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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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한자: 鄕歌, 문화어: 사뇌가)는 향찰로 쓴 노래로서 보통 신라 때부터 고려 초기까지의 것을 말한다.
향가는 4구체, 8구체, 10구체로 나누어지며, 한자로 지은 노래도 있고, 이두로 지어진 노래도 있다. 삼국시대 때는 4구체 향가가 많았으나, 남북국시대 전기와 고려 초기로 가면서 8구체와 10구체 향가들이 다양하게 지어졌다.
향가는 장르가 다양하며, 노동요나 민요로 추측되는 풍요, 귀신이나 액운을 막기 위해 부르기도 하며, 또는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고 싶어하거나, 사랑을 고백하는 노래들도 있다.
한국 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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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편집] 오늘날 남아 있는 향가들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가 남아있다.
[편집] 삼국유사에 실린 향가들
삼국유사에 실린 향가들은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불교에 관련된 설화를 수집하고 기록한 여러 편에 실려 있다. 모두 배경설화가 있다.
[편집] 도솔가
삼국유사 권5에 월명사가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760년에 이 노래를 지었다.
[편집] 안민가
삼국유사 권2 '경덕왕, 충담스님, 표훈대덕 편'에 실려 있다. 경덕왕이 충담스님에게 '나를 위하여 편안하게 다스리도록 하는 노래를 지으라'고 명령을 내려서 지은 노래이다.
[편집] 제망매가
제망매가(祭亡妹歌)는 신라의 승려 월명사가 지은 것으로, 삼국유사 권5 '월명사 도솔가조(月明師兜率歌條)'에 '월명이 죽은 누이를 위하여 부처에게 공양하는 재를 올리고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편집] 처용가
삼국유사 기이편 '처용랑과 망해사(處容郞望海寺)' 조에 수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란 인물이 지었다고 하며 역신이 그의 아내를 흠모하여 동침하고 같이 잠자리에 있는 것을 돌아와서 보고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러자 역신은 처용이 노하지 않은 것에 감동하여 그 앞에 나타나 꿇어앉았다고 한다. 그 후로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역신을 쫓았다고 한다.
고려 가요 중에도 처용가가 악학궤범에 전해 후에 향가 해독에 도움을 주었다.
처용가(處容歌)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兮隱吾下於叱古
二兮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서울 밝은 달밤에
밤 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아내)이다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편집] 우적가
삼국유사의 권5 '도적을 만나다'에 이 노래를 짓게된 이유 등이 실려 있으며, 이 노래의 내용을 칭송하여 지은 한시 한편이 있다. 8세기 중엽에 지어진 노래이다.
[편집] 헌화가
삼국유사에는 '소를 끌고 가던 늙은이가 수로부인에게 꽃을 꺾어다 드릴 때에 부른 노래'라 하여 '노인헌화가'라고 하였으니 이 것을 헌화가라고 부른다고 한다. 신라 성덕왕 때에 지어졌다.
'수로(水路)부인'이 한국어로 지은 이름을 한자로 뜻을 옮겨 만든 것인지, 바다를 끼고 곧 물건을 따라가는 부인이라는 뜻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편집] 원왕생가
삼국유사에도 이 노래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으나 노래의 원문에 '願往生' 이란 말이 겹쳐서 나와서 불교에서는 이를 '극락에 가고싶다' 라는 말로 풀이해 북조선에서는 '극락노래'라고 한다. '일찍이 노래가 있었다'는 기록이 기록되어 있으며, 문무왕 때에 지었다고 추측한다.
[편집] 서동요
서동요에 관한 설화 나오는 향가로, 설화에는 서동이 선화공주와 인연을 맺기 위해 일부러 퍼뜨린 노래라고 나와있다.
[편집] 모죽지랑가
신라 효소왕 때에 만들어진 향가이며, 노래의 주인공은 화랑 죽지랑이므로 노래의 이름이 모죽지랑가이다.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향가들이 있다.
- 풍요
- 혜성가
- 찬기파랑가
- 도천수관음가
- 원가
[편집] 균여전에 실린 향가들
[편집] 보현십원가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는 고려초 균여대사(923-973)가 지은 11수의 십구체 향가다. 균여대사가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화엄경의 보현보살 열 가지 행원에다 낱낱이 향가 한수씩을 짓고, 11장은 그 결론으로 된 사뇌가이다. 고려 제4대 광종 연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글은 해인사 장경판으로 전하는 《균여전》에 향찰로 기록되어 있다
[편집] 향가의 풀이
향가를 풀이하는 데에 노력한 학자로는 오구라 신페이, 양주동과 지헌영, 김선기, 서재극, 그리고 홍기문, 정렬모, 김완진을 손꼽을 수 있다. 현재 김완진의 해석이 가장 설득력이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편집] 그 밖의 향가
화랑세기 6세 세종 장에 미실이 사다함이 출정할 때 지었다는 풍랑가가 기록되어 있다. 진위에 대해 논란이 많다.
고려 예종이 지은 도이장가(悼二將歌)를 향가로 보는 이도 있다.
[편집] 참고 문헌
- 《향가연구》, 류렬, 박이정,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