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동명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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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東明聖王, 기원전 58년~기원전 19년)은 고구려의 개국 시조이자 초대 왕(재위 기원전 37년 ~ 기원전 19년)이다. 성은 고(高)씨이며, 원래 성은 해(解)이다. 휘는 추모(鄒牟), 중해(衆解), 상해(象解), 도모(都慕), 주몽(朱蒙)이라고 한다. 동명왕(東明王)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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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탄생 설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동명성왕의 탄생 설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동부여의 왕 금와왕이 우발수(優渤水)로 나들이를 갔다가 유화(柳花)라는 여인을 만난다. 그녀는 강을 다스리는 신 하백(河伯)의 딸이었지만, 부모의 허락 없이 결혼한 죄로 그만 쫓겨났다. 게다가 유화의 남편인 태양신 해모수(解慕漱)는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이를 불쌍히 여긴 금와왕은 유화를 궁궐로 데려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녀에게 햇빛이 계속해서 비치더니, 유화는 아이를 갖는다. 하지만 유화가 낳은 것은 아이가 아니라 커다란 알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금와왕은 불길한 징조라 하여 유화에게 알을 빼앗아 돼지우리에 던져 버렸다. 그러나 돼지들은 이 알을 먹지 않았다. 그 뒤 소와 말이 짓밟도록 알을 길가에 버리기도 하고, 새들이 쪼아 먹도록 들판에 놓아 두기도 했다. 하지만 소와 말은 알을 피해 갔고, 새들은 오히려 알을 품어 주었다. 그래서 도끼로 내리쳐보기도 했지만 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금와왕은 하는 수 없이 유화에게 알을 돌려주었다.
유화는 그 알을 따뜻하게 덮어주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아이 하나가 알을 깨고 나왔다. 그 아이는 날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달라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이에 이 아이의 이름을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인 “주몽”이라고 지었다. 주몽은 대소 왕자 등 금와왕의 7명의 아들보다 능력이 출중하여 그들의 시기를 받았고, 호시탐탐 그를 죽이려 하였다.
대소가 주몽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유화는 주몽에게 동부여를 떠나라고 충고하였다. 어머니의 충고에 따라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 등 세 친구와 함께 동부여를 떠나 추격자들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 엄수(淹水) 기슭에 이르렀다. 자신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엄수를 향해 주몽은 “나는 태양의 신의 아들이며, 강의 신의 외손자다. 지금 나를 쫓는 자가 뒤를 따르니 그 위험이 급한 데 강을 건널 수 없으니 도와 달라.”라고 하니, 곧 자라와 물고기가 물 위로 떠올라 띠를 이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주몽이 무사히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돌아가 버렸고, 추격자들은 강을 건너지 못해 더이상 쫓아오지 못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해모수를 아버지로 하는 해부루와 고주몽은 배다른 형제로 해석할 수 있는데 주몽은 연대상으로 해부루의 손자뻘에 해당된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주몽의 생부는 해모수가 아니라 해모수의 4대손에 해당되는 고모수 또는 불리지라고 한다.
[편집] 고구려의 건국과 발전
기원전 37년, 주몽은 졸본(卒本)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고구려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주몽은 졸본부여의 유력자였던 연타취발의 딸 소서노와 결혼한다. 그리고 국가의 위상을 일신하기 위해 대대적인 영토확장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1] 주몽은 영토확장을 위해서는 우선 변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변방에 살고 있던 말갈족의 부락을 평정하여 말갈족이 더이상 국경을 넘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비류수 상류에 있던 비류국(沸流國)의 왕 송양(松讓)에게 활쏘기 경쟁으로 이겨서 항복을 받아내어 ‘옛 땅을 회복했다.’라는 뜻의 고구려말인 다물(多勿)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도주로 삼았다.
비류국을 정복한 주몽은 기원전 34년 마침내 졸본성을 완성하여 나라의 위상을 한층 높였다. 기원전 32년에는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를 보내 태백산 동남쪽에 있던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하였으며, 기원전 28년에는 부위염을 보내 북옥저를 정복하였다.
기원전 24년 가을 8월에 동부여에 남아있던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죽었다. 이때 금와왕이 그녀를 태후의 의례로써 장사지내고 신묘를 세웠다. 이에 주몽은 동부여에 사신을 보내 자신의 어머니 장례를 성대하게 치루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토산물을 보냈다. 하지만 금와왕이 죽고 그의 맏아들 대소가 왕위에 오르면서(기원전 19년 전후) 고구려와 동부여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된다.
기원전 19년 여름 4월에 주몽의 아들 유리가 동부여에서 어머니와 함께 도망쳐 돌아오자 주몽은 기뻐하며 그를 왕태자로 삼았으며,[2] 그 후 5개월 뒤에 40살의 나이에 서거하였다.[3]
능은 졸본 근처의 용산에 마련되었으며, 묘호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하였다.
[편집] 가족 관계
[편집] 주몽을 둘러싼 논쟁
[편집] 탄생년도
《삼국사기》는 주몽의 탄생 연도를 기원전 58년으로, 《삼국유사》는 기원전 48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건국이 기원전 37년인 것을 볼 때, 삼국사기의 기록이 좀더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편집] 졸본부여와 고구려
《삼국사기》는 주몽의 건국 이야기와 더불어 주몽이 졸본부여의 공주와 결혼한 후, 졸본부여의 왕위를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고구려본기')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서는 백제의 건국 이야기를 이야기하면서, 주몽이 결혼한 사람이 바로 소서노임을 밝히고 있다. 소서노는 졸본 사람 연타취발의 딸이며,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의 아내였다. 그러나 우태가 죽은 후, 29세의 나이로 다시 주몽과 혼인하였다.
일부 중국 사학자들과 북한 사학자들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보장왕 대의 기사(27년 2월 : "고씨는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세운 지 이제 900년이 된다.")를 내세워 고구려의 건국시기를 기원전 200년경으로 추정한다.[5]
위와 같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주몽은 동부여에서 도망친 후, 졸본부여의 귀족인 연타취발과 혼인관계를 맺은 후, 졸본부여의 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원전 200년경에 고구려가 건국되었다는 어떠한 사료도 없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900년 역사'라는 보장왕 대의 기사는, 주몽 이전의 졸본부여의 역사를 합친 것으로 판단된다.
[편집] 주석
- ↑ 기원전 37년~:《삼국사기》(신라본기 제1권, 二十一年...이하) 참조.
- ↑ 十九年 夏四月 王子類利自扶餘與其母逃歸 王喜之 立爲太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권13.
- ↑ 秋九月 王升遐 時年四十歲 葬龍山 號東明聖王,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권13.
- ↑ 백제 온조왕의 어머니가 기원전 6년에 61세로 죽었다는 《삼국사기》백제본기의 기록이 있다
- ↑ 고구려는 언제 건국되었을까?, 《오마이뉴스》
[편집] 드라마
[편집] 참고
앞선 왕 없음 |
제 1 대 기원전 37년~기원전 19년 |
다음 왕 유리명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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