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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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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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8월 3일 ~ | |
태어난 곳 | 일본 나고야 |
복무 | 일제 강점기,대한민국 |
복무 기간 | 1940년대 ~ 1960년 |
최종 계급 | 대한민국 육군 중장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태평양 전쟁,한국 전쟁 |
기타 이력 | 대한석유공사 사장 |
유재흥(劉載興, 1921년 8월 3일[1] ~ )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군인이다.
목차 |
[편집] 생애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나 다섯살 때 조선으로 돌아왔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55기로 졸업하였고,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에는 일본군 대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미군정 시기에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대한민국 국군 장교가 되었다. 제4여단장, 육군사관학교 부교장 등을 지냈고, 1949년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제주 4·3 사건에 관여했다.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제7사단장으로서 참전하였으나, 이후 제2군단장이 되었다. 덕천 전투에서 중국군 38군과 42군에 포위되어 제2군단을 해체 하였으며, 현리 전투에서도 제3군단을 해체[2]하는 등 한국 전쟁에서 지휘한 전투마다 패전한 경우가 많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제2군단장으로 낙동강 방어전에서 일어난 영천 탈환전과 이후 한국 전쟁 후반부의 수도고지 전투의 공로는 객관적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현리 전투 에 대해서도 미 7사단의 주요 요충지인 오마치 고개의 점령이 더 큰 면이 있다는 견해가 있어 야전사령관으로서의 유재흥의 능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 정군 대상으로 지목되어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그러나 5·16 군사 정변이 성공한 뒤 제3공화국에서 등용되어 타이, 스웨덴, 이탈리아 대사 및 대통령 특별보좌관, 국방부장관 등을 지냈다. 퇴임 후에는 1974년부터 대한석유공사 사장으로 6년간 재직했다.
한국 전쟁 때의 전공으로 1951년에 받은 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하여, 수교훈장 등 여러 차례 훈장을 수여받았다. 1990년대에 전직 장성 모임인 성우회의 부회장과 회장을 지냈으며, 전시작통권 회수 등의 국방 관련 현안에 대해 보수주의 세력과 정치적인 행보를 같이 했다.[3]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아버지 유승렬과 함께 선정되었다.
[편집] 학력
[편집] 약력
- 1945년 : 일본군 육군 대위
- 1953년 : 육군참모차장
- 1957년 : 합동참모본부 의장
- 1959년 : 군사령관
- 1960년 : 예편 (중장)
- 1960년 : 주 타이 대사
- 1963년 : 주 스웨덴 대사
- 1967년 : 주 이탈리아 대사
- 1970년 : 대통령 안보담당·국방담당 특별보좌관
- 1971년 : 국방부장관
- 1974년 : 대한석유공사 사장
- 1978년 : 석유화학공업협회 회장
- 1983년 : 한스칸디나비아재단 이사장
- 1991년 : 성우회 회장
[편집] 같이 보기
- 제주 4·3 사건
- 유승렬
[편집] 참고자료
[편집] 주석
- ↑ 유재흥. 엠파스 인물정보. 2008년 3월 31일에 읽어봄.
- ↑ 서경석. 전장감각 - 현리계곡의 소용돌이(3). 교수 서경석. 2004년 9월 24일에 읽어봄.
- ↑ "역대 국방장관들 `전시작통권 국회 동의 거쳐야`", 《중앙일보 (연합뉴스 인용)》, 2006년 8월 10일. 2008년 3월 31일에 읽어봄.
전 임 정일권 |
제3대 합참의장 1957년 5월 ~ 1959년 2월 |
후 임 백선엽 |
전 임 정래혁 |
제19대 국방부 장관 1971년 8월 25일 - 1973년 12월 3일 |
후 임 서종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