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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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 족(Vandal)은 5세기 로마제국을 침범한 게르만족의 일파로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국가를 건설했다.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를 폐위한 오도아케르는 반달족 출신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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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역사
[편집] 게르만족의 대이동
반달족은 전통적으로 실링기 반달족과 하스딩기 반달족 두 부류로 나눈다. 일찍부터 이들은 로마와 접촉했으며 2세기에서 3세기 사이 로마 제국과 도나우 강 국경에서 몇번 충돌한 적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하스딩기 반달족은 콘스탄티누스 1세 시절에 고트족과 경쟁관계에 있었고 콘스탄티누스가 죽자 판노니아로 밀려와서 도나우 강 동안에서 살고 있었다.
5세기 초, 아마도 훈족의 침입에 밀린 반달족은 서진을 시작하여 로마 제국의 국경으로 밀려들어 왔다. 반달족은 당시 대부분 아리우스주의 기독교로 개종해있었다. 406년, 반달족은 별 어려움없이 도나우 강을 건너 판노니아로 밀려왔고 라인강 유역의 갈리아 북부에서 이미 로마화 되어있던 프랑크족의 저항을 받았다. 2만명의 반달족이 전투에서 죽었지만 그해 겨울 라인강이 얼자, 반달족은 대거 라인강을 넘었고 갈리아를 남하하면서 황폐화 시키고 아키텐까지 밀려갔다.
409년 반달족은 계속 남진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히스파니아로 들어갔다. 히스파니아에 이미 정착해 있던 로마 제국의 푀데라티 부족과 전쟁을 벌이면서 반달족은 점차 그 영역을 넓혔고 결국 알란족을 굴복시키고 정착하였다. 반달족의 족장 군데리크는 알란족의 왕의 직위를 얻었다. 히스파니에서 정착한 반달족은 바이킹족 처럼 해적으로 변신했고 북아프리카로 진출하기로 했다.
[편집] 북아프리카 반달왕국
429년 군데리크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가이세리크는 함대를 조직하여 약 8만명의 반달족을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를 침공했다. 반달족은 북아프리카의 도시 히포 레기우스 포위하고 14개월에 걸쳐 공성전을 벌였고 결국 함락시켰다. 이때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히포 레기우스 성안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었는데 아리우스파 이단자들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으나 결국 함락되기 직전 성안에서 죽었다. 북아프리카에서 반달족은 435년 로마와 평화협정을 맺어 동맹을 맺었으나 가이세리크는 곧 동맹을 깨고 439년 카르타고를 수도로 반달왕국을 세웠다. 이후 35년동안 가이세리크의 반달왕국은 대규모 함선을 조직하고 지중해 연안의 로마제국영토를 차례로 침략해 점령하였다.
로마는 그동안 훈족의 침입에 전념하고 있었고 아틸라가 죽자 겨우 반달족에 대한 대책을 세웠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자신의 딸과 가이세리크의 아들의 결혼으로 반달족을 무마하려했으나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가 발렌티니아누스를 죽이고 황제가 되자 양측의 교섭은 깨졌고 455년 반달족은 로마를 침공했다. 이 때 교황 레오 1세는 가이세리크와 담판을 벌여 로마의 약탈을 최소화하는데 일조했다고 전해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반달족의 로마 침공은 그 자체로 로마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어서 반달리즘이라는 말이 생겨났지만 사실상 대규모 학살과 파괴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반달족은 조직적으로 로마의 재물을 배로 실어 북아프리카로 옮겼다.
462년까지 아프리카의 반달왕국은 북아프리카 전역과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등 지중해의 여러섬들을 지배하는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다른 유럽의 게르만족 왕국과는 달리 그들은 피지배민족과 완전히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종교적, 인종적으로 억압했기 때문에 결국 오래가지 못하고 멸망하게 되었다. 아리우스주의자였던 반달족은 가톨릭을 억압했다.
[편집] 반달왕국의 몰락
477년 위대한 반달족의 지도자 가이세리크가 죽자 그의 아들 훈네리크가 왕위를 승계했는데 훈네리크는 치세 말기에 가톨릭 교회와 마니교를 심하게 박해했다. 반달 왕국은 가이세리크가 죽으면서부터 점차 쇠퇴하게 되었고 동고트족에게 시칠리아의 대부분을 빼앗겼다. 훈네리크의 아들 힐데리크는 종교의 자유를 선포하고 가톨릭에 우호적이었고 친-로마 정책을 펴서 비잔티움 제국과 평화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533년 겔리메르가 힐데리크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비잔티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반달왕국과 전쟁을 선포하고 벨리사리우스의 지휘 아래 북아프리카로 쳐들어왔다. 벨리사리우스는 반달군의 저항을 받았지만 결국 카르타고를 함락시키고 534년에는 반달왕국의 두번째 도시인 히포 레기우스마저 정복했다. 겔리메르는 결국 비잔티움 군에게 항복했고 반달 왕국은 무너졌다. 로마는 다시 이 지역을 지배하고 가톨릭 교회를 부활시켰다.
[편집] 반달족의 왕 목록
군데리크가 알라니족을 병합한 이후부터 반달족의 왕의 정식 칭호는 "반달족과 알라니족의 왕"이었다.
- 고디기젤 (359년–407년)
- 군데리크 (407년–428년)
- 가이세리크 (428년–477년)
- 훈데리크 (477년–484년)
- 군타문트 (484년–496년)
- 트라사문트 (496년–523년)
- 힐데리크 (523년–530년)
- 겔리메르 (530년–534년)
[편집] 반달행위(반달리즘)
- 반달행위, 반달리즘에 대한 위키백과의 설명을 보려면 위키백과:문서 훼손 문서를 보십시오.
반달족은 이동하면서 해적질과 각종 약탈 및 파괴 행위를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반달행위(영어: Vandalism 반달리즘)이란 말이 생겼다.
반달리즘은 예술과 문화에 대한 파괴 행위 또는 그 경향인데, 이 말 자체가 반달행위(반달리즘)를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반달족이 이동하던 때 그 지도자(또는 주요 부족)는 이미 로마 문화를 받아들여 로마 문화의 우수성을 인정하였고, 그런 까닭에 파괴 행위는 극히 일부였다. 오히려 로마의 문화와 예술은 로마제국 말기의 노예나 빈곤층 그리고 후대의 예술가와 로마의 보통사람이 더 많이 파괴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기에 고대 그리스 양식을 흉내내려고 한다면 가장 쉬운 방법이 로마시에 있던 오래된 건축물에서 기둥 등을 가져다가 약간 손을 보면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로마”를 만들기 위해 “옛 로마”를 파괴한 이는 로마인 자신이었다. 물론 일부 예술가(예를 들면 미켈란젤로)는 그러한 행위를 비난했지만, 대부분 무시를 당했다.
이와 같이 반달행위를 내포한 낱말에는 고딕 예술의 어원이 된 '고딕'(Gothic)이 있다. 이는 “고트족의” 또는 “고트풍의”라는 뜻으로, 교양 없고 야만스럽고 풍류도 없으며 촌스럽다는 뜻이었다. 이것은 곧 고트족이 그러했다는 경멸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반달족과 마찬가지로 고트족도 로마 문화와 예술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그들의 문화와 로마 문화의 융화를 꾀한 민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