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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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德惠翁主, 1912년 5월 25일 - 1989년 4월 21일)는 구한말의 황족으로 광무제 고종이 60세가 되던 해에 후궁 복녕당 양씨 사이에서 얻은 고명딸이다.
[편집] 생애
고종황제의 고명딸인 덕혜옹주는 그녀가 5살이던 해에 즉조당에 유치원이 만들어질 정도로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1917년 민중들의 존경을 받는 대한제국 황실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일본 제국에 의해 덕혜옹주는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명으로 일본황실 황녀로 정식 입적되었다. 서울의 히노데(日出) 소학교를 거쳐 일본에 강제유학을 간 그녀는 1925년 도쿄 가쿠슈인 대학(学習院大学)에 입학하였지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신경쇠약에 걸렸다. 1930년 모친 복녕당 양씨의 죽음을 계기로 정신분열증(조발성 치매증) 증세를 보였으나 이내 호전되었다.
일본 황태후 사다코의 간계로 1931년 5월 8일 도쿄에서 쓰시마섬 도주인 소오 다케유키(宗武志, 종무지)과 정략 결혼하여 이듬해 8월 14일, 딸 마사에(正惠, 정혜)를 낳았으나 출산 후 지병이 악화되어 1953년 남편 다케유키[1]에게 버림받고 말았다. 1955년에는 딸 마사에마저 행방불명되는 불행을 겪었고, 1962년 1월 26일 귀국할 때까지 정신장애로 도쿄 인근의 마쓰자와병원에 입원하는 비참한 생활을 전전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일보와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일한 김을한 기자에 의해 알려지면서 대한민국에 귀국하였다. 당시 일본에 와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덕혜옹주의 사연을 듣고는 그런 사람이 있었냐고 할 정도로 덕혜옹주는 자신의 고국에서도 관심받지 못했다.[2]이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930년 모친상을 치르기 위해 조선을 방문한 덕혜옹주의 행적을 관심과 동정을 담아서 보도하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3]
귀국 후에는 의민태자비 이방자 일가 및 유모 변복동 여사와 함께 창덕궁에 기거하며 노환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수강재(壽康齋)에서 타계하였다. 그로부터 9일 후인 4월 30일, 의민태자비도 서거하였다. 1961년 2월20일 제정된 ‘구황실재산법 제4조 시행에 관한 건'에 의하여 구황족에 포함되었으며,국가로부터 보조금을 지급받아서 생활하였다.[4] 현재 덕혜옹주의 무덤은 아버지 고종황제의 능소인 홍릉 뒤에 있다.
[편집] 바깥고리
[편집] 주석
- ↑ 1953년당시 다케유키 백작은 일본국 헌법의 제정으로 화족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백작 다케유키에서 평민 다케유키로 신분이 바뀐다.
- ↑ 길윤형. "공화국 시대, 황실의 비극", 《한겨레 21》, 2006년 8월 24일.
- ↑ 한국방송 역사다큐멘터리 한국사 傳 제작진이 입수한 보도자료를 보면 당시 동아일보는 조선에 귀국한 덕혜옹주의 행적을 보도하면서 존칭을 붙였으며, 조선일보는 일본에 의해 덕혜옹주가 정략결혼을 하자, 신랑 소 다케유키 백작의 사진을 지워버린 사진을 게재하였다.
- ↑ 길윤형. "황족의 품위가 말이 아니오", 《한겨레 21》, 2006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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