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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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2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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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 191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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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군주 |
니콜라이 2세(러시아어: Никола́й II, 1868년 5월 18일 - 1918년 7월 17일)는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1894년 11월 1일 - 1917년 3월 15일)이다. 본명은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러시아어: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ома́нов). 로마노프 왕조의 14번째 군주이다. 1917년 혁명으로 퇴위했으며, 1918년 총살당했다.
목차 |
[편집] 생애
[편집] 유년 시절과 황제 즉위
니콜라이 2세는 1868년 5월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황제 알렉산드르 3세와 덴마크 출신의 황후 마리아 표도로브나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남에게 봉사하는 따뜻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유약했기 때문에 군주감으로는 적합하지 못한 성격이었다. 1881년 황태자에 책봉되었고, 1891년 극동 방문 중 일본에 들렀을 때, 이른바 오쓰 사건으로 부상을 입어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1894년 11월 2일, 영국의 빅토리아의 손녀인 알렉산드라와 결혼하였으며, 그 해 부황인 알렉산드르 3세가 신장병으로 서거하자 제위를 계승했다. 당시 니콜라이는 황제가 될 준비가 아직 안되어 무척 당황했다고 한다. 대관식이 진행되던 중 목걸이가 그의 목에서 떨어지자 모두들 불길한 징조로 여기고 목격자들에게 함구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다음날에도 역시 좋지 않은 징조를 예견하는 듯한 사건이 일어났다. 옥외에서 열린 황제 즉위 행사에 군중이 너무 많이 몰려 사상자가 100명이나 발생했고 부상자도 수천 명이었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그들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고 행사를 취소했다.
[편집] 더욱 악독해진 전제정치
헌신적인 남편이자 관대한 아버지였던 니콜라이 2세는 정치보다 가정생활에 더 큰 관심을 쏟았다. 그럼에도 막상 황제가 되고 나서는 그는 부황의 뒤를 이어 시대착오적인 반동정치를 계속 펼쳐 전제 정치의 힘만 더욱 강해져 버렸다. 1881년의 임시법을 계속 적용, 확대하여 언론과 사상을 엄격히 통제했고, 교육에도 많은 제한을 가했다. 젬스트보와 시 정부의 권한은 더욱 축소됐다. 젬스트보의 과세대상도 줄였고, 젬스트보 위원과 고용인의 임명 비준을 거부하여 정권에 충성하는 사람만이 공적인 지위를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종교 박해도 더욱 심해졌다. 분리파 정교도가 심한 탄압을 받았고, 아르메니아 교회와 그 밖의 종파들에도 많은 제약이 가해졌다. 유대인의 지위도 더 악화됐다. 유대인의 토지 매입을 더 엄격히 규제했고, 1903년 베사라비야의 키시뇨프에서 시작돼 우크라이나 일대로 확대된 대규모의 유대인 약탈과 학살을 방조했다. 1809년 러시아에 합병된 이래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받고 있던 핀란드에도 강력한 러시아화 정책을 추진하여 많은 권리를 박탈했다. 반대 운동이 격화되면서 핀란드는 혁명 세력의 주요 근거지가 됐다.
경제 면에서는 1906년까지 비테를 계속 중용, 강력한 산업화 정책으로 큰 성과를 낳았으나, 균형 잃은 산업화는 한편으로 위기를 가져왔다.
[편집] 피의 일요일
1905년 1월 22일, 여느 때라면 성당에 갈 시간에 굶주림에 지친 노동자들이 황제에게 급료를 올려달라고 청원할 생각으로 성가를 부르며 눈길을 걸어 황궁으로 갔다. 청원서를 가지고 행진하는 대열은 점점 불어나 급기야는 20만 명을 넘어섰다. 이 행렬 앞에는 이콘과 황제의 초상이 게양되어 있었다. 그 행렬 선두에는 러시아 정교회의 가폰 신부가 있었다. 브치로프의 공장에서 노동자 3명이 부당해고를 당한 것이 원인이 되어, 가폰 신부 아래 노동자가 결집하게 되었고, 이들이 황제에게 제출할 청원서를 들고 행진하게 된 것이다. 이 파업은 이미 1주일 전에 발생하여 계속되다가 이날 22일에는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직접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비상수단을 쓰게 된 것이다.
청원서 행렬은 오후 2시, 광장에 집결했다. 이 대열 앞에는 “병사들이여, 인민들을 쏘지 말아라”고 하는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막아선 황제의 군대는 대열을 향해 일제사격을 가했다. 뒤이어 대포도 여러 발 발사되었다. 이 일제사격으로 1천 명 이상의 노동자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행렬에 대해 마지막으로 황제의 기병대가 돌진하여 칼을 휘둘렀다. 이리하여 거룩한 주일은 피의 일요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의 파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모스크바, 사라토프, 바르샤바 등지에서 노동자들은 연일 시위에 나섰다. 그 결과 66개 도시의 44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항의의 표시로 작업을 중단했다. 이때까지 니콜라이 2세가 이 사건이 얼마나 큰 파정을 가져올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사이, 10월에는 대규모의 파업이 발생하여 러시아 경제는 파탄(한마디로 '국가 자체가 정지된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받들듯이 섬겨온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 수많은 동료들이 살상된 사실을 알게 되자 러시아 민중 속에 신앙과 같이 뿌리 깊던 황제 숭배는 일시에 무너지고 사람들은 황제에 대해 적대감을 품게 되었다. 당시 조선과 만주를 놓고 일본과 전쟁 중(러일 전쟁)이던 러시아 정부로서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위기를 맞은 셈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포츠머스 회의에 전권대사로 파견된 비테는 의회를 구성하겠다는 약속으로 국민을 설득하여 가까스로 난국을 진정시켰으나, 제국 정부의 도덕적 정통성이 무너짐으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붕괴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은 훗날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편집] 퇴락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에도 황제에 대한 불만이 여전하다고 여긴 니콜라이 2세는 이러한 국내의 불만을 진정시키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 때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황제 자신도 괴승 라스푸틴의 예언을 감쪽같이 믿고 1915년부터 전선에 뛰어들었다. 실제로는 겉치레에 불과했다). 무려 1천 500만 명이 전선에 나가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의 노동력은 급격히 저하되어,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국내의 불안은 고조되어갔다. 각지에서 파업과 시위운동이 발생하고, 혁명의 기운은 날이 갈수록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1917년 어느 날, 마침내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9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이 파업 데모에 참가하여 “빵을 달라”고 외쳤다(당시 식량 부족 탓인지 기근으로 죽은 자도 있었다. 벨기에와 영국, 독일과 터키를 비롯한 1차대전 참전국들 또한 기근을 겪었다). 이틀 후에는 시위가 시내 전체로 확산되었다(2월 혁명). 시위대는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붉은 깃발을 휘날렸다. 이에 니콜라이 2세(실제로 겁쟁이이기도 했던 그는 1916년에 전선에서 도망쳐서 궁전으로 되돌아왔다고 함)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수만 명의 군 병력과 예비군을 배치시켜 시위대를 저지하려 했지만, 군대는 물론이요 예전에 혁명가들을 칼로 살해했다던 악명높은 기병들조차도 (오랫동안 굶었던 탓인지) 시위대에 동정심을 느껴 결국 혁명군에 가담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혁명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다. 더군다나 황제와 친했던 관리들마저 사퇴하여 혁명파에 붙은 자도 있었다.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며 절망에 빠진, (실제로) 전선에 뛰어들어서도 만병 통치약 하나 못 찾았던 니콜라이 2세는 제위에서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엄청난 변화를 예고하는) 선언을 하게 된다. 정부는 총사직하고, 자본가를 중심으로 한 케렌스키의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원래 니콜라이 2세는 자신의 아들 알렉세이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했으나, 어린 나이인데다 혈우병을 앓고 있는 알렉세이였기에 동생 미하일에게 제위를 양위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노동자와 농민들은 미하일 역시 니콜라이 2세와 다를 바 없다 하여 반대했다. 이러한 사태를 지켜보던 임시 정부는 미하일에게 제위를 버릴 것을 권고했고, 미하일은 그러한 제의를 받아들였다(실제로 미하일은 "저 또한 폐하처럼 백성들로부터 욕들을 짓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로써 군주제는 폐지되었고, 304년 동안 지속되어 온 독일계 왕조인 '홀슈타인-로마노프 왕조'는 사치 속에서 퇴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편집] 임시 정부와 10월 혁명
2월 혁명을 주도했던 임시정부(멘셰비키가 다수를 차지)가 집권해도 '가난한 국가'라는 오명을 벗기지는 못했다. 케렌스키가 내놓은 상품은 아주 파격적이었지만, 식량 부족만은 여전했다. 1917년 9월 어느 날, (당시 러시아의 영토였던) 라트비아에서는 독일이 겨자 가스를 뿌렸던지 수많은 러시아의 사병과 장교들이 떼죽음을 당했다(물론 겨자 가스를 뿌린 독일군도 전리품을 찾으려 하다가 스스로 봉변을 당한 자도 있었다). 당시 수도였던 페트로그라드(現 상트페테르부르크)조차 독일-오스트리아 주도의 동맹국들에게 점령을 당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나돌았다. 그 시기에 케렌스키 내각은 코르닐로프 장군으로부터 전복을 당할 뻔했다는 그 아찔한 상황을 견뎌야만 했다.
1917년 10월 어느 날, 민중들은 또 다시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2월 혁명이 피를 많이 흘렸는데 반해, 10월 혁명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리고 기간도 길지 않았다. 결국, 케렌스키 내각은 퇴임을 선언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레닌 주도의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언된 것이다. 하지만 케렌스키는 니콜라이와는 달리 자유인의 몸이었다. 왜냐하면 니콜라이가 무능했던 반면 케렌스키는 서유럽에만 있던 제도를 러시아 땅에서도 제도화시킨 사람이기 때문이다(러시아 역사상 사형 제도가 없었던 것도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케렌스키는 어렸을 때 레닌과는 동문이었고, 당시 심스부르크 학교의 교장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레닌이 힘들어할 때 항상 위로해주었다고 한다. 케렌스키나 레닌이나 사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몰랐지?
하지만 차이점이 있지! 케렌스키는 평소부터 근면검소했고 공부도 잘 하여 초등학교때부터 상을 많이 탔다. 당시 러시아 인구의 20%도 채 안 되었던 '대졸자'였고, 신용을 잃지 않는 성격 덕분인지 정계 진출도 쉬웠다. 실제로 1912년 두마에도 진출했다. 워낙 온건했던지 내각으로 집권해서도 온건 정책을 내세우게 된 것이다.
하지만 레닌은 사회적인 문제아로 낙인찍힌 적 있는 사람이다. 그는 시베리아에 유형 생활을 몇 차례나 한 경험도 있다. 그 때문에 '나라를 아예 갈아엎자'는 식의 극단적인 논리를 주장한 사람 또한 레닌이다.
하지만 레닌이 주도하는 볼셰비키가 집권해서 그런 지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였던 1918년, 러시아에는 내전의 기운이 감돌았다. 기근으로 죽어갔고, 볼셰비키에 반감을 드러낸 자들은 그들로부터 숙청당하여 백군으로 돌아선 자도 있었다. 그리고 볼셰비키가 동맹국과 상대로 맺은 가혹한 조약 때문에 서방 연합국들은 물론이요 일본과 미국조차도 볼셰비키를 비난하여 백군을 지원하기에 이른다. 이들 중에는 수억 달러의 돈을 들여서라도 우랄 지방에 감금된 니콜라이 가족을 구해주자는 자도 있었다. 백군은 제정 러시아 시절의 장교들의 강력하고도 냉철한 지휘력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결국 백군은 수치스러운 패배를 당하였다. 10월 혁명으로 내각에서 물러난 케렌스키도 백군을 지원했다가 참패를 당하여 프랑스로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니콜라이와 그의 가족들은 예카테린부르크의 어느 숙소에 감금되고, 그 날에 총살형을 당하였다. 이들의 시신은 불태워져 소각되었다.
[편집] 2월 혁명 이후의 니콜라이
2월 혁명 이후, 니콜라이와 그의 가족들은 (황제의 명령이 아닌 케렌스키의 명령을 따르게 된) 군졸들의 감시를 받아 가면서 우랄 지방에 거처하게 되었다. 약 8개월동안 단란한 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예전에 깨끗했던 궁전이 아닌, 평범한 민가(民家)에 살아야 했다. 군졸들은 그들의 대화까지도 엄격히 검열했다.
니콜라이와 그의 가족들은 1918년 7월 어느 날, 예카테린부르크의 한 숙소에 감금되었고 그 날에 총살형을 당하였다. 이들의 시신은 전원 불태워져 소각되었고, 1991년에 재발견을 하게 된다.
[편집] 니콜라이의 사후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 연방이 들어서면서 1991년 니콜라이 2세와 그의 직계가족들은 순교자로서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1991년 에카테린부르크 근처의 숲에서 발견된 시신이 유럽 족보 기록을 바탕으로 니콜라이 2세 및 황후 가문의 사람들과의 혈연 관계 대조를 통한 DNA 검사에서 니콜라이 2세 가족의 시신으로 밝혀졌다. 이후 러시아는 니콜라이 2세 가족의 시신을 찾았다고 공식 발표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베드로-바울로 성당에 안치하였다.
[편집] 가족 관계
-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 황녀 올가 니콜라예브나
- 황녀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
- 황녀 마리아 니콜라예브나
- 황녀 아나스타샤 니콜라예브나
-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편집]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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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tters of Nicholas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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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 Russian Martyrs. Tsar Nicholas and His Family
- Mother of Last Russian Tsar to Be Reburied
전 임 알렉산드르 3세 (재위 1881 - 1894) |
러시아의 군주 1894년 11월 1일 - 1917년 3월 15일 |
후 임 없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