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자 샤 팔라비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레자 샤 팔라비(페르시아어: رضا پهلوی, 1877년 3월 16일 ~ 1944년 7월 26일, 재위 1925 - 1941)는 이란 팔라비 왕조의 초대(初代) 샤(황제)이다.
목차 |
[편집] 군인이 되기까지
그는 1877년 어느 날, 팔레반 가(家)의 출신으로써, 그의 아버지인 압바스 알리 칸은 육군 대령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어서 어머니가 그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의 가족들은 수도인 테헤란으로 이사를 갔고, 그의 어머니는 그를 교육을 시키는 일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훗날, 육군에 입대하여 러시아인 교관으로부터 많은 훈련을 받았다. 그는 사병 때부터 총명하고 재주도 좋아서 지휘관들도 부러워하였다. 그 덕분에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장교가 되었다고 한다. 리더쉽(Leadership)도 대단했다.
[편집] 당시 페르시아 왕국의 상황
당시 페르시아는 나세르 웃딘이 고생고생해가면서 쌓아놓은 경제력을 그의 아들인 무자파르 웃딘이 망쳐 놓아서 영국과 러시아가 서로 이권을 차지하는 꼴이 되었다. 이 시기에 이란은 입헌 군주국이 되었으나, 1909년까지 정치가 상당히 불안하여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가난하고, 빈민굴에서 생활하는 빈민들은 굶어죽는 자가 생겨날 지경이었다.
페르시아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어려운 경제력 때문(제정 러시아보다도 가난했다)에 전쟁에 참전할 생각이 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경제력이 어려운데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주도의 동맹군에 참가하는 반면, 페르시아는 중립을 지켰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 중인 1917년 어느 날, 전쟁의 폐해가 극도로 커지고 페르시아 국내의 일부 국경 지대는 영국, 러시아, 독일, 오스만 제국 등이 서로 다투는 탓인지 (한마디로) 짓밟히게 되었다. 게다가 흉작이 일어났으며, 그에 따른 기근 때문에 굶어죽는 자가 늘어났다. 게다가 1909년에 즉위한 아흐마드는 무능하고 놀기만 좋아해서 병들기 일쑤였다. 결국, 1919년에 영국과의 보호령 조약을 맺는 꼴이 되었다.
[편집] 쿠데타 완료
아흐마드 샤와 내각총리대신들은 나약하고 부패했다. 그래서 애국적인 민족주의자들의 불만은 폭발직전이었다. 특히 영국과 러시아는 상업적·전략적으로 이 나라에 강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레자 칸은 혼란상태를 종식시키고 효과적이며 잘 훈련된 군사를 기반으로 권력을 이양받아 진보적인 정부를 세우려고 했다.
그는 몇몇 젊고 진보적인 요인들과 접촉해 1921년 2월 21일에 1,2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테헤란을 점령했다. 나이 젊은 사이드 지아 옷딘 타바타바이가 총리가 되었고, 레자 칸은 전쟁성 장관이 되었다.
[편집] 전쟁성 장관과 내각총리대신
레자 칸은 이란 국가를 쇄신해 발전시키려는 꿈을 품고 있었다. 그는 이상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기회주의자들 같은 이기주의자들을 (레자 칸 자신이 사실상) 집권하자마자 강압적인 군대식으로 내쫓아버렸다. 그는 근엄한 인상에 말수가 적어 결코 그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정적에 대해서는 강력한 정치재능을 발휘해서 그들을 분열시키거나 약화시켰다. 그는 전쟁성(Minister of War)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국군의 통수권 또한 그가 행사하였다. 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줄곧 여러 총리들의 배후 실세로 존재하다가, 1923년에 자신이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했다.
[편집] 즉위 이후
아흐마드 샤는 병들어서 그런 지 유럽에서 오랫동안 치료받고 있었다. 또한, 아흐마드는 귀국을 거절했다. 그 시기를 틈타 레자 칸은 공화국(Republic)을 선포하려 하였으나 국민들은 레자 칸이 왕이 되기를 원했다. 1925년 의회는 부재중인 국왕을 폐위시켰으며 제헌의회는 레자 칸을 샤로 선출하고 새로운 팔라비 왕조에 통치권을 부여했다.
1926년 4월 즉위한 뒤, 레자 칸은 내각총리대신 재임 당시 착수했던 개혁들을 자신의 뜻대로 계속 추진했다. 그는 국내의 분쟁을 야기시켜왔던 부족들을 무장해제시키고 일부는 정착시켜 그 힘을 약화시켰다. 1928년 그는 열강들과의 불공평한 협정·조약들을 무효화하고 모든 특혜조치들을 폐지했다.
그는 이란 횡단철도를 건설하고 주요도시들을 연결하는 지선을 만들기 시작했다(1927~38). 또한 궁정 여성들에게 차도르를 벗도록 명령했다(1935). 그리고 그때까지 실질적으로 외국의 손에 들어 있던 국가의 재정과 통신을 장악했다. 그는 도로·학교·병원을 건설했고 최초로 대학교를 창설했다(1934). 그의 정책은 국가의 민주화와 외세의 간섭으로부터의 해방을 동시에 추구하는데 의의가 있다.
그의 대외정책은 주로 소련과 영국을 맞붙게 하여 어부지리를 얻는 것이었는데, 1941년 두 나라가 독일과 싸우기 위해 연합했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란을 통해 소련군에 군수물자를 수송할 목적으로 1941년 8월 두 연합국은 함께 이 나라를 점령했다.
그는 나치 독일에 접근하였으나 연합국에 의해 압력을 받아 1941년에 퇴위하였으며, 194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사망했다. 장남인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에 의해 왕위가 계승되었다.
[편집] 국호 변경
1930년대부터 민족주의자들과 반공(反共)주의자들은 아리아 민족과 이슬람교의 합성어인 Iran(이란)으로 부르자고 했다. 레자 샤는 1935년부터 '페르시아' 대신에 지금의 '이란'으로 국호를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