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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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辛酉迫害)는 1801년에 발생한 조선의 천주교회 박해 사건이다.
[편집] 박해의 원인
“정도(正道)인 유학은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소멸시킬 것”이라면서, 쳔주교에 대해서 온화한 정책을 써 오던 정조가 별세한 뒤, 순조가 11세로 왕위에 오르면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여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벽파가 정순왕후를 움직이면서 조선 천주교회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박해의 진짜 이유는 남인숙청이었다. 야당인 남인 중에서 천주교 신앙을 가진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순왕후 자신도 정조의 사도세자 사건 연루자 숙청으로 가문이 몰락하여 정조에 대해서 원한을 갖고 있었으므로, 천주교에 대한 강경책을 통해 정조의 온건정책을 부정하고자 하였다.[1]
[편집] 박해결과
이 사건으로 중국인 천주교 신부이자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주문모를 비롯하여 만천 이승훈, 정약종(다산 정약용의 형), 여성 평신도 지도자인 강완숙 등이 사형당했고, 한때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념의 차이로 멀리한[2]정약용 등은 귀양보내져 박해 피해자는 수백명에 달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오가작통법을 통해 다섯 집 중 한 집에서 천주교 신자가 적발되면 모두 처벌하는 가혹한 연좌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애꿏은 피해를 보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천주교 신도들은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 등의 계속된 박해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으로 신앙을 굳게 지켜나갔다.
한편 천주교 신자 황사영(黃嗣永)이 조선에서는 천주교를 정치적 숙청에 이용한다면서 신유박해의 실상과 대응방안을 적어 청국 베이징[北京]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던 밀서(密書)가 발각되었는데, 이를 황사영 백서 사건이라고 한다. 당시 황사영은 청나라의 무력을 빌어 조선의 종교적 자유를 얻고자 했기 때문에, 조선 천주교회는 박해를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