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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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동(梁柱東, 1903년 3월 24일 ~ 1977년 2월 4일)은 한국과 대한민국의 국문학·영문학자이다. 호는 무애(无涯)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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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개성에서 태어나 장연에서 자랐다.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1923년에 동인지 《금성》(金星)으로 등장하여, 1930년에는 시집 《조선의 맥박》을 펴내기도 했다. 1919년에 염상섭과 함께 발간한 《문예공론》의 평론은 이른바 절충론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후에 향가 해독에 몰입하면서, 고 시가 해석에 힘을 쏟았다. 특히 1942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향가 25수 전편에 대한 해독집인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를 펴냈다. 이어 1947년에는 《여요전주》(麗謠箋注)를 통하여 고려가요에 대한 주석을 집대성하였다.
1947년에 동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1954년부터는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편집] 기타
- 1950년 2월에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 1950년 12월에 국가보안법 제정에 따라 북조선 부역자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본부가 구성되자, 부역행위에 대해 자수한 바 있다[1]. 보도연맹에 가입된 것[2]은 이 즈음으로 보인다.
- 양주동은 1950년대 이후 자신을 가리켜 ‘국보 1호’라고 칭하고 다녔으며, 이와 관련된 다양한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 10살 연하였던 탄허에게 오대산에서 1주일간 장자 강의를 들은 뒤에는, 탄허에게 오체투지로 절을 했다고 한다. 이후 양주동은 탄허를 가리켜 “장자가 다시 돌아와 제 책을 설해도 오대산 탄허를 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 바 있다.[3]
- 양주동은 자신의 글 ‘연북록’(硏北錄)에서 “어려서부터 평소의 야망은 오로지 ‘불후(不朽)의 문장’에 있었으매, 시인 비평가 사상인(思想人)이 될지언정 ‘학자’가 되리란 생각은 별로 없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4]
- 양주동은 자신의 글 ‘한자 문제’에서 “아닌게아니라, 내 글에는 한자어가 많고 벽자(僻字)조차 수두룩함이 사실이다. 어려서 한학 공부를 했기 때문에 일상 용어에 한자어를 남보다 더 많이 쓰는 버릇이 있으니, 문장이 또 그럴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4]
- 양주동은 3인칭 대명사로 남자는 ‘그놈’ 여자는 ‘그년’이라 쓰자고 제안한 일이 있다고 한다.[5]
[편집] 주석
- ↑ 부역행위 자수자 증가, 서울신문, 1950년 12월 11일.
- ↑ 법에도 없는 학살지령 - 무법천지의 친일파 세상은 이랬다, 한상범, 데일리서프라이즈, 2005년 5월 24일.
- ↑ 오대산 탄허선사, 조연현, 한겨레, 2005년 5월 31일.
- ↑ 4.0 4.1 말들의 풍경 <29> 戱文의 우아함, 고종석, 한국일보, 2006년 9월 19일.
- ↑ 우리말과 2인칭 호칭, 신기영, 대전일보, 2006년 10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