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유리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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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명왕(瑠璃明王, 기원전 38년 - 18년)은 고구려의 제2대 왕(재위 : 기원전 19년 - 18년)으로 휘는 유리(榴璃 또는 類利) 또는 유류(孺留)이다. 동명성왕과 왕후 예씨의 아들이다. 기원전 3년에 졸본에서 수도를 위나암(국내성)으로 옮겼고, 계비 치희를 그리워해서 지었다는 황조가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재위 33년인 14년에 무휼을 태자로 삼았고, 2만 명의 군대와 오이와 마리 장군을 보내 서쪽의 양맥(梁貊)을 치고, 또 현도군의 고구려현(高句麗縣 또는 高句驪縣)을 쳐서 복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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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탄생과 즉위
유리명왕은 동명성왕의 맏아들로 동부여 출신의 왕후 예씨의 소생이다. 동명성왕이 동부여에서 졸본부여로 망명한 이후에 태어났으므로, 출생년도는 기원전 38년 혹은 기원전 37년이다. 동부여에서 태어나 장성하여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로 와서 기원전 19년 4월에 왕태자에 책봉되었다. 이 때, 동명성왕이 남긴 부러진 칼 조각이라는 징표를 주춧돌에서 찾아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고구려에 돌아오자마자 왕태자에 책봉된 유리는, 9월에 동명성왕이 서거하자 왕위를 이어받는다. 이때 고구려의 조정에는 유리보다 나이가 많은 동명성왕의 양아들인 비류와 온조는 물론, 이들의 어머니인 소서노가 건재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유리의 등극을 지켜보기만 하다가, 남하하여 각자 세력권을 형성한다. 온조는 백제를 건국한다.
[편집] 동부여와의 경쟁과 태자 도절의 죽음
오랜 동부여 생활로 자기 세력이 없었던 유리명왕은 즉위 이듬해인 기원전 18년 7월에 부왕의 최측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다물후 송양의 딸을 비롯한 여러 개국공신과 두루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점차 자신의 지지 세력을 확대하였다. 유리명왕은 기원전 9년의 선비족 토벌전을 실시하였다. 당시 선비족은 지속적으로 고구려의 변방으로 밀려들어와 약탈을 일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리명왕은 부분노와 함께 직접 대군을 이끌고 전쟁에 참가하여 왕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게 되었고, 그 덕택에 손쉽게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 무렵 고구려는 동부여와도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 전쟁으로 나라가 피폐해지자 동부여의 대소왕은 기원전 6년에 유리명왕에게 화친할 것을 제의하고 인질의 교환을 요청하였다. 이에 유리명왕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으나, 강경파의 집단 반발과 함께 도절의 거절로 화친은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이에 대소는 그해 11월 군사 5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하지만 폭설로 인하여 동사자가 많이 발생하는 바람에 제풀에 지쳐 퇴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에도 동부여는 고구려를 적대하며 고구려에 대한 전쟁준비를 늦추지 않았다. 유리명왕은 동부여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대(對)부여 강경파들을 제거하기로 한다. 이것이 바로 교시사건이다.
기원전 1년 경신년 8월, 유리명왕은 제사에 쓰일 돼지를 놓아주고, 강경파의 지도자인 탁리와 사비로 하여금 그 도망간 돼지를 잡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돼지를 잡아 더이상 달아나지 못하게 하려고 칼로 다리의 힘줄을 잘라버렸다. 이에 유리명왕은 제사에 쓰일 돼지에게 함부로 상처를 냈다는 이유를 들어 그들을 구덩이에 파묻어 처형했다. 이후 유리명왕은 탁리와 사비의 귀신의 영향으로 갑자기 병을 앓기 시작했으며, 무당을 통해 탁리와 사비의 혼백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렸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병이 나았다. 이듬해인 서기 원년 1월에는 태자 도절이 죽었다. 도절의 죽음은 탁리, 사비의 죽음과 어느정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편집] 민심의 이반과 위나암 천도
교시사건으로 탁리와 사비가 죽고 다시 태자마저 죽자, 민심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유리명왕은 이 같은 난국을 타개하면서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천도를 결심했다. 그것을 위해 다시 한번 제사에 쓰일 돼지를 이용하였다.
서기 원년 3월, 유리명왕은 제사에 쓰일 돼지를 놓아주고, 측근인 설지로 하여금 뒤를 쫓게 하였는데, 이는 겉으로는 돼지를 잡아오는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새 수도를 탐색하려는 목적이었다.
얼마 뒤 설지는 왕궁으로 돌아와 위나암이 새 수도로서 알맞은 조건을 갖추었다고 보고했다. 설지의 보고를 받은 유리명왕은 그해 9월에 몸소 위나암에 가서 지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위나암에 성을 쌓게 하고, 서기 3년 10월에 위나암으로 수도를 옮겼다. 유리명왕은 위나암으로의 천도를 통하여 동부여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한편 정권 장악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위나암으로 천도한 후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유리명왕은 그후 오랜만에 사생활을 마음껏 즐기고자 사냥을 하러 다니면서 나랏일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이에 개국공신인 대보, 협보 등이 유리명왕에게 사냥을 그만두고 새 수도를 안정시키라고 간언하였다. 그러나 유리명왕은 그들의 말을 듣기는커녕, 오히려 협보를 파면하여 관가의 농원을 관리하게 하였다. 선왕의 동료이자 개국공신인 자신에 대한 처사에 분을 삭이지 못한 협보는 고구려를 떠나 남하하여 다파라국을 세운다.
[편집] 해명 태자의 죽음
한편 맏아들 도절이 죽은 후 자연히 둘째 아들 해명이 태자에 책봉되었는데, 그는 천도 이후에도 졸본성에 남아 그곳의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에 주력하였다. 그가 힘이 세고 용감하다는 소문을 전해들은 고구려의 속국인 황룡국의 왕은 그를 시험해 보려고 해명태자에게 사신을 보내 단단한 활을 하나 선물하였다. 그러자 해명태자는 그 사신 앞에서 활을 힘껏 당겨 부러뜨리면서 “내가 힘이 센 것이 아니라 활이 강하지 못하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위나암성에 알려지자 유리명왕은 몹시 분개하며 자기의 힘을 자랑한 해명이 필시 그 힘을 믿고 반역을 도모할 것이라 판단하고 해명을 죽이고자 하였다. 해명을 죽이라는 부탁을 받고 황룡국의 왕은 해명을 본국으로 초청하였다. 해명은 측근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황룡국의 왕을 찾아갔다. 그러한 해명의 기개에 감복한 왕은 그를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다.
황룡국의 왕이 해명을 살려보내자 유리명왕은 서기 9년 3월에 졸본으로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칼을 내주고 자결할 것을 명했다. 이에 해명은 순순히 복종하여 자결하였고, 이로써 유리명왕은 자신의 아들을 둘씩이나 죽인 잔혹한 왕이라는 오명을 받게 되어 백성들의 원성을 듣게 된다.
[편집] 말년
이같은 고구려의 어려운 사정을 전해 들은 동부여는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동부여를 섬기지 않을 경우 침공하겠다고 위해를 가했다. 이에 유리명왕은 앞으로 동부여를 섬길 것을 맹세하겠노라며 대소왕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런데 그 무렵 동부여에서 대소왕과 그의 여섯 형제 사이에 갈등이 벌어져 내분이 일어난다. 그 덕분에 고구려는 전열을 가다듬고 동부여의 침공에 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서기 12년 중국 대륙의 내분을 틈타 동호와 흉노가 대거 남하하고, 요서의 맥족이 대거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당황한 한나라는 고구려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고구려가 거절하자,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되려 고구려의 반격으로 한나라의 군대는 참패하고 말았다. 한나라는 고구려를 다시 침공해 지난 전투의 복수를 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고구려가 한나라에 대해 대대적인 반격을 실시하였으며, 이 틈을 노리고 동부여가 고구려를 침공해왔다. 하지만 동부여군은 유리의 셋째 아들 무휼이 지휘하던 수비군의 전략에 말려들어 전멸하였다. 무휼은 14년에 태자로 책봉된다.
서기 14년 8월 유리명왕은 오이와 마리에게 군사 2만 명을 내주어 고구려 서쪽의 양맥을 공격하게 하여 아우르고, 다시 진군하여 한나라의 동방정책을 담당하던 요서의 전초기지인 고구려현을 점거하여 한나라의 동방정책을 무력화하는 성과를 올렸다.
서기 18년 4월에 유리명왕의 넷째 아들인 여진이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유리명왕은 크게 슬퍼하다가, 7월에는 몸이 허약해져 두곡으로 가서 휴양을 하였다. 그러나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서거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57살(혹은 56살)이었다.
[편집] 가족 관계
- 왕후 송씨(松氏) : 다물(多勿)의 후(侯) 송양(松讓)의 딸이다. 기원전 17년 10월에 사망하였다.
- 왕후 송씨가 기원전 17년에 사망하였으므로, 아래의 아들들은 또다른 송씨부인으로부터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 해명(解明. 기원전 12년 ~ 서기 9년 : 도절이 죽은 후, 4년 봄 2월에 태자로 봉해졌다. 당시 유리명왕은 수도를 졸본에서 위나암으로 옮기는데, 해명은 졸본에 남아 나머지 백성들을 위무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후 8년에 황룡국 왕이 해명에게 선물로 활을 바쳤는데, 해명은 이를 사신이 보는 앞에서 부러뜨리며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이러한 해명의 행동에 위협을 느낀 유리명왕은 황룡국 왕에게 밀서를 보내 해명을 살해하도록 지시하였고, 이 사실을 알게 된 해명은 여진의 동원 벌판에 창을 꽂아 놓고 말을 달려 그 창에 찔려 자살하였다.(9년)(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의 기록).
- 무휼(武恤. 4년 ~ 44년) : 14년에 태자로 삼았고[1], 18년에 대무신왕이 되었다.
- 여진(如津. ? ~ 18년) : 18년 여름 4월, 물에 빠져 죽었다.[2] 여진의 죽음에 유리명왕은 크게 슬퍼하여 시체를 찾게 되었고, 시체를 찾은 사람에게 금 10근과 밭 10경을 상으로 내렸다.
- 해색주(解色朱 또는 解邑朱. ? ~ 48년) : 44년에 민중왕이 되었다.
- 화희(禾姬) 와 치희(雉姬) : 기원전 17년에 맞아들인 후궁들로, 화희는 지역 유지의 딸이었으며, 치희는 한나라 출신의 여자였다. 화희가 치희를 천하게 여겨 자주 다투자, 치희는 수치심을 느껴 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치희를 되찾기 위해 유리명왕이 따라갔으나, 치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허탈한 마음에 유리명왕이 나무 밑에서 쉬다가 꾀꼬리가 노니는 모습을 보며 지었다는 노래가 바로 '황조가'이다.
[편집] 참고
[편집] 주석
앞선 왕 동명성왕 |
제 2 대 기원전 19년~서기 18년 |
다음 왕 대무신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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