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타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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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타르 1세는 세르비아의 국왕이며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의 왕이다. 카라됴르뎨비치(Карађорђевић, Karađorđević) 가(家)에 속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알렉산다르 카라됴르뎨비치(Aleksandar Karađorđević, Александар Карађорђевић)인데 1842년부터 1858년까지 세르비아의 공(公)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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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역사
[편집] 알렉산다르 국왕 암살 사건
1889년에 즉위한 알렉산다르 1세(Alexander Obrenović, Александар Обреновић)는 아버지인 밀란 1세(Милан Обреновић, Milan Obrenović)가 퇴위한 후에 즉위한 사람이다. 밀란 1세는 퇴위 이후 1901년에 죽을 때 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인 빈(Wien)에서 살았다. 밀란 1세는 진보적인 인사들과 쉽게 친했으며, 그들의 정책을 국가의 발전으로 생각하면서 받아들였다. 밀란 1세 자신이 진보적인 인사였다. 그리고 급진당이 1888년에 왕권을 그대로 두는 상태에서 입헌 군주제를 추진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밀란은 곧바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가 퇴위한 이후 모든 것이 달라져버렸다.
알렉산다르 국왕은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인 밀란 국왕 역시 돈을 많이 썼지만, 밀란의 경우는 나세르 앗딘 샤의 경우처럼 국가의 발전을 위해 투자했다. 알렉산다르는 반대였다.
알렉산다르는 자신이 스깬덜(Scandal의 미국식 발음임!)이었으므로, 역시 스깬덜과 친할 수 밖에 없었다. 밀란도 퇴위하기 전에는 알렉산다르에게 스깬덜과 친하게 지내지 못하게 경고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다르는 이미 향락에 젖었기 때문에 세르비아 국민들에게 원성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일부는 '알렉산다르 때문에 왕실의 체면이 구겨졌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헌법을 파기하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반동 정치 뿐만이 아니었다. 경제력을 아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떠맡기기까지 하였다. 그 때문에 국민 소득은 더더욱 줄어들었고, 기근으로 죽은 자도 많은데 정작 알렉산다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알렉산다르는 1903년 6월 어느 날, 육군 대령인 드라구틴 드미트리예비치가 주도하는 쿠데타로 암살되었다. '천민(賤民)'에서 '귀족'으로 올라간 이후 영원히 행복하게 살 줄 알았던 오브레노비치 가문은 멸문(滅門)되었다. 사실 오브레노비치 가문과 카라됴르뎨비치 가문은 서로가 원수지간이었는데, 알렉산다르 왕의 죽음으로 인하여 카라됴르뎨비치는 드디어 정권을 쥐게 된 것이다.
[편집] 페타르의 즉위와 국가적인 발전
친오스트리아적이고 반동정책으로 민중의 원망을 사던 알렉산다르 왕과는 달리 페타르는 진보적인 정치가와 민족주의자들을 등용하여 민족주의를 일으켰고, 의회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그는 세르비아를 자급자족적인 국가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였으며,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우방으로 삼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자신의 적국인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었다는 이유로 세르비아에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페타르는 프랑스 군의 장교 생활을 하다 간 경험이 있어서 강국에 대해서도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민족주의자 중 한 명인 니콜라 파시치를 등용하여 대세르비아주의의 제창을 도왔다. 니콜라 파시치는 '세르비아인이 생활하는 모든 지역을 통일하여 카라됴르뎨비치 가문의 통치 아래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상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으로 국명이 바뀌었을 때 실현되었으며, 사회주의자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 정권도 받아들였다. 비록 1992년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독립하면서 와해되었지만 세르비아인에게는 희망을 안겨주기 충분했다.
페타르가 즉위한 이후, 세르비아는 경제력이 성장하였고 군사력도 증강되었다. 육군이나 1912년에 창설된 항공대(Srpska Avijatika. 1923년에 정식으로 공군이 창설된다)나 프랑스제 무기를 사용하였는데, 그가 친프랑스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1858년에 알렉산다르 카라됴르뎨비치가 퇴위한 이후, 45년간의 망명 생활이라는 절망스러운 시간조차도 절망하지 않은 페타르였다. 성격이 당당했던 그는 경제학과 정치학을 배웠으며 생시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보불전쟁에서는 육군 중위로 복무한 사람이다. 사병을 잘 지휘하였다는 사실이 프랑스군 당국에도 알려져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받은 사람이다. 세르비아가 비록 적대적인 오브레노비치 가문이 통치하고 있다지만 애국심이 남달랐던 그는 독립을 지원했다. 그 공로로 몬테네그로의 상원의원으로 지낸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편집] 전쟁
[편집] 발칸 전쟁
[편집] 제1차 세계대전
[편집] 그 이후
세르비아가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된 이후, 그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1929년에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개칭된다)의 왕이 되었으나 1921년에 별세했다. 후임으로 알렉산다르가 즉위하였다.
[편집] 바깥 고리
전 임 알렉산다르 1세 1889년~1903년 |
세르비아의 국왕 1903-1919 |
후 임 없음 |
전 임 없음 |
유고슬라비아의 국왕 1919-1921 |
후 임 알렉산다르 1세 1921년~1934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