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라트 아데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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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트 아데나워(독일어: Konrad Adenauer, 1876년 1월 5일 ~ 1967년 4월 19일)는 독일연방공화국(구 서독)의 총리이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인 1949년 ~ 1963년까지 첫번째 총리였으며, 1950년부터 1966년까지 독일 기독교 민주연합(Christian Democratic Union)의 당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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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편집] 학창시절
독일의 독실한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1886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워 장교로 진급한 군인으로서, 아이들을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엄격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키우고자 노력하였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아버지의 권유로 고등학교 졸업반때인 1894년 4월 제리히만 은행에 취직하였으나 적응하지 못했다. 성격이 강한 아데나워에게 윗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은행일은 적성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본 부모는 의논끝에 공부를 더 시키기로 하여, 그해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 진학하였다. 대학교에서 아데나워는 법학을 3년간 공부하였다.
[편집] 공직생활
대학교 졸업후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카우젠 법률사무소에서 견습변호사로 근무하였으며, 1902년 테니스클럽에서 만난 엠마 바이에르와 결혼하였다. 당시 장모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답게, 사위가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는 평판을 듣고 결혼을 허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혼후 아데나워는 쾰른시 재판소에서 배석판사로 근무하였으며, 독일 자유당과 독일 가톨릭 중앙당의 지지로 쾰른시의 관리가 되어 공직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내 엠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불행을 겪으면서, '마치 지옥에 있는 것 같은'마음의 고통을 겪기도 하였다. 아데나워는 1917년쾰른 시장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41세였다.1년뒤인 1918년 독일 11월 혁명이 일어나 독일제국이 무너지는 엄청난 정치변동이 벌어지는데, 이때 아데나워는 공중구제위원회를 설치하여 전쟁으로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는 국민들에게 식량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일을 하였다. 43세가 되던해인 1919년 18세 연하의 굿시 퀸저와 재혼하는데,당시 굿시는 이미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 2명과 딸 하나를 둔 아데나워와의 재혼을 위하여 개신교에서 로마 가톨릭으로 교회를 옮기는 과감한 모습을 보인다. 하여간 쾰른시장당시 아데나워는 엄격한 공무원 관리, 대학교 건립, 녹지대의 국유화를 통한 공유지의 사유화 방지등을 실천했는데, 일부에서는 '사회주의자','독재자'등의 오명붙이기와 쾰른시에 우유를 팔지 않겠다는 축산업자들의 엄포등으로 녹지대 국유화에 반대했지만 아데나워는 압력에 굴하지 않는 강한 성격으로 이를 극복했다.
[편집] 나치의 탄압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자 아데나워는 쾰른시에 나치의 깃발이 꽂히지 못하게 하는데, 이에 대한 보복으로 나치는 국민들을 선동하여 아데나워를 공격하게 하는 여론선동으로 괴롭혔다. 결국 아데나워는 1933년 3월 14일 쾰른시장직에서 면직된후, 마리아 라하 수도원에서 은신생활을 해야 했으며, 그를 모시던 부하관리들도 나치의 여론선동으로 비난과 공격을 면치 못했다. 수도원에서의 은신생활기간동안 아데나워는 당시 교황 비오 11세가 저술한 《제40년에 즈음하여》와 《새로운 것에 대하여》의 영향으로 기독교 사상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배격할 수 있다는 일종의 및 반 사회주의와 반공주의이념을 갖게 된다. 성탄절에 아데나워가 가족을 만난게 알려지면서 수도원은 아데나워를 내보내라는 라인란트주 주지사와 갈등을 겪게 되는데, 다행히 반 나치주의자의 배려로 베를린 근교의 노이바벨스베르크에서 가족들과 살았다.
하지만 나치의 탄압을 받는 처지때문에 아데나워 가족은 경제적으로 궁핍함에 시달렸으며, 은행장의 무고로 뇌물을 수수했다는 누명을 쓰기도 하였다. 당시 아데나워는 재판정에서 '정말 나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자신을 무고한 은행장에게 강한 모습을 보여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했지만, 나치의 탄압은 그치지 않았다. 급기야 게슈타포에게 잡혀갔다가 풀려나는 일이 벌어져, 1936년 추방령이 간신히 해제될때까지 전국을 떠도는 나그네 생활을 해야 할정도로 나치치하의 아데나워의 삶은 고단하기 이를데 없었다. 1944년에는 바이마르 공화국당시 공직자들에 대한 탄압으로 강제수용소에 수감되는데 다행히 과거 공산주의운동경력이 있는 시청 직원 유겐 츤더의 배려로 가족들과 서신교환을 할 수 있었다.수용소 시절 아데나워는 유겐과 의사의 배려로 병원에 이송될 수 있었다. 또한 아데나워 부인의 청을 받아들인 공군소령 한스 시리부시-후에 그도 형무소에 수감된다.-에 의해 시골에 피신해서 살 수 있었다.하지만 신변이 불안정했기 때문에 거짓 행방불명신고를 낸뒤 아데나워 혼자서 나스터 뮐레에서 은신생활을 해야했다.그동안 아데나워의 세 아이들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게슈타포에게 연행되어 형무소에 수감되는등 불안정한 삶을 살았다.당시 독일군 중위로 근무하던 아들 막스도 아버지를 위해서 구명활동을 벌였다.
[편집] 시장복직과 해직
1944년 연합군의 공습이 있던날 아데나워는 형무소에서 풀려나왔으며 쾰른에 진주한 미군 사령관의 요청으로 비공식 협조자로 일한다는 조건으로 시장으로 복직되었다. 비공식 협조자로 일한다는 조건을 단 이유는 독일 육군에 근무하던 세 아들의 안위를 생각해서였다. 당시 아데나워는 식료품을 원활하게 공급되게 하는데 집중하였으며 다리건설로 전후복구에 필요한 식량과 건설자재의 유통을 원할하게 하고자 하였다.하지만 독일에 진주한 연합군이 기본적인 연료공급도 하지 않는 것을 AP통신사와의 인터뷰(1945년 10월 5일)때 비판하여 영국군 군정에 의해 해고되는 보복을 당한다.
[편집] 기독교 민주연합 창당참여
공직에서 해임되자 아데나워는 그해 개신교와 가톨릭의 연합정당인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 설립에 참여하는데,이는 기독교인은 가톨릭과 개신교가 연합하여 사회참여를 할 수 있다는 아데나워 자신의 신념과 기독교 정당들의 연합으로 독일 사회민주당과 독일 공산당을 견제하고자 한 보수주의적인 이념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의 정견을 알 수 있는 사료로는 1949년 스위스에서의 연설이 있다. 당시 아데나워는 마셜정책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독일의 공업정책을 제한하는 정책에 대해서는 "세계시장으로부터 독일을 견제하려는 정책"이라고 반발했으며, 독일인들이 스스로 국가를 재건할 수 있도록 독일인들에게 행정권이 돌아가야 한다면서 연합군 진영에 대해서 비판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유럽을 공산주의국가 소련으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여 반공주의적인 정견을 보였는데, 이러한 연설은 사회민주당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또한 연합군 진영의 반발을 사 영국 의회에서 독일내 영국군 점령당국에 대해 해명을 요청하였다.
[편집] 독일 연방수상 취임
1948년 8월 18일 사회민주당 쿨트 시마하 후보와 경쟁을 벌인 총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이 연합군 진영의 비호를 받는다고 비난하는 연설로 독일인들의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방법으로 국민들의 인기를 산 아데나워는 총리로 당선되었다. 당시 사회민주당은 6백 93만표, 기독교민주연합은 7백 36만표를 얻었고, 투표율은 78.8%였다. 수상이 된 아데나워 수상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반대했으며, 주택건설, 공업중심의 산업육성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편집] 출처
이 문서는 아동문학가인 故 이원수 선생의 콘라트 아데나워 전기를 출처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