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프리스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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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y, 1733년 3월 13일 ~ 1804년 2월 6일)는 영국의 화학자, 성직자, 신학자, 교육학자, 정치이론가, 철학자이다. 그는 자유주의 정치학, 종교, 실험 과학 등 많은 영역에 기여를 하였다. 산소의 발견자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프리스틀리 스스로는 자신을 과학자라기보다는 성직자로 생각했다.[1] 그의 사상은 신학적으로는 유니테리언주의,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 철학적으로는 유물론을 표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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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초년 (1733~1755)
프리스틀리는 1733년 영국 잉글랜드 북부의 리즈 근방에 있는 버스털에 위치한 마을인 필드헤드의 유복한 의류 제작자이자 비국교도인 요나스 프리스틀리와 그의 아내 매리 프리스틀리 사이의 4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프리스틀리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필드헤드에서 25km정도 떨어진 샤프톤에 사는 농부인 할아버지에게 맡겨졌다. 매리 프리스틀리는 1739년 12월 28일 아이를 낳은 직후 사망하였고, 그 후 프리스틀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요나스는 1741년에 재혼하였고, 프리스틀리는 필드헤드 근처의 헤크몬드와이크에 사는, 결혼한 지 17년이 지나도 아이를 가지지 못했던 고모 사라 케일리와 고모부 존 케일리에게 맡겨졌다. 그는 자주 병에 걸리곤 하였지만, 배우는 데에는 상당한 열정이 있었고 능력이 뛰어나여 4살 때 이미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의 107개 질문과 답을 모두 외울 정도였다.[2] 그는 부유한 고모의 보호 아래 독실한 칼뱅주의자로 길러졌지만,[1] 이와 동시에 그의 고모는 다양한 종파의 비국교도와 심지어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들과도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3] 프리스틀리는 12살이 되자 문법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였고, 휴일이면 비 영국 국교회 목사에게서 히브리어를 배우곤 했다.
1749년 경 그의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되어 학교를 갈 수 없을 지경에 다다랐지만, 그는 계속해서 아람어, 시리아어, 아랍어 등을 공부하였고 이와 동시에 자연철학, 형이상학, 논리학 관련 책들을 공부하였다. 리스본에서 무역을 하던 그의 친척의 일을 돕기 위해서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고모는 그를 장로교나 독립 교회와 같은 비 영국 국교회 성직자가 되기를 원했고, 프리스틀리도 성직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1752년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됨과 동시에 노샘프턴셔 주의 데번트리에 위치한, 18세기에 비국교도들에 의해 설립된 신학교에 입학하였다.[4] 당시 비국교도들은 케임브리지 대학교나 옥스포드 대학교와 같은 곳에 입학할 수 없었고, 따라서 많은 비국교도들은 비국교도들을 위해 세워신 학교에 입학하여야 했다. 그 중 일부는 교육 수준이 정규 대학교 보다 더 뛰어나 많은 뛰어난 선생들과 학생들이 몰리기도 하였는데[5], 프리스틀리가 간 신학교도 이러한 경우 중 하나였다. 그는 신학교에서 3년에 걸쳐 정규교육과정 이외에도 따로 역사, 철학, 과학 등을 공부하였는데, 이는 그의 비정통적 견해를 더욱 발전시켰다.[6] 데번트리의 신학교는 자유교육과 자유토론을 중시하였으며, 그는 이곳에서 데이비드 하트리나 안토니 콜린스의 사상을 받아들여 자유의지를 거부하고 결정론과 유물론을 신봉하게 되었다. 또한 신앙적으로도 삼위일체에 회의를 느끼고 이를 배격하는 아리우스주의를 선택하였다.[7]
[편집] 니덤 마켓과 낸트위치 시절(1755~1761)
1755년에 데번트리 신학교를 졸업한 프리스틀리는 잉글랜드 남부 서포크 주의 니덤 마켓에 위치한 소규모 독립 장로교 교회에서 목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그의 자유주의적인, 비정통적이고 간혹 이단으로 취급받기까지 하는 사상들은 그를 정통파 교인들과 멀어지게끔 만들었다.
1758년 프리스틀리는 체셔 주의 낸트위치에 위치한 교회로 옮겨갔다. 당시 낸트위치에는 학교가 두 개 있었는데, 둘 모두 비국교도들에게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은 데다가 교육과정 역시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프리스틀리는 자신이 새롭게 학교를 세웠고 1761년 워링턴으로 떠날 때 까지 3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학교에서 그는 라틴어, 수학 등을 가르쳤고 공기 펌프와 같은 간단한 자연철학의 실험기구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교과서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1761년 직접 문법 교과서인 Rudiments of English Grammar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실제 영어 사용에 적합한 문법을 가르치고 있었고 이미 사어가 된 고전 언어들에 근간한 문법 교육을 지양하였으며, 향후 50년 동안 사용될 만큼 큰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이후 워링턴에서의 문법 교육에도 영향을 주었다. 프리스틀리의 교육은 학생들에게서 좋은 평을 얻었다.[8]
니덤 마켓과 낸트위치를 거치며, 프리스틀리는 예수의 속죄를 부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를 비판하기 위해 1761년 The Scripture Doctrine of Remission를 출판하기도 하였다.[7] 이 책에서 그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많은 구절들을 인용하였으며, 이를 통해서 성서에서는 어느 누구도 속죄의 교리를 언급한 적이 없다고 단정 지었다.[9]
[편집] 워링턴 시절 (1761~1767)
낸트위치에서의 그의 강의가 좋은 평을 듣자 1761년 프리스틀리는 랭카셔 주의 워링턴에 위치한 워링턴 아카데미의 문학 강사로 취직할 수 있었다. 1762년 그는 워링턴의 비국교도파 목사가 되었으며 같은 해 제철업자인 아이작 윌킨슨의 외동딸인 18살의 매리 윌킨슨과 결혼하였다. 이들 사이에는 한 명의 딸과 세 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1765년 에딘버러 대학교에서는 그에게 법학 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편집] 교육자로서의 활동
프리스틀리는 워링턴 아카데미에서 문학 강사로 일하였다. 그는 낸트위치에서 문법을 가르쳤던 것 처럼 실용적 영어 사용에 근간한 문법 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프리스틀리는 워링턴 아카데미에서 A Chart of Biography, Essay on a Course of Liberal Education for Civil and Active Life과 같은 교육과 역사에 대한 책을 썼고, 이는 워링턴 아카데미의 교육과정의 수준을 크게 도약시켰다. 그의 교육과정에는 일반적인 대학 교육과정에 비해 역사, 과학, 예술 분야의 비중이 더 높았는데, 이로 인해서 워링턴 아카데미는 이 분야에 있어서 잉글랜드의 우수한 학교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6]
[편집] 과학자로서의 활동
프리스틀리는 워링턴에서 거주할 때부터 과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1763년부터 1765년까지 리버풀의 의사였던 매튜 터너에게서 화학 강의를 들었고, 1765년 부터는 일 년에 한 달씩은 런던에 체류하였다. 런던에서 그는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벤자민 프랭클린과 그의 친구 존 캔턴, 윌리엄 와트슨, 리처드 프라이스의 도움으로 그는 전기에 대한 많은 책을 구할 수 있었고[10], 그 결과 전기에 대한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1766년 프리스틀리는 전기에 대한 연구로 인하여 왕립 학회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또한 1767년 그는 당시에 알려진 전기에 대한 지식과 실험에 대한 책인 The History and Present State of Electricity를 출간하였다. 그 외에도 속이 빈 구의 내부는 전하를 띠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고 전기력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역제곱 법칙을 예측하였고, 숯에 전기가 통한다는 것과 전기와 화학 반응이 서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화학에도 관심을 가져 연소와 호흡의 유사성에 대해여 연구하였다.
[편집] 리즈 시절 (1767~1773)
1767년 프리스틀리는 요크셔 주의 리즈에 위치한 밀 힐 교회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리즈에서 그는 이전보다 더 많은 글 쓰기나 실험을 행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곳에서 그의 신학적 사상이 확립되었다.
[편집] 신학자로서의 활동
프리스틀리는 워링턴 거주 시절에는 다른 일로 인해서 신학 연구에 몰두하지 못하였으나, 리즈에 오면서 그는 신학 연구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고 결과적으로 그의 신앙은 아리우스주의에서 유니테리언주의로 정립되었다. 리즈에서 프리스틀리는 삼위일체와 예수의 선재성 등을 완전히 부정하였고 기독교 교리와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하였다.[7] 그는 오래 전 부터 써오던 신학 교육에 대한 책인 Institutes of Natural and Revealed Religion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는데, 1772년에 1권이 출판되었고 마지막 3권은 1774년에 출판되었다. 그는 책에서 자연 종교, 계시의 진실성을 뒷받침하는 논거, 계시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진실 등을 논하였다. 이 책은 약 반세기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을 요약하였고 오랜 기간에 걸쳐 유니테리언주의의 대표적인 해설서가 되었다.[11]
[편집] 과학자로서의 활동
[편집] 기체 연구
프리스틀리는 리즈에서 '여러 종류의 공기'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가 발견한 것들은 이후 화학에서의 중심적인 이론으로 자리잡았다. 그가 살던 곳은 양조장 근처였는데, 양조 과정에서 거품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를 관찰하여 이산화 탄소의 성질을 규명하기도 하였다.[12] 이전까지 기체의 종류는 공기, 이산화 탄소, 수소 밖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프리스틀리는 금속과 질산을 가지고 실험을 진행하다가 일산화 질소를 발견하였으며 일산화 질소를 공기와 섞자 이산화 질소가 발생하는 것 또한 발견하였다. 그는 일산화 이질소도 발견하였고, 헨리 캐번디시가 1766년 Philosophical Transactions에 제출한 논문을 토대로 실험을 하다가 염화 수소 기체를 발견하기도 하였다.[13] 이와 동시에 그는 수많은 실험 기구들을 고안하였다. 이러한 기체에 관련된 연구들은 이후 칸 거주 시절에 출판된 Experiments and Observations on Different Kinds of Air에 저술되었다. 프리스틀리는 기체를 다루는 실험에 대한 글을 Philosophical Transactions 에 기고하였는데, 이것이 프랑스의 화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관심을 끌었고, 라부아지에는 추가적인 연구를 통하여 프리스틀리의 실험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제공하였다.
[편집] 그 외의 연구
프리스틀리는 물에 이산화 탄소를 녹여 소다수를 제작하는 방법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그는 백악에 산을 첨가하여 이산화 탄소를 발생시켜 이를 물에 통과시켜서 소다수를 만들어 내는 기구를 발명하였다. 처음에 그는 소다수를 제작함으로써 물에 활기를 되찾게 할 수 있고, 이는 곧 괴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14] 사실 소다수는 괴혈병의 치료제는 되지 못하였지만, 이후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상업적으로 이용되었다. 프리스틀리는 소다수 제작법을 1772년에 Directions for Impregnating Water with Fixed Air이란 이름으로 발표하였고 1773년 그는 자연 철학에 대한 기여, 특히 소다수 제작법 발견으로 인해 코플리 메달을 수여하게 되었다.
또한 프리스틀리는 워링턴에서와 마찬가지로 전기를 계속 연구하였으며, 광학에 대한 연구도 시작하였다. 그는 1772년 The History of the Present State of the Discoveries Relating to Vision, Light and Colours를 출판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로 인해서 프리스틀리는 기체 연구에 전념하게 되었다.[15] 그러나 그의 과학적 지식은 1771년 말 제임스 쿡 선장이 천문학자로써 자신과 동행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뛰어났다. 쿡 선장과의 동행은 그의 비정통적인 정치적·신학적 견해로 인해 이에 대한 반대 의견이 거세어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편집] 정치이론가로서의 활동
프리스틀리는 리즈 거주 시절에 정치이론가로서도 활동하였다. 그는 18세기 자유주의를 대변하였고, 인류의 진보와 완전성에 대한 확고한 신봉자였다.[6] 또한 식민지 미국에 대한 영국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4] 이에 관련된 저술로는 1768년에 출판된 Essay on the First Principles of Government가 있다. 이는 프리스틀리의 정치 관련 도서 중 가장 영향력 있는 것으로 손꼽힌다.[16] 그는 이 책에서 국민은 정부에 대한 발언의 권리나 독자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정책 결정은 다수의 이익과 행복을 따라야 하고 이에 위배될 경우 국민은 혁명권을 가진다고 역설하였다.[17] 제러미 벤담은 이 책에서부터 영향을 받아 "최대의 행복은 다수의 행복"이라는 사상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18]
[편집] 칸 시절 (1773~1780)
1772년 12월 셸번 백작이자 후에 랜즈다운 후작이 된 윌리엄 피츠모리스-페티가 프리스틀리에게 자신의 사서와 문학 동료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고, 프리스틀리는 이를 승낙하였다. 1773년 7월 프리스틀리는 윌트셔 주의 칸에 정착하였다.
[편집] 과학자로서의 활동
[편집] 산소의 발견
1774년 8월 1일, 프리스틀리는 적색 산화 수은을 렌즈를 이용하여 태양열로 가열하여 산소를 얻어내었다. 당시의 플로지스톤설에 따르면, 일반적인 기체는 플로지스톤으로 포화되어 있어 불을 잘 타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발생한 기체는 촛불을 더 잘 타게 하였고, 이를 알게 된 프리스틀리는 기체의 이름을 '탈 플로지스톤 공기'라 하였고 1775년 3월 15일 이를 발표하였다. 산소는 1773년경 카를 빌헬름 셸레에 의해서도 발견되었으나, 먼저 발표한 쪽은 프리스틀리였다. 또한 셸레와 비교해서 프리스틀리는 산소의 성질에 대해 더욱 자세한 조사를 하기도 하였다.
1774년 10월에는 피츠모리스-페티와 함께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등을 여행하였는데, 이때 파리에서 앙투안 라부아지에를 만났으며 그의 동료들과 함께 산소의 발견에 대해서 논하였다. 이는 이후 라부아지에가 산소의 성질을 규명하고 플로지스톤설의 오류를 바로잡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나, 정작 프리스틀리 자신은 플로지스톤설을 숨을 거두기 전 까지 옹호하였다.[4]
[편집] 그 외의 연구
프리스틀리는 동물, 식물, 공기의 연관 관계에 대해서 연구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빛이 식물의 생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식물이 산소를 발생시킨다는 것도 알아냈다. 이후 이는 얀 잉겐호우스와 장 제네바어에 의한 광합성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또한 그는 전기를 이용하여 암모니아를 분해하였고, 수소와 산소를 혼합한 기체에 전기를 통하면 물이 생성된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 외에도 그는 '좋은 공기'의 판별, 즉 산소 함유량을 측정하는 방법을 개발하였고 과학 방면에서의 그의 대표적인 저서이자 기체 연구에 있어서 대표적인 성과인 Experiments and Observations on different Kinds of Air 여섯 권 중 다섯 권이 이 시기에 출판되었다.[1]또한 산소를 제외하고도 암모니아, 이산화 황, 사플루오르화 규소, 질소, 그리고 이후에 일산화 탄소로 규명된 기체 등을 발견하였다.[6]
[편집] 철학자로서의 활동
칸 체류 시절 자연 철학이나 종교 철학에 대한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는 데이비드 하트리의 관념 연상설을 통하여 스코틀랜드의 상식철학을 공격하였고 이는 당시 지식인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또한 그는 정교하게 정신적인 의미로 해석된 유물론적인 일원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19] 프리스틀리는 유물론이 신학, 과학, 형이상학 등 모든 면에서 지지될 수 있는 완벽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20] 1777년에 출판된 Disquisitions Relating to Matter and Sprit은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유물론을 전개한 책이고, 같은 해에 출판된 Doctrine of Philosophical Necessity Illustrated는 유물론에 근거한 결정론을 서술한 책이다.
[편집] 버밍엄 시절(1780~1791)
이유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1780년 프리스틀리는 칸을 떠나 버밍엄으로 이주하게 되고, 그곳에서 뉴 미팅 교회의 목사로서 자리를 얻었다. 셸턴 백작을 떠나면서 받은 퇴직금과 그의 친구들이 그가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모아둔 기금 덕분에 버밍엄에서도 그는 저술과 과학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그는 프랑스 혁명주의자들을 옹호하고 크리스트교의 기본 원리들을 부정하는 등 당시 사회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사상들을 주장하였으며[1], 이는 이후 폭동으로 인해 그의 교회와 집이 파괴되는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편집] 신학자로서의 활동
프리스틀리의 종교관은 더욱 발전하여, 기독교 교리의 불합리성은 그리스 등의 이단의 철학을 도입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고, 순수한 기독교는 초기 기독교뿐이었다고 생각했다.[7] 그는 자신의 종교관에 입각하여 종교과 신학에 대한 설교를 하기도 하였으며 글을 쓰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1782년에 출판된 An History of the Corruptions of Christianity이다. 이 책에서 그는 삼위일체, 운명 예정설 등 크리스트교의 원리들을 상당수 부정하고, 또한 어떻게 해서 그런 원리가 생성된 것인지 역사적인 기원을 따져 올라갔다. 이 책으로 인해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아야 했다.[6]
[편집] 과학자로서의 활동
프리스틀리는 보름달이 뜨는 날 마다 모임을 가지는 루나 학회에서 매튜 볼턴, 제임스 케어, 제임스 와트, 에라스무스 다윈과 같은 사람들과 친분을 다지기도 하였다.[4] 루나 학회는 왕립 학회와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루나 학회의 회원들은 모두 이론보다는 응용을 중시하였고, 비국교도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과학을 실생활, 특히 산업에 적용하는 방법이었다.[21] 그는 버밍엄에서 Experiments and Observations on different Kinds of Air의 마지막 한권을 완성하였고, 왕립 학회에 여러 논문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그는 버밍엄에서 생석회(산화물)를 수소와 함께 가열하면 금속 상태로 변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과정에서 물이 형성된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동안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에 의해 발견된 산소에 대한 연구를 계속 하여 플로지스톤설을 부정하기 시작하고 물이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는 등 화학 혁명의 기초를 다져나갔으나, 프리스틀리는 이를 거부하고 여전히 플로지스톤설을 신봉하였다.[6]
[편집] 정치이론가로서의 활동
프랑스 혁명이 1789년에 일어나자 다른 자유주의자들과 같이 프리스틀리는 이를 지지하였고, 시민과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상으로 인해 그는 영국인들의 반감을 샀다. 그는 1791년 정치가 에드문드 버크가 쓴 프랑스 혁명에 반대하는 글인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를 비판하는 글인 Letters to Edmund Burke Occasioned by His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를 기고하였고, 같은 해 A Political Dialogue on the General Principles of Government를 출판하였다. 이전까지 그는 국가의 권력은 국왕, 귀족, 평민의 균형 위에 존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이 책에서 그는 모든 국가는 국민의 의지대로 움직여야 하며, 따라서 권력은 세 개의 세력의 균형이 아니라 오로지 국민에게만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7]
이러란 프리스틀리의 사상과 행동은 대중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결국 1791년 6월 14일 버밍엄에서 폭동이 일어나 그의 집, 도서관, 연구소, 교회를 포함하여 많은 비국교도들의 삶의 터전이 파괴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를 프리스틀리 폭동, 또는 1791년의 버밍엄 폭동이라고도 한다. 그 후 그는 버밍엄에서 추방되어 런던 근교로 피신하였다.[6]
[편집] 말년 (1791~1804)
버밍엄 폭동으로 인해 거처가 모두 파괴되자 프리스틀리는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런던 근처의 해크니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요주의 인물로 낙인이 찍히고 심지어 왕립 학회의 사람들 까지 그를 멀리하였다. 오직 프랑스 정부만이 그를 높이 평가하여 명예 시민권을 부여하였다.[2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크니의 그라벨 피스 교회의 목사로 활동하기도 하였고[4], 대학 강사로 출강하기도 하였다.[23]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진전되고 1793년 루이 16세가 처형된 후 영국이 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하자 프리스틀리는 대중들의 분노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그의 세 아들들이 1793년 8월, 그와 그의 아내는 1794년 4월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794년 4월 7일 영국을 떠난 프리스틀리는 6월 4일 미국 뉴욕에 도착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뉴욕이나 필라델피아 등에서 그를 초정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펜실베이니아 주 중부의 작은 도시인 노섬벌랜드에 정착하였다. 프리스틀리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교수직을 제의받았기도 하였으나 사양하고는 노섬벌랜드에서 목사로서 남은 일생을 보냈다. 프리스틀리는 미국에서도 저술, 종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미국의 혁명지도자들과도 친구로 지냈으나, 영국의 친구들과는 연락이 끊겨 정상적인 과학 연구를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라부아지에의 설을 부정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일산화 탄소를 규명하는 선에서 만족하여야 했다.[24] 1800년 출판된 프리스틀리의 마지막 과학 관련 저서인 The Doctrine of Phlogiston Established and That of the Composition of Water Refuted는 그가 플로지스톤설이 거의 무너저 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를 신봉하였음을 알려준다.[3] 종교적으로 그는 미국에 유니테리언 교회를 조직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22] 그는 1804년 노섬벌랜드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만년에 살았던 노섬벌랜드의 집은 미국 국립 사적지로 보존되어 있다.
[편집] 사상
[편집] 철학과 종교
프리스틀리에게 있어서 인간은 완전성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지식의 탐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식을 탐구함으로써 신의 영광을 기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프리스틀리에게 있어 모든 진리는 종교적 가치와 연관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과학적 진리는 종교적 진리와 동일시되었고, 따라서 그의 종교관 역시 일종의 합리성을 지니게 되었다.[25]
프리스틀리는 유물론을 신봉하였고, 이는 그의 종교관의 토대가 되었다. 그는 물질의 고체성, 불활성, 무감각성 등은 물질의 본성이 아니라고 주장하였고 힘이 물질의 본성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물질이 존재하는 것과 정신적 힘을 소유하는 것은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물질과 정신이 독립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다.
프리스틀리는 기독교가 타락하게 된 이유를 정신과 물질을 독립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서 기독교는 삼위일체, 예수의 선재설, 속죄, 영혼에 의한 육체의 부활 등의 복잡한 교리들을 도입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것들이 본질적인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라, 이교도들의 철학이 도입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예수마저도 단지 가장 선량하고 현명한 인간으로 보았다. 프리스틀리는 성부, 성자, 성령 중 성령조차 배격하였으며, 성부만을 인정하였다.[26] 그러나 프리스틀리는 신은 물질성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신의 본성은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신의 존재나 권능에 대한 증거는 확실하다고 생각하였다.[27]
프리스틀리의 유물론은 곧 결정론으로도 이어진다. 그는 결정론이 물질계와 정신계를 모두 지배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프리스틀리에게 있어서 결정론은 신이 인간에게 노력을 통해서 최대의 행복을 쟁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동기를 따른다면, 신의 뜻을 따라 선한 동기를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28]
[편집] 정치
프리스틀리는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으며, 상호협동을 통해 무한한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인간의 지식과 사회성을 인간의 발전에 있어 중요한 기초로 생각하였다.[29] 또한 프리스틀리는 정치에서 다수의 이익과 행복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는 공리주의와 일맥상통한다.
프리스틀리는 인간들이 이익을 위해 사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자유를 포기해야하고, 행동을 전체 사회의 방향에 순응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통해서 군중들은 공직자들에게 자신들의 권한을 위임하여야 하고, 이것이 정치의 성립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정부는 사회의 이익을 통해서 강압적인 성격을 띠게 되고, 군중들도 침해받아서는 안 될 최소한의 기본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0]
프리스틀리에게 있어서 자유는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에 있어 정치적 자유는 모든 국민이 정치에 발언권을 가지고, 공직에 오를 수 있는 길이 확보되며, 공직자의 임명에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국민이 출생이나 재산의 유무에 따라서 이러한 자유를 누리는 것에 차별을 받게 되면 정치적 자유가 흔들리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프리스틀리는 혁명권을 인정하였으며, 위정자들이 그들의 권리를 악용하여 다수의 행복을 파괴한다면 국민은 그들을 축출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31]
그는 프랑스 혁명을 미국 혁명과 더불어 자유의 교리를 가르쳐 준 규범이라고 칭송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보수주의자들이 혁명주의자들을 억압하기 시작하자, 그에 따라 그의 사상도 과격해지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프리스틀리는 영국의 입헌군주제를 지지하였고 국왕, 귀족, 평민의 정치적 삼위일체를 인정하였으나,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진정한 존경의 대상은 오직 국민과 법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정치적으로도 일종의 유니테리언이 된 것이다.[32]
또한 프리스틀리는 개인주의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신의 섭리가 인간을 진보와 행복으로 이끌 것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지나친 구속이나 제도는 이에 방해가 된다고 설명하였다. 즉, 정부는 국민에게 지나치게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관제 교육에도 반대하였다.
[편집] 교육
프리스틀리의 교육사상의 기초는 데이비드 하트리의 관념 연상설과 유니테리언주의이다. 이에 기반을 두어 그는 새로운 교육과정을 제시하였으며, 여성과 하위 계층의 교육 역시 고려하였다. 또한 국가에 의한 획일적인 교육을 거부하고 민간 주도의 다원적 교육을 지지하였다.[33]
프리스틀리는 워링턴 아카데미에서 영어, 근대사, 과학 등 실용적인 교과목을 교과 과정에 편입시키는 당시로는 혁신적인 교육 과정을 주장하였다. 그는 교육 방법 역시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여, 학생 스스로 의문을 품고 탐구해 나가는 방법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교육 철학은 데이비드 하트리의 관념 연상설에 기초한 것이다. 프리스틀리는 하트리의 주장을 인간 생활에 있어 외부환경의 중요성의 강조라고 이해하였다. 따라서 훌륭한 교육이야말로 인간의 완전성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보았다.[34] 또한 프리스틀리는 교육은 단순한 지식 연마가 아닌, 올바른 마음가짐과 올바른 행동을 위한 교육이 따라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올바른 마음가짐은 본성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서 길러져야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지적·도덕적 발전을 위해서는 육체의 연마 역시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역시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의 연마라고 생각하였다.
종교적 교육의 측면에서 프리스틀리는 유니테리언주의에 기초하여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는 부분, 예컨대 삼위일체나 예수의 속죄설 등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교육을 통해서 이러한 합리적 사상을 전파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올바른 교육을 통해서 합리적인 종교관을 심어줌으로써, 기존 종교의 신비주의나 비합리적인 부분을 제거할 수 있는 것으로 믿었다.
프리스틀리는 중간계급을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라고 생각하여 이들에게 실용적인 교육을 제공하였다. 또한 여성교육에 있어서도 여성들이 평등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여성들이 현모양처가 되기 위해서라도 교육은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35] 그리고 프리스틀리는 정부 주도의 교육은 인간의 다양성을 부정하고,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며, 지배 세력에 영합하는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여 이를 배격하였다. 국가에 의해서 교육이 지배되면 그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온다고 생각한 것이다.[36] 그 대신 그는 민간 주도의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편집] 저서
프리스틀리는 일생동안 매우 많은 글을 썼다. 과학 관련 글을 제외한 나머지 글은 그의 친구인 존 루트에 의해서 1817년부터 1832년까지 25권으로 정리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펴낸 책은 1761년부터 책을 펴내기 시작하였다. 프리스틀리는 워링턴 아카데미의 강사로 있을 때 교육 관련 저서를 많이 집필하였는데, 그에 의해 쓰여진 교육 관련 저서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Rudiments of English Grammar (1761년)
- Theory of Language and Universal Grammar (1762년)
- Chart of Biography (1765년)
- Essay on a Course of Liberal Education for Civil and Active Life (1765년)
- Lectures on History and General Policy (1765년, 1788년)
프리스틀리는 신학이나 철학 관련 저서도 많이 저술했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신학·철학 저서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Institutes of Natural and Revealed Religion (1772년~1774년)
- History of the Corruption of Christianity (1782년)
- General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to the Fall of the Western Empire (1790년, 1802년~1803년)
- Disquisitions relationg to Matter and Spirit (1777년)
또한 그는 결정론에 대한 몇 편의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신학·철학 저서들은 대부분 그가 과학 분야에 남긴 업적, 특히 기체 연구로 인하여 주목받지 못하였다.[4]
화학 분야에 있어서 그가 남긴 대표적인 저서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Experiments and Observations on different Kinds of Air (1774년~1786년)
- Experiments on the Generation of Air from Water (1793년)
- Experimenst and Observations relating to the Analysis of Atmospheric Air(1800년)
- Considerations on the Doctrine of Phlogiston established and that of the Composition of Water refuted (1800년)
프리스틀리는 전기와 광학에 대한 저서도 출판하였다.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History and Present State of Electricity (1767년)
- History of Discoveries relating to Vision, Light and Colours (1772년)
이 외에도 프리스틀리는 수많은 종교, 철학, 정치, 과학 관련 저서들을 남겼다.
[편집] 주석
- ↑ 1.0 1.1 1.2 1.3 化學大辭典編集委員會 편, 성용길, 김창홍 역, 〈프리스틀리〉, 《화학대사전》, Vol. 10, 서울:世和, 2001, p. 22.
- ↑ R. E. Schofield, The enlightenment of Joseph Priestley: a study of his life and work from 1733 to 1773, University Park: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7, p. 7.
- ↑ 3.0 3.1 김영한, 〈Joseph Priestley 小考〉, 《史學論志》, Vol. 3 No. 1, 서울: 漢陽大學校 文理科大學 史學科, 1975, 3쪽.
- ↑ 4.0 4.1 4.2 4.3 4.4 4.5 ed. by Cambridge Univeristy Press, "PRIESTLEY, JOSEPH", Encyclopaedia Britannica: a dictionary of arts, sciences, literature and general information, 11th edition, Vol. 22, London: Cambridge Univeristy Press, 1910~1911, pp. 322~323.
- ↑ R. E. Schofield, op. cit., p. 32.
- ↑ 6.0 6.1 6.2 6.3 6.4 6.5 6.6 S. Ross, "Priestley, Joseph", The New Encyclopaedia britannica, 15th edition, Vol. 9, Chicago: Encyclopaedia britannica, 2007, p. 696~698.
- ↑ 7.0 7.1 7.2 7.3 김영한, 앞의 책, 4쪽.
- ↑ R. E. Schofield, op. cit., pp. 79~86.
- ↑ Ibid., p. 71.
- ↑ Ibid., p. 142.
- ↑ Ibid., p. 172.
- ↑ G. D. Considine, "PRIESTLEY, JOSEPH", Van Nostrand's encyclopedia of chemistry, 5th edition, Hoboken: Wiley-Interscience, 2005, p. 1369.
- ↑ R. E. Schofield, op. cit., p. 267.
- ↑ Ibid., p. 256.
- ↑ 김영한, 앞의 책, 2쪽.
- ↑ R. E. Schofield, op. cit., p. 207.
- ↑ 17.0 17.1 김영한, 앞의 책, 7쪽.
- ↑ R. E. Schofield, op. cit., pp. 207~208.
- ↑ Ibid., p. 273.
- ↑ 김영한, 앞의 책, 5쪽.
- ↑ 위의 책, 6쪽.
- ↑ 22.0 22.1 위의 책, 8쪽.
- ↑ R. E. Schofield, op. cit., p. 274.
- ↑ Ibid., p. 275.
- ↑ 김영한, 앞의 책, 16쪽.
- ↑ 위의 책, 19쪽.
- ↑ 위의 책, 21쪽.
- ↑ 위의 책, 23쪽.
- ↑ 위의 책, 26쪽.
- ↑ 위의 책, 28~29쪽.
- ↑ 위의 책, 30~31쪽.
- ↑ 위의 책, 32~33쪽.
- ↑ 조승래, 〈조셉 프리스틀리의 교육 사상〉, 《교육과학연구》, Vol. 12, 청주: 청주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1998, 95쪽.
- ↑ 위의 책, 97쪽.
- ↑ 위의 책, 103쪽.
- ↑ 위의 책, 105쪽.
[편집] 참고문헌
- ed. by Cambridge Univeristy Press, Encyclopaedia Britannica: a dictionary of arts, sciences, literature and general information, 11th edition, London: Cambridge Univeristy Press, 1910~1911.
- G. D. Considine, Van Nostrand's encyclopedia of chemistry, 5th edition, Hoboken : Wiley-Interscience, 2005.
- ed. by Encyclopaedia Britannica, inc., The New Encyclopaedia britannica, 15th edition, Chicago: Encyclopaedia britannica, 2007.
- R. E. Schofield, The enlightenment of Joseph Priestley: a study of his life and work from 1733 to 1773, University Park: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7.
- 김영한, 〈Joseph Priestley 小考〉, 《史學論志》, Vol. 3 No. 1, 서울: 漢陽大學校 文理科大學 史學科, 1975.
- 조승래, 〈조셉 프리스틀리의 교육 사상〉, 《교육과학연구》, Vol. 12, 청주: 청주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1998.
- 化學大辭典編集委員會 편, 성용길, 김창홍 역, 《화학대사전》, 서울:世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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