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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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 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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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위 | |
1474년 ~ 1504년 | |
성 명 | {{{성명}}} |
별 명 | 가톨릭교도 이사벨 |
왕 비 | {{{왕비}}} |
황 후 | {{{황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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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군 | 페르난도 2세 |
왕 가 | {{{왕가}}} |
황 가 | {{{황가}}} |
부 왕 | 후안 2세 |
부 황 | {{{부황}}} |
부 친 | {{{부친}}} |
모 비 | 이사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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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친 | {{{모친}}} |
앞선 왕 | 엔리케 4세 |
앞선 황제 | {{{이전 황제}}} |
앞선 천황 | {{{이전 천황}}} |
다음 왕 | 후아나 |
다음 황제 | {{{다음 황제}}} |
다음 천황 | {{{다음 천황}}} |
카스티야의 여왕 |
이사벨 1세(스페인어: Isabel I de Castilla, 1451년 4월 22일 - 1504년 11월 26일)는 트라스타마라 왕가 출신의 카스티야 여왕(재위 : 1474년 - 1504년)이다. 남편 페르난도 2세와 더불어 가톨릭왕으로 불린다.
목차 |
[편집] 생애
이사벨 1세는 1451년 4월 22일 카스티야 왕국의 카스티야 마드리갈데라스아틀라스토레스에서 카스티야의 후안 2세와 그의 두 번때 아내인 포르투갈의 이사벨 사이에 장녀로 태어났다. 이사벨이라는 이름은 어머니에서 딸에게로 계승되어 온 이름이며, 이사벨 1세는 7대째였다. 이사벨이 3살이 되었을 무렵에 아버지가 타계하면서 이복오빠가 엔리케 4세로 즉위했다. 엔리케 4세에 의해 이사벨은 어머니와 남동생 알폰소와 함께 궁정에서 추방되어 아레발로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후, 엔리케 4세에게 딸 후아나가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누구인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어 왕위를 계승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일부 가신들은 현 국왕의 이복 남매인 이사벨과 알폰소를 다음 국왕 자리에 앉히려고 마음먹었다.
1464년, 알폰소의 즉위식이 거행되었으나 한 나라에 왕이 두 명이나 있는 상황이었기에 심각한 국론 분열이 일어났다. 이 상태는 1467년에 알폰소가 죽음으로써 종지부를 맞는다. 알폰소의 지지자들은 이사벨을 다음 국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지만, 이사벨은 “오라버니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왕의 자리에 오르지 않겠다.” 라는 식으로, 이복오빠의 친딸인지 불분명한 후아나보다는 자신이 왕위를 계승하기에 더 합당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보이는 식으로 거부를 했다. 그 덕분에 이사벨은 엔리케 4세의 눈에 들게 되어 1468년 9월 19일 토로스 데 귀산도 협정에 따라 왕위계승자로 인정받았다.
엔리케 4세는 이사벨을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 혼인시키고자 하였으나 정작 이사벨은 동맹상대로서는 포르투갈보다는 지중해의 영해권을 소유한 아라곤 왕국이 제격이라 판단하고 자신의 결혼상대자로서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를 선택했다. 더군다나 아라곤의 카스티야는 민족도 거의 같고, 왕조도 같은 트라스타마라 왕조였다. 마침내 두 사람은 몰래 만나 1469년 바야돌리드에 있는 후데비베로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474년에 엔리케 4세가 사망하자 이사벨이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여왕이 된 이사벨 1세는 우선은 후아나와 약혼한 후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 문제에 개입해 온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 치열한 싸움을 벌여 1479년 2월 24일에 승리한 후, 카스티야 영내의 반(反)이사벨 기치를 내세운 친(親)후아나 세력을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토벌해가기 시작했다. 같은 해 남편 페르난도가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라곤의 왕위를 계승하자 키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 즉 스페인(에스파냐) 왕국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스페인은 아직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군주끼리 결혼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이사벨과 페르난도 두 군주의 공동통치제 성향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아직도 제각기 두 군주의 통치를 받았다. 이는 훗날 이사벨이 죽은 후에 상속 문제가 일어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사벨은 자신은 왕비가 아니라 여왕이며, 페르난도보다 더 연상이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492년 1월,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 아직 남아있던 이슬람 국가인 그라나다 왕국을 제압, 마침내 800년에 걸친 레콩키스타를 마무리 지었다. 당시 무슬림과의 전쟁에 관심을 기울였던 이사벨은 전장을 누비는 남편을 위해 군자금과 물자 조달 등에 국력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그 위업 덕분에 1496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부터 칭송받은 두 사람은 가톨릭 부부왕(Los Reyes Católicos)이라는 칭호를 하사받게 된다. 이후 이사벨은 ‘가톨릭교도 이사벨’(Isabel la Católica)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또한 이사벨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진출을 돕기 위해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덕분에 스페인에 해외 식민지 개척시대가 도래하였으며,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치세를 스페인의 황금시대로 정의하는 사람들이 많다. 콜럼버스를 시작으로 수많은 모험가들에 의해 신대륙이 발견되어 그 곳으로부터 얻은 수많은 재물을 통해 스페인은 매우 부유해졌다. 경건한 가톨릭 신자였던 이사벨은 훗날 원주민들에 대한 잔혹한 처사에 매우 마음 아파했다고 알려져 있다.
1504년 11월 26일 메디나델캄포에서 사망하였다.
[편집] 가족관계
[편집] 같이보기
[편집] 바깥고리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 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
- El obispo judío que bloquea a la "santa". A report in Spanish about the beatification at El Mundo
- Isabella I in the Catholic Encyclopedia
- Medieval Sourcebook: Columbus' letter to King and Queen of Spain, 1494
- Music at Isabella's court
- University of Hull: Genealogy information on Isabella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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