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나지르 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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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나지르 부토(신드어: بینظیر ڀھٽو, 우르두어: بینظیر بھٹو, Benazir Bhutto, 1953년 6월 21일 ~ 2007년 12월 27일)는 파키스탄의 정치가이다. 1988년 선거의 승리로 이슬람 국가에서는 사상 최초로 여성 수상이 되었지만 20개월 후 쿠데타로 군부의 지지를 받은 그람 이스하 크한 대통령에 의해 수상직에서 물러났다. 1993년 재선되었으나, 3년후에 여러 비리와 부패혐의로 인해 파르크 레가리 대통령에 의해 또 한번 해임되었다. 이 스캔들중에 몇가지는 그녀의 수상재임중에 스위스 기업에게 의도적인 편의를 제공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이것은 미해결된채로 남아있다. 그녀의 남편 아시프 알리 잘다리는 스캔들에 관여한것으로 인해 체포되어 2004년 11월까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2006년 국제 형사 경찰 기구는 파키스탄 정부의 요청에 응하여 부토와 남편 두사람의 체포를 요구하는 국제수배서을 발행했다.
[편집] 생애
전 파키스탄 수상 줄피가르 알리 부토의 딸로써 카라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조부 샤 나와즈 부토는 신드인으로써 파키스탄 독립운동의 중심인물중 한명이었다. 1969년 4월 부토는 하버드 대학 및 옥스포드 대학에서 공부했다. 1971년 인도가 동파키스탄(현재 방글라데쉬)에 군대를 파견하자 아버지 줄피가르가 문제해결을 위해 외교관으로써 UN에 파견되었을때 부토는 학교를 잠시 떠나 뉴욕에서 아버지의 조수로써 도왔다. 학생생활에서 벗어나 부친의 활동을 돕게된것이 훗날 그녀의 정치활동 참여에 커다란 경험이 되었다.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부토는 여러가지 사회문제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1973년 부토는 정치학 학위을 수여받고 졸업한다. 학교생활 중 부토는 전미우등학생우애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부토는 그해 가을 옥스포드에 진학하여 PPE(정치학, 철학, 경제학)에서 석사학위을 얻었다. 옥스포드 재학중 부토는 옥스포드 유니온의 의장으로 취임하는 최초의 아시아 여성이 되었다. 그것은 그녀의 상대후보가 부정한 조사을 진행한 것이 원인이 되어 재선거을 실시한 결과였다. 그녀의 대학에서의 경력은 모든것이 논쟁에서 밝혀진 것들이다. 이것은 부친의 수상재임시 도중 국내 및 해외문제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옥스포드 졸업 후 파키스탄으로 귀국했으나, 부친의 감금과 처형과정에서 그녀는 자택연금을 받았다. 1984년 영국으로 망명하는것이 허락되어 그녀는 망명상태에서 부친의 정당인 파키스탄 인민당(PPP)의 당수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무하마드 지야 울바쿠 장군이 사망하자, 그녀가 파키스탄에서 정치적 존재감을 표시할 수 있게 되었다.
1988년 11월 16일 10년만에 치뤄진 공개선거에서 부토의 PPP는 파키스탄 국민의회의 단독여당의 자리를 거머쥐게 되었다. 그녀는 12월 2일에 선서하고 현대 이슬람 국가들중 최연소(당시 35세) 첫 여성 정부대표이자 파키스탄의 제 9대수상이 되었다. 같은해 부토는 피플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중에도 선출되었다.
1990년 8월 6일 부정을 고발당한 당시 대통령에 의해 수상직을 해임당한 후 PPP는 10월에 실시된 선거에서 패배했다. 그후 3년간 부토는 나와즈 샤리프 정권에 대항하는 야당의 리더을 맡았다. 그후 선거에서 다시 승리하여 1993년 10월 19일 부토는 수상직에 올랐으나 1996년 11월 5일 다시 부정을 고발당해 그녀의 정권은 와해되었다.
무샤라프 대통령에 의한 쿠데타 후 민정이관을 위해 치뤄진 2002년 통일선거에서 부토가 이끄는 파키스탄 인민당은 최대 득표을 얻어 국민의회에서 62개의 의석을 획득했다.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 나와즈파(PML-N)도 15개의 의석을 획득했다. 정부는 이 사태에 직면하자, 즉시 파괴공작을 실시해 의회에서 양당의 세력을 약화시켰으나, 그들에 대한 세간의 지지을 진정시키지는 못했다. 정부는 다음으로 법률과 국가권력을 이용해 부토와 나와즈 샤리프을 구속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통일행동평의회(MMA)에서 암묵적인 지지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이것은 파키스탄 정계에서 부토와 샤리프의 세력을 약화시키는것이 자신의 당의 이익에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통일민족운동당(MQM)도 의회에서 부토의 배제와 신드주 정부의 PPP약체화공작에서 은혜을 받았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세력을 확장한것은 부토 정권시대에 그녀의 개입에 의한것이었다. 부토와 탈레반은 이 사실이 사회 문제화되자, 상대에 대해 비난으로 응수했다. 탈레반의 정치신조에 의하면 여성인 부토에게는 정권을 쥘 권리가 없었다. 그러나 부토는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안정을 시키고, 중앙아시아와의 교역로을 열어줄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부토 정권은 탈레반에게 군사적 및 재정적 지원을 주었고, 또한 소수였지만 파키스탄 국군을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하기도 했다. 결국 탈레반은 1996년 9월 수도 카불에 입성할 수 있었다.
2002년 파키스탄 현 대통령 페르베즈 무샤라프는 수상이 2번이상 재임하는것을 금지하는 새로운 파키스탄 헌법을 공포했다. 이것으로 인해 부토의 재임가능성은 헌법상에서는 소멸되었다. 이 개정은 대통령의 정적이자 수상 경험자였던 부토와 샤리프을 노린 공격이라고 볼 수 있었다.
부토는 2004년 가을 시점에 독일에서 거주하는 3명의 아이들 및 가족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세계을 돌아다니며 연설활동을 벌이며, PPP의 지지자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2007년 11월 통일선거에서 파키스탄으로 귀국하여 수상에 취임할것을 공언했다.
그후 정계복귀을 목표로 칼라치에서 연설중 2007년 10월 자폭테러을 당했으나, 다행히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07년 12월 27일, 베나지르 부토는 라왈핀디에서 집회를 가진 뒤 머리와 심장을 저격당해 사망했다. 범인은 직후 자폭테러를 일으켜 지지자 및 경찰을 포함한 20명 정도의 사상자가 생겼다.[1]
[편집] 주석
- ↑ ""부토 전 총리 폭탄테러로 숨져"", 《YTN》, 2007년 12월 27일. 2007년 12월 27일에 읽어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