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이 나가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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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이 나가마사 (浅井長政, 1545년 -1573년) 는 센고쿠 시대 오미 지방을 지배했던 아자이 가문 4대 당주이다. 그의 부인은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인 오이치이다. 특히 그의 딸들인 차차히메, 오에요는 각각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과 혼인을 하였고, 둘째인 하쓰히메와 함께 아자이 3자매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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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편집] 가문 상속 이전
덴분14년(1545년)에 아자이 히사마사의 적자로 오미 (현재의 시가 현)에서 태어났다.
당시 , 아자이 가문은 초대 당주 아자이 스케마사 때의 세력을 잃고 롯가쿠 가문의 신하가 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나가마사 자신도 생모 오노도노와 함께 롯카쿠 가문의 인질이 되었고 오미 북부의 지배권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가신중에는 히사마사의 소극적인 정책에 반발하는 사람도 많았고 선대에 활약한 무장도 세대 교대라고 하는 명목으로 천대를 당하고 있었다.
15세에 나가마사가 당주를 승계하자, 아자이 가문이 롯가쿠의 신하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 롯카쿠 요시카타(六角義賢)의 賢자를 따 온 「가타마사」(賢政)로 개명한다. 또, 롯카쿠의 가신인 히라이 사다타케의 딸과 강제로 혼인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가지는 가신들은, 지용이 뛰어난 나가마사에 기대를 하고 히사마사를 지쿠부 섬에 추방하여 실권을 빼았다. 거의 강탈에 가까운 형태로 가문을 상속을 받은 후 롯카쿠 가문과의 관계을 끊기 위해 아내를 돌려보내고, 이름도 나가마사로 고쳤다.
[편집] 오다 가문과 동맹
1560년 즈음(시기 불명) 오다 노부나가는 사이토 가문과의 교착 상태를 타파하기 위해 후와 미쓰하루를 사자로서 보내, 나가마사와 동맹을 제안했다. 아자이 가문에 유리한 조건의 동맹이었지만, 가신중에서는 찬반이 갈렸고 중신인 엔도 나오쓰네도 반대였다고 한다. 특히 대대로 동맹관계였던 아사쿠라 가문과 오다 노부나가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이 최대 문제였다.
「동맹이 있는 한, 오다는 아사쿠라 가문을 공격하지 않겠다. 만약 아사쿠라와 싸우게 될 때에는 반드시 이를 알리겠다.」라는 약속을 받아내고 노부나가의 여동생인 오이치를 아내로 맞아 혼인동맹이 체결하였다. 이 동맹에 의해서 오다 노부가나는 상경로를 확보해, 아사쿠라 영지에 머물렀던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맞이한다. 그리고 아자이 가문은 오다 가문이라는 유력 가문과 혼인을 해 다른 다이묘를 견제 하였다. (오이치와의 혼인을 의논하기 위해 방문한 오다 노부나가를 암살하자는 엔도 나오쓰네의 제의를 나가마사가 거절했다는 설도 있다.) 노부가나는 이 동맹에 매우 만족하여 혼례 비용을 신랑 측에서 준비하는 관례를 깨고, 오다 가문에서 비용을 전액 부담했다고 한다. (이 때 노부나가의 한 자를 따와서 나가마사로 개명했다고 하는 설이 있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에이로쿠 11년(1568년) 7월, 아사쿠라 가문에 머물고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자신을 위해 상경전을 치러지 않는 아사쿠라에게 실망하여 오다 노부나가에게 의탁하게 된다. 이로 인해, 노부나가는 9월에 교토로의 상경전을 시작하였고 아자이 가문은 숙적인 롯카쿠 가문을 히에이 산에서 승리하였다.
[편집] 동맹 파기
겐키 원년(1570년), 노부나가가 나가마사와 주고 받은 「아사쿠라 가문에 대한 부전 맹세」를 파기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에치젠의 아사쿠라 가문의 여러 성을 공격한다. 아사쿠라 가문과의 동맹 관계를 중시한 아자이 가문은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을 뒤에서 급습였고 노부나가는 궁지에 몰렸다. 어쩔수 없이 노부가나는 후위 부대인 이케다 가쓰마사등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오미를 탈출하게 된다.
오다 가문과의 동맹을 반대하고 있던 가신들이 아사쿠라 가문 공격시 아자이 가문에 의사를 묻지 않자 아자이 나가마사의 아버지 아자이 히사마사를 통해 오다군을 공격하도록 부추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중신인 아카오, 이소노, 가이호 가문 등은 공격에 반대했지만, 반 노부나가파 가신들의 행동을 막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동년 6월에는 나가마사는 아사쿠라군과 함께 아네가와에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과 싸워 거의 승리할 뻔 하였으나 같이 싸우던 아사쿠라군이 적군 별동대에게 허를 찔려 패배하게 된다. 아네가와 전투 이후 혼간지·다케다 신겐·우에스기 겐신 등의 여러 다이묘가 노부가나에게 반기를 들었다. 또 도도 다카토라는 아네가와 전투에서 무명 병졸로서 많은 무공을 세워 나가마사의 표창을 받기도 했다.
9월에는, 아사쿠라군과 엔랴쿠지의 승려와 제휴하여 다시금 노부가나와 전투를 재개하여 사카모토와 대립하던 모리 요시나리,오다 노부하루등을 죽인다. 하지만 아자이 가문에 협력하였던 엔랴쿠지의 승려들은 1571년) 9월에 노부나가에게 몰살되엇다.
[편집] 다케다 신겐의 움직임
겐키 3년(1572년) 7월, 노부나가의 5만 대군이 오미를 급습했다. 나가마사는 동맹국인 에츠젠의 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15,000명의 원군을 얻었지만 정면충돌을 하기에는 절대적으로 군세가 뒤지고 있어 괴로운 상황이었다. 같은 해 9월,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요청에 응하는 형태로 다케다 신겐이 2만 7,000명을 이끌고 본거지 가이를 출발하였다. 신겐은 이 시기에 나가마사 부자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 후, 신겐은 도토미에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를 격파하였고 도쿠가와 영지의 미카와로 진격하였다. 나가마사은 오미에 머물렀던 오다군을 미노로 돌아가지 못하게 붙잡는 역할을 맡게 된다. 오다군의 물량에 밀려있던 나가마사에 있어서 신겐과의 연합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는 중요 작전이었다.
그러나 동년 12월,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군이 군사들의 피로와 폭설을 이유로 에츠젠으로 돌아가게 되자 오미에 묶여 있던 오다군은 미노로 돌아가게 되었다. 아자이의 병력으로는 퇴각하는 오다군을 뒤쫒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케다 신겐은 요시카게의 독단에 격노하여 재출병을 재촉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요시카게는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다케다 신겐은 다음 해 2월까지 요시가케를 기다리다가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이에야스의 노다 성을 공략한다. 그러나, 다케다 신겐은 긴 전쟁의 피로, 추위, 요시가케에 대한 실망 등으로 인해 지병이 악화되어 끝내 병사하였다. 다케다 군이 퇴각함으로써 포위망은 완전하게 무너져버려 노부나가의 대군은 아사이-아사쿠라 연합을 치는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편집] 아자이가 멸망
덴쇼 원년(1573년) 7월, 노부나가는 3만의 군을 인솔해 다시 오미에 쳐들어간다. 나가마사는 아사쿠라 요시카게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2만의 군사를 얻지만 오다군의 압도적인 군세에 밀려 오미 북부의 여러 성이 함락되었고, 원군은 싸워보지도 못한채 에치젠으로 철퇴한다. 노부나가는 아사쿠라군을 추격 해 섬멸한 후(이치조다니 전투), 아자이 가문으로 공격하게 된다.
이미 나가마사는 변변한 반격도 못한채 노부가나의 대군에게 거성인 오다니 성이 포위되었지만, 노부가나는 단번에 진격하지 않고 여러차례에 걸쳐 항복을 권고한다. 만약 항복을 한다면 야마토에 새로운 영지를 준다는 조건이었다. 배반을 싫어하는 노부나가에 있어서는 파격적인 제안이였다. 후와 미쓰하루, 기노시타 히데요시등도 사자로 보냈지만, 나가마사는 계속 거절해 최종 권고도 결렬했다.
나가마사와 사이가 화목했던 오이치는 운명을 함께할 뜻이였으나, 나가마사의 권고로 친정인 오다 가문으로 돌아갔다. 오이치가 노부나가의 진영에 귀환할 때, 아사이·오다군도 일체의 공격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동년 9월 1일, 아버지와 함께 자살.향년29.
일급 사료로 평가되는 신초코기에는, 덴쇼2년 (1574년) 정월 연회에서 금칠을 한 아사쿠라 요시카게, 아자이 나가마사 부자의 유골을 술잔으로 하여 즐겼다는 기록이 있지만 다른 사료에서는 이 사실이 나타나 있지 않다.
[편집] 부인 및 자녀
- 처
- 정실:히라이 사다타케의 딸
- 후처:오이치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
- 측실 : 八重の方
- 아들
- 적남:만보쿠마루(萬福丸)
- 차남:이쿠마루(機丸) - 강제로 승려가 되었지만, 그 이후 분고 호소카와 번의 가신이 되어 아자이 가문을 이었다.
- 長明(七郎)
- 政治(円寿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