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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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2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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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위 | |
1740년 ~ 1786년 | |
성 명 | {{{성명}}} |
별 명 | 프리드리히 대왕 |
왕 비 |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
황 후 | {{{황후}}} |
왕 후 | {{{왕후}}} |
부 군 | {{{부군}}} |
왕 가 | 호엔촐레른 |
황 가 | {{{황가}}} |
부 왕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
부 황 | {{{부황}}} |
부 친 | {{{부친}}} |
모 비 | 조피 도로테아 |
모 후 | {{{모후}}} |
모 친 | {{{모친}}} |
앞선 왕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
앞선 황제 | {{{이전 황제}}} |
앞선 천황 | {{{이전 천황}}} |
다음 왕 |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
다음 황제 | {{{다음 황제}}} |
다음 천황 | {{{다음 천황}}} |
프로이센의 왕 |
프리드리히 2세(독일어: Friedrich II, 1712년 1월 24일 - 1786년 8월 17일)는 제3대 프로이센 국왕이다(재위 : 1740년 5월 31일 - 1786년 8월 17일).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합리적인 국가경영을 발휘해 프로이센을 당시 유럽 최강의 군사대국으로 성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플룻 연주 등 예술적 재능까지 겸비하고 있었기에 계몽전제군주의 전형으로 여겨진다. 그 공적을 치하하기 위해 후세에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ße)으로 불리게 된다.
[편집] 생애
[편집] 즉위 이전
프리드리히 2세는 1712년 1월 24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조피 도로테아 폰 하노버 사이의 세 번째 자식이며 생존한 아들 가운데 장남이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군인왕이라는 별칭이 붙을 만큼 독선적인 성격의 군국주의자였던 데 반해 조지 1세의 딸이었던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는 세련된 궁정인이었다. 그런 연유로 두 사람은 정 반대의 교육방침으로 대립하였으며, 이는 어린 프리드리히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부왕은 아들 프리드리히를 가르치면서 오페라나 희극 같이 쾌락이나 즐거움을 주는 예술이나 학문 등을 즐기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그러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스파르타식 교육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로서 북에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온다. 어느날 프리드리히가 북을 두드리며 놀자 시끄러운 것에 대해 참다못한 누이 빌헬미나가 “그렇게 시끄러운 건 그만 가지고 놀고, 꽃을 갖고 노는 게 어떻겠니?” 라고 묻자 프리드리히는 “꽃같은 걸 갖고 노는 것보다, 북 치는 게 훨씬 도움이 되는 걸!” 이라고 말한 것을 들은 부왕은 즉시 북을 치는 왕자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디 예술가 기질이 타고났던 프리드리히는 어머니를 닮아 음악을 좋아했으며 플루티스트인 요한 요아힘 콴츠로부터 플룻 연주를 지도받아 자주 연주회를 열곤 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이러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노여워하며 공개된 장소에서도 회초리와 몽둥이로 아들을 두들겨 때렸다고 한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이러한 학대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는 그저 묵묵히 인내하며 성장하였다. 그러다 사촌인 영국의 아멜리아 공주와의 혼담을 기회로 결국 가출을 도모하게 된다. 그는 육군중위 한스 헤어만 폰 카테와 페터 카를 크리스토프 폰 카이스의 도움을 받아 1730년 8월 5일 이른 아침, 여행지 숙소를 빠져 나왔지만 계획이 탄로나 국외탈주 혐의로 체포되어 실패하고 만다.
이 소식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까지 알려지고 프리드리히는 결국 사회적 지위와 시민권을 박탈당한 채 교도소에 투옥되었다. 당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암살 공포 같은 정신적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군법회의의 판결을 무시한 채 프리드리히를 처형하려고까지 하였다. 카이스 소위는 이미 영국으로 도망갔지만 카테 중위는 붙잡혀 본보기로 프리드리히가 보는 앞에서 참수당했다. 프리드리히는 그 모습을 볼 것을 강요당했지만 끝까지 보지 못한 채 실신하였다.
수주일 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아들로부터 용서해 줄 것을 청원하는 편지를 받고 그를 석방시켜 기존의 지위를 복권시켰다. 1733년 6월 12일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오스트리아의 원수인 브라운슈바이크-베버른 공 페르디난트 알베르트 2세의 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 결혼했다.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용모도 아름답고, 신앙심도 투철하고, 남편에게 사랑받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한 성실한 아내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 다정한 생활은 전혀 없었다. 나중에 7년 전쟁이 끝났을 때 수년만에 만난 아내를 보고선 “조금 살찐 것 같다.” 라는 말 한마디 뿐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으며, 프리드리히 2세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의 조카가 된다. 그럼에도 그녀는 남편을 존경하였으며 서신 왕래는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 무렵에 그는 부임처인 베를린 부근의 라인스베르크 궁전에 머물면서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결혼을 한 대가로 얻은 자유를 마음껏 즐겼다. 부왕의 뜻에 따라 고된 군사훈련을 보면서도 여가에는 화가, 작가, 음악가를 초빙해 친분을 쌓았으며, 서간집 등 저술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특히 마키아벨리가 제시한 권모술수를 지향하는 르네상스적인 군주상에 반대 의견을 내세운 《반(反)마키아벨리론》은 볼테르의 손을 거쳐 네덜란드에서 익명으로 출판되어 수개 국어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즉위 후 프리드리히 2세가 펼친 정책은 기존에 그의 주장과는 상반되는 것이어서 볼테르에게도 비난받게 된다.
[편집] 즉위 이후
1740년 5월 31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세상을 떠나자 프리드리히가 새 왕으로 즉위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즉위하자마자 즉시 계몽주의적인 개혁정책에 돌입했다. 고문 폐지, 언론 검열 폐지, 종교적 차별금지, 오페라 극장 건설, 빈민구제, 거인 연대 폐지 등이 실행되었다. 선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통치 아래 폐업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던 베를린 아카테미를 부흥시켜 과거에 추방되었던 학자들을 다시 불러들임으로써, 베를린은 ‘북방의 아테네’로 칭송받게 되었다.
한편, 프리드리히 2세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8만 명의 상비군을 더욱 증원시켜 차후에 있을 전쟁에 대비하였다.
1740년 12월 16일,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6세의 죽음을 틈타 프리드리히 2세가 이끈 4만 명의 프로이센군이 합스부르크 왕가 영지인 슐레지엔으로 진격하여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발발한다. 카를 6세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죽자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제국의 모든 영토와 권리를 상속받은 것에 대해 반발한 것이었다. 이날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새로운 당주로 등극한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리드리히 2세는 일생일대의 숙적이 된다. 1745년 12월 24일 드레스덴 조약을 체결하여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대공위를 받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를 상속받는 걸 인정하는 조건으로 슐레지엔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고 100만 타라의 배상금을 얻어냈다.
전후,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의 부흥을 위해 온힘을 다했다. 세세한 일까지 자신이 직접 확인하였으며, 산업 진흥과 이민자 수용 등을 통해 프로이센은 다시 국력을 키워갔다. 그러나 오랜 격무 탓에 프리드리히 2세의 건강은 갈수록 나빠졌다.
평화로운 날은 오래 가지 못했다. 1755년 후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러시아의 옐리자베타와 루이 15세의 애첩인 퐁파두르 후작 부인과 결탁하여 슐레지엔 탈환을 노리고 있었다. 1756년 8월 29일, 프리드리히 2세는 비난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선제공격을 감행, 7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작센 공국을 침공하였다. 7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 세 나라에 작센 외에도 스웨덴과 독일의 다른 제후들도 가세하면서 수적으로 열세였던 프로이센으로서는 매우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간 프로이센은 전쟁 때마다 승리를 거둔 무적으로 평가받고 있었지만, 1757년 6월 18일에 쾰른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 대패한 후에는 수세로 변하였다. 1759년 8월 12일의 크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는 프리드리히 2세가 적에게 노출되어 총을 맞아 윗도리가 뚫렸으며 타고있던 말은 고꾸라졌다. 패주한 프리드리히 2세는 잔존 병력을 정리해 어떻게든 상황을 역전시키려고 하였지만 괴로운 싸움은 계속되어 1760년 10월에는 오스트리아군이 베를린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의 침략을 받은 영국이 프로이센으로의 원조를 중단하자 프리드리히 2세는 자살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때 그가 쓴 편지에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아군은 계속해서 패주하고 있다. 나는 더이상 프로이센군의 지휘자가 아니다. 모든 게 다 사라졌다. 나는 조국의 몰락을 보지 않은 채 죽을 것이다. 그럼 안녕히.’ 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1762년 1월 5일, 옐리자베타 여제가 급사하고 표트르 3세가 러시아의 새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는 프리드리히의 열렬한 숭배자였기 때문에 프로이센과 러시아 사이에 기적적으로 강화가 성립했다. 게다가 스웨덴 역시 프리드리히 2세의 누이인 스웨덴 왕비의 중재를 통해 같은해 5월에 강화가 맺어졌다. 이를 계기로 긴 전쟁으로 지쳐가던 열강은 차례로 군사를 철수시켰다. 프리드리히 2세는 고립된 오스트리아에 일격을 가해 승리를 거두어 마침내 1763년 2월 10일 두 나라 사이에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권이 확정되었다. 이 전쟁이 있은 후, 프리드리히 2세는 더이상 큰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1772년의 제1차 폴란드 분할에 참가해 서프로이센을 차지해 영토를 한층 더 넓혔으며 1778년부터 1779년까지 계속된 바이에른 왕위계승전쟁에서는 오스트리아와 다시 교전하였다. 또한, 외교면에서는 특히 오스트리아의 부흥을 매우 경계하여 작센 등과 동맹을 결성해 대항했다. 프랑스와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에도 노력하였으며, 다시 7년 전쟁의 고립에 빠지기 않기 위해 세심히 주의를 기울였다.
평화가 다시 찾아온 후 프리드리히 2세는 포츠담 교외에 지은 여름 별궁인 상수시 궁전에 기거하며 안락한 생활을 만끽하였다. 이후 그는 바쁜 정무 와중에도 틈틈히 시간을 내어 서신 왕래나 플룻 연주, 저술활동을 즐기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나 만년의 프리드리히 2세는 그의 가족이나 친구가 모두 죽자 점차 고독하고 다른 사람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오직 애견 그레이하운드들만이 그의 위로대상이었다. 그 때문에 원체 허약했던 몸이 한층 더 악화되어 심장 발작이나 호흡 곤란에 시달리면서 하루의 대부분을 의자에 앉아 보냈다. 그는 마지막 소원이라면서 애견들 곁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2세는 1786년 8월 17일 상수시 궁전에서 죽어 시신은 포츠담 교회의 왕실 납골당에 안장되었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의 시신이 여기저기를 전전하였으나, 독일 통일 후인 1991년에 상수시 궁전의 마당에 옮겨져 지금은 그의 유언에 따라 개들과 함께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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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
프로이센의 군주 1740년 - 178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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