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무령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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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 (武寧王, 462년 - 523년, 재위: 501년 - 523년)은 백제의 제25대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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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이름은 사마(斯麻) 또는 융(隆)이며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키가 크고 외모가 수려했으며, 성격이 인자하고 관대하였다고 한다. 그는 501년에 동성왕이 위사좌평인 백가의 계략으로 시해되자 동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편집] 치세
502년 백가가 가림성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무령왕은 이를 진압한 뒤 백강에서 백가를 죽여 부왕의 원수를 갚았다. 이후 무령왕은 신라와 연대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려는 고구려의 침입을 적절히 막고, 말갈족의 침입에 대비하면서 백제의 발전을 이루었다. 503년 고목성에 쳐들어온 말갈족을 물리쳤고.[1],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을 습격하였다.[2] 506년 말갈족이 다시 고목성에 쳐들어오자, 이듬해 장령성을 쌓아 이에 대비하였다. 512년에 고구려가 가불성과 원산성을 점거하고 약탈을 일삼자 무령왕은 몸소 3천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나아가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무령왕은 백제의 문화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무령왕은 중국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앞선 중국의 선진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다. 한편, 게이타이 천황에게 동경(銅鏡)[3]을 헌상하고,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를 일본에 보내어 백제의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무령왕은 백성들의 생활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해 곡식을 나누어 주고, 떠돌아다니는 백성들에게는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이때 백제는 풍작을 이루었는데 우수한 철제 농기구를 많이 만들어 썼을 뿐만 아니라, 수확이 많은 중국의 벼 농사법을 도입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무령왕은 다른 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여 성을 쌓는 등 국방을 튼튼히 하여 백제를 안정시키고 백제의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다.
무령왕릉에 묻혔으며 1971년 7월 공주시의 송산리에서 이 능이 발견되었다. 무령왕릉에서는 모두 108 종류의 2,906점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유물 가운데 입구에서 발견된 왕과 왕후의 지석을 통해 이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과 그의 아내임을 알게 되었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무덤들 가운데 최초로 주인과 매장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있는 무덤이다. 또 이 무덤에서 나온 수많은 부장품은 오늘날 백제의 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편집] 읽어 보기
[편집] 주석
- ↑ 三年 秋九月 靺鞨燒馬首柵 進攻高木城, 《삼국사기》권제26 (백제본기 제4)
- ↑ 冬十一月 遣達率優永 帥兵五千 襲高句麗水谷城,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 ↑ 현재, 일본 국보 고고(考古) 2호로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
[편집]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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