 아렌달(Arendal), 호르텐(Horten), 트론헤임(Trondheim), 나르비크(Narvik) 등의 도시 및 마을 침공, 점령.
- 두차례에 거친 나르비크 해전(영국 해군 대 독일 해군)
- 온달스네스(Åndalsnes), 몰데(Molde), 크리스티안순(Kristiansund), 스테인셰르(Steinkjer), 남소스(Namsos), 보되(Bodø) 공습 폭격으로 대규모 피해.
- 독일군 주력부대, 성능 좋은 장비에 힘입어 오슬로로부터 북으로 계속 진격; 구식 장비로 무장한 노르웨이군, 일부 영국군, 프랑스군 등이 침략군을 잠시 저지하지만 결국 그들을 막는데 실패(이때 2차대전 최초로 영국군과 독일군이 육지에서 맞섬).
- 나르비크의 육지 전투: 노르웨이와 연합군(영국, 프랑스, 폴란드) 일시적인 성공, 그러나 후에 연합군 불가피하게 철수(밑을 보세요); 그라탕엔(Gratangen) 전투.
- "배수진": 헤그라 요새(잉스타클레이벤 요새; Fort Ingstadkleiven)가 6월 5일까지 침략군에 대한 저항 계속; 연합국에게는 나르비크처럼 중요한 선전.
- 호콘 왕, 올라브 왕태자, 의회 의원들이 북쪽 항구도시 트롬쇠(Tromsø)를 통해 6월 7일 노르웨이 탈출(왕은 5년뒤 같은 날 오슬로에 돌아옴); 왕태자비와 자녀들은 후에 핀란드 펫사모(Petsamo)를 통해 미국으로 도피.
- 1940년 6월 10일, 노르웨이 침공 시작 2개월만에 항복.
북단에서는 영국군과 독일군이 노르웨이의 동계 항구 나르비크을 놓고 전투를 벌였다. 나르빅은 스웨덴의 철광석 운송에 필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독일군은 5월 28일 나르빅에서 철수했으나 영국군도 유럽 대륙에서 상황이 악화되자 '알파벳 작전'을 통해 철수했다. 독일군은 6월 9일 나르비크을 재점령했는데 이때는 이미 민간인들도 그곳을 다 떠난 뒤였다.
[편집] 스웨덴과 핀란드가 포위되다
베저 작전에는 역시 중립국이었던 스웨덴에 대한 공격이 포함되지 않았다.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해협, 발트 해 연안의 대부분을 차지함으로써 나치 독일은 스웨덴을 북과 서와 남으로부터 에워쌌으며 그 동쪽으로는 스웨덴과 핀란드의 전통적인 적 러시아를 계승한 소련이 있었다. 독일과 소련은 이때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었다.
그리하여 독일 해군은 스웨덴과 핀란드의 무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따라서 독일은 중립국 스웨덴에게 군사 물품과 휴가중인 군인들의 통과를 허용하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었다. 6월 18일 양국은 독일 군인들이 무장 해제를 하고 부대 기동의 일부가 되지 않는 조건하에 이를 허용하는데 합의했다. 1943년 8월 20일 공식적으로 통과가 중단되기까지 총 214만명의 독일군과 독일 군사 장비를 실은 화물열차 10만대 이상이 스웨덴을 통과했다.
1941년 8월, 핀란드는 독일군에게 영토 출입을 허용했다.
[편집] 관련 항목
- 영국의 노르웨이 공격
- 노르웨이의 저항운동
- 비드쿤 크비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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