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쿠라 요시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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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 義景, あさくら よしかげ , 1533년 10월 12일~1573년 9월 16일)는 센고쿠 시대에 에치젠국 다이묘 겸 무장이다. 에치젠 아사쿠라씨 제11대 도슈이다. 오다=도쿠가와 연합군과 싸운 아네가와 전투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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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편집] 가독 상속
덴분 2년(1533년) 9월24일 에치젠 센고쿠다이묘로 아사쿠라씨 제10대 도슈로 있는 아사쿠라 다카카게(소준 다카카게)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 때 아버지 다카카게는 40세였고, 요시카게는 유일한 친자식이였다. 유아명은 나가야샤이다.
덴분 17년(1548년) 아버지 다카카게가 사망한 후 가독을 승계하고 제11대 도슈가 된다. 그러나, 어렸기 때문에 1555년까지는 아사쿠라 일가의 명장 아사쿠라 소테키가 정무와 군사에대해 보좌하게 된다. 처음에는 노베카게로 개명했지만, 덴분 21년(1552년) 6월16일 무로마치 막부 제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 요시(義)라는 한자를 받아 요시카게로 개명한다. 이 즈음에 좌위문감에 임명된다.
고지 원년(1555년) 소테키가 사망했기 때문에, 요시카게 스스로 정무를 집행한다. 요시카게는 소테키 생전 덴분 17년(1548년) 호소가와 하루모토의 딸과 결혼 했다. 그러나 정실은 여자 아이를 낳은 직후 사망하게 된다.
이 때문에 요시카게는 후실로 고노에 다네이에의 딸을 맞이한다. 둘간에 아이가 없어 이혼하고 친정으로 보낸다.
에로쿠 2년(1559년) 11월9일 종사위하로 위계되었다.
에로쿠 8년(1565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마쓰나가 히사히데들에게 암살된다. 요시카게는 요시테루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에치젠 이치조다니 성에 맞아 들여 보호했지만, 요시아키가 바라는 상경전에는 냉담했기때문에, 요시아키는 미노를 지배하에 두고 세를 떨치고 있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부탁하러 에치젠을 떠난다. 에로쿠 10년(1567년) 가신 호리에 가게타다가 잇코잇키와 내통 모반을 기획한다.(이 것에 대한 아사쿠라 가게아키라가 호리에 가게타다를 모함했다는 설은 잘못된 것이다.) 가가부터 내습한 잇키군과 교전을 계속하면서, 요시카게는 야마자키 요시이에, 우오즈미 가게타카에게 명을 내려 호리에가를 공격한다. 호리에 가게타다도 필사적으로 항전하지만, 결국, 화친하고 가가를 거쳐 노토로 가지만, 그곳에서 몰락한다.
고노에 다네이에의 딸과 이혼한 후, 측실 고자이쇼를 총애한다. 그녀는 아사쿠라씨 중신 구라타니 후쿠치의 딸이다. 고자이쇼는 에로쿠 4년(1561년) 요시카게사이에서 아들 구마기미마루를 낳는다. 하지만, 그 후 고자이쇼는 병사하고, 구마기미마루도 에로쿠 11년(1568년) 요절했다. 같은 해 와카사 슈고 다케다씨의 내분에 개입하고, 도슈로 있는 다케다 모토아키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납치하고, 와카사를 복속시킨다.
그러나, 적자 구마기미마루와 총애한 고자이쇼의 죽음과 가신의 이반등, 계속해서 불운을 맛본 요시카게는 정무를 방치한채 같은 일족인 아사쿠라 가게아키라와 가게타케들에게 맡기고, 유흥에 빠졌다고 전해진다.
[편집] 노부나가 포위망
에로쿠 11년(1568년) 오다 노부나가는 상경을 해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한다. 드디어 막부정치의 부활을 꿈꾸던 요시아키와 대립하게되고, 요시아키는 노부나가토벌을 위해, 요시카게에게 줄기차게 어내서를 보내게 된다. 한편, 노부나가는 쇼군의 명령이라는 미명아래 요시카게에게 2번에 걸쳐 상경을 명령하지만, 요시카게는 거부한다. 이 때문에 에로쿠 13년(1570년) 4월 요시카게는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연합군의 공격을 받게 된다. 연합군의 공세앞에 지성으로 있는 데즈쓰야마 성, 가나가사키 성이 함락, 이치조다니도 위기에 빠지지만, 아자이 나가마사가 노부나가를 배신해 오다군의 배후를 쳤기때문에, 노부나가는 교토로 퇴각한다. 이 때, 아사쿠라군은 오다군을 추격하고, 오다군 병사 다수를 죽이지만, 노부나가를 비롯 유력무장은 도망친후였다.
겐키 원년(1570년) 6월 오다=도쿠가와연합군과 아사쿠라=아자이연합군은 아네가와에서 격돌한다.(아네가와 전투) 그러나, 아사쿠라군 총대장은 요시카게가 아닌 일족인 가게타케였다. 이 때, 요시카게는 4번째 부인 고쇼쇼를 총애해서 이치조다니를 떠나지 않았다.이 때문에 아사쿠라군은 열세인 도쿠가와군에 패배하고, 아네가와 전투에서 참패한다.
9월 노부나가가 미요시 산닌슈, 이시야마 혼간지토벌을 위해 셋쓰로 출병한 틈을 타, 요시카게는 출병하고, 아자이군과 함께 공동으로 오다령의 오미 사카모토로 쳐들어간다. 이 전투에서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노부하루와 가신 모리 요시나리는 전사한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군을 오미로 돌렸기 때문에 교토 히에이산에 고립된 오다군과 대치한다.(시카의 진) 그러나, 노부나가가 조정에 탄원을 했기때문에 12월 노부나가와 칙령강화를 맺는다. 이 시기, 오쿠보 다다타카가 기록한 미카와 모노가타리에서는 노부나가는 요시카게에 대해 엎드려 절한후 [天下は朝倉殿持ち給え。我は二度と望みなし.(천하는 아사쿠라님이 가지시고, 저는 두 번 다시 천하를 바라지 않겠나이다.)]라고 적고 있다.
겐키 2년(1571년) 6월, 요시카게는 겐뇨와 화친하고, 겐뇨의 아들 교뇨와 딸을 약혼시킨다. 8월 요시카게는 아자이 나가마사와 공동으로 오다령 요코야마 산성, 미노우라 성을 공격하지만, 거꾸로 노부나가에 병참(보급)을 위협받아 퇴각한다.
겐키 3년(1572년) 7월 노부나가가 오다니 성을 포위했기 때문에 아자이가에 원군을 보낸다. 노부나가도 요시카게가 대군을 이끌고 왔기 때문에 오다니 성 공격을 포기하고, 서로 대치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노부나가쪽의 계략에 의해 아사쿠라가의 마에바 요시쓰구와 도미타 나가시게 등 유력가신 다수가 노부나가쪽으로 투항한다.
그 해 10월, 가이의 다케다 신겐이 상경을 목표로 오다=도쿠가와령을 침공한다. 노부나가는 요시카게와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본대를 다케다군으로 돌릴 수 없었다. 다케다군은 차례차례 오다=도쿠가와령의 여러성을 함락해 간다. 그러자, 12월 노부나가가 기후로 퇴각한다. 하지만, 요시카게는 노부나가령으로 있는 미노로 침공하지 않은채, 부하의 피로와 적설(積雪)을 이유로 에치젠으로 철퇴해버린다. 그것은 적앞에서 도망치는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였다. 이 때문에 신겐은 격노하고 비난하는 서찰을 보낸다.(이노문서) 더욱이 같은 내용의 비난문이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겐료에게서도 받게된다. 하지만, 요시아케는 그 같은 문서를 무시한다. 요시카게의 철퇴에 따라, 노부나가보다 병력이 열세인 신겐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요시카게가 에치젠에 귀환한 것은 [노부나가를 타도해도, 신겐이 그 자리에 오를것이고, 결국 같지 않은가]라고 생각이였던 것 같다.
겐키 4년(1573년) 4월, 아사쿠라가있어 동맹자로 있는 다케다 신겐은 진중에서 병사하고, 다케다군은 가이로 회군했다. 이 때문에 오다 전군이 아사쿠라가로 향할 가능성이 크지게 되었다.
[편집] 불타는 이치조다니
덴쇼 원년(1573년) 8월 8일 노부나가는 3만의 대군을 이끌고 오미를 침공한다. 이에 대해 요시카게도 아사쿠라전군을 이끌고 출진하려 하지만, 아사쿠라가 중신으로 있는 아사쿠라 가게아키라, 우오즈미 가게타카 등이 요시카게의 출진명령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가신들에 많은 실망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신뢰를 잃었다.) 이 때문에 요시카게는 야마자키 요시이에, 가와이 무네키요 등을 소집해, 2만의 군세를 이끌고 출진한다.
8월 12일 노부나가는 폭풍우를 이용, 스스로 군을 이끌고 아사쿠라측 토리데(소규모 성, 요새)로 있는 오타케토리데를 공격한다. 노부나가의 전격적인 기습에 의해 아사쿠라군은 대패하고 토리데로부터 쫓겨나게 된다. 8월 13일 요우노야마토리데가 함락되고, 요시카게는 아자이 나가마사와 연대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이 때문에 요시카게는 에치젠으로 철군을 결정한다. 하지만, 노부나가가 요시카게의 철퇴를 예측했기때문에, 아사쿠라군은 오다군의 추격을 받게되었다. 이렇게 해서 아사쿠라군은 다베야마에서 대패하고, 야나세로 도주했다. 오다군의 끝없는 추격에 다시 도네자카에서 격돌한다. 그러나 병력차와 오다군의 강력함에 아사쿠라군은 싸우지도 못한채 패주하고, 아사쿠라 자신도 목숨만 겨우 건저서 히키다 성으로 도망쳣지만, 사이토 다쓰오키, 야마자키 요시이에, 야마자키 요시노부 등 유력무장 다수를 잃는다.
요시카게는 히키다 성에서 이치조다니를 목표로 도주하지만, 그 사이에도 장병들은 차례차례 도망을쳐 남은 사람이라곤 도리이 가게치카와 다카하시 가게나리 등 측근 10여 명밖에 없었다. 8월 15일, 요시카게는 이치조다니로 돌아온다. 하지만, 아사쿠라군의 패배를 안 이치조다니의 장병들은 대부분 도망친다. 요시카게가 출전하고 싶어도 아사쿠라 가게아키라이외에는 출진할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8월 16일 요시카게는 가게아키라의 권유에 따라 이치조다니를 버리고, 도운지로 간다. 8월 17일 헤센지에 원군을 요청하지만, 이미 노부나가의 부탁을 받았던 헤센지의 공격을 받는다. 8월 19일 겐쇼지로 도망친다.
한편 8월 18일 노부나가가 이끄는 오다군은 시바다 가쓰이에를 선봉으로 이치조다니를 공격하고, 손에 닿는데로 방화를 한다. 이 화재는 3일낮 3일밤 계속된다. 이것으로 아사쿠라가 100년의 영화도 한줌의 재가 된것이다.
[편집] 말년
8월 20일 이른 아침, 아사쿠라 요시아키라는 요시카게를 배신하고, 겐쇼지를 습격한다. 요시카게는 저항을 단념하고 자결한다. 향년 41세
요시카게 사후, 오다 노부나가는 고토쿠인와 고쇼쇼, 아이오마루?등 아사쿠라 일족을 전부 학살했다. 이로써 아사쿠라가는 완전히 멸문되었다. 요시카게의 목은 교토의 고쿠몬에 효수되었다.
그후, 아사쿠라 요시카게, 아자이 히사마사, 아자이 나가마사, 이 세사람의 두개골은 백목(白木)으로 된 받침대에 놓여져 연회가 있을때면, 잔으로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편집] 인물
- 요시카게는 현재에도 바보같은 무장이란 평가가 많다. 그 이유로는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망명해 왔을때 상경을 했다면, 천하를 쥘수 있는 절호의 기호를 놓친 것과, 1572년 12월 오다 노부나가가 기후로 퇴각할때, 추격했다면 노부나가를 토벌할 가능성이 컸다. 단지 요시카게에 있어서는 천하를 쥐는 야망이 없었던 것같다.
- 에치젠의 명가 아사쿠라가의 도슈로 자존심이 높았던 것 같다. 요시카게에서 본다면 한낱 가신출신(오다가는 시바가를 모셨다.)인 노부나가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수치였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설에 의하면 요시카게는 롯카쿠가문이고 이를 토대로 보면 납득이 된다.
- 이치조다니 일대에 문화권을 형성한 것은 높게평가된다.
- 요시카게는 측실로 고쇼쇼를 맞은 후, 주지육립(酒池肉林)에 빠졌다고 전해진다.
[편집] 이설
- 요시카게는 오미 롯카쿠씨로부로 온 양자였다는 설이 있다. 요시카게의 아버지 아사쿠라 다카카게와 롯카쿠씨간의 밀약으로 양자로 왔다고 한다. 그리고, 요시카게 측근에는 롯카쿠계 이름이 많고, 롯카쿠씨 내분에 개입도 한다. 롯카쿠씨와 아사쿠라씨 양식의 서명을 병행했다. 또한, 보다이 가신단의 대량이반과 아사쿠라 도슈로의 급격한 지도력부재, 아사쿠라 가게아키라와의 알력싸움 등 이를 뒷받침한다. [전통아사쿠라씨 혈맥인 일문(필두로 가게아키라)]와 [롯카쿠씨의 피가 흐르는 본가의 도슈(요시카게)]란 구조로 본다면 명확하게 설명이 된다. 신빙성이 높다 하겠다.
전 임 아사쿠라 다카카게 |
에치젠아사쿠라가 역대도슈 1548년 - 1573년 |
후 임 소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