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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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丁若鏞, 1762년 경기도 광주~1836년)은 조선 정조 때의 문신으로, 정치가이자 철학자, 공학자이기도 했다. 본관은 나주, 호는 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자는 미용(美庸), 당호는 여유(與猶)이다.[1]
중농주의 실학자로 전제 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하였다. 문집으로 유배 생활 중 대부분이 저술된 《여유당전서》가 있다. 여유(與猶)는 “망설이면서(與),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 같이 주저하면서(猶)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라는 뜻이다.[2]
목차 |
[편집] 생애
[편집] 성장과 공직 생활
1762년 6월 16일에 경기도 광주의 마재(馬峴)에서 태어난 후 부친 정재원(丁載遠)에게서 학업하였다. 정재원은 첫 부인 의령 남씨와 사이에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부인 해남 윤씨와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 한 명을 낳았으니 약용은 넷째 아들이다.[3] 어릴 적에 천연두에 걸렸으나, 왕족 출신의 명의 이헌길의 진료로 살았다. 정약용은 훗날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바탕으로 한층 발전된 홍역 치료서 《마과회통》을 집필하고, 이것은 현대 의학이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조선의 생명들을 구한다.[4] 또한 정약용은 이헌길의 생애를 다룬 〈몽수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1776년에 풍산 홍씨와 혼인하였다. 누님의 남편으로 여섯 살 위인 이승훈, 큰형의 처남이며 여덟 살 위인 이벽과 친하게 지내면서 학문으로 명성이 높은 이가환을 만났다.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이었으며, 성호 이익(李瀷, 1629~1690)의 종손으로 당시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는 중심 인물이었다. 이들에게서 성호의 학문을 접하면서 실학 사상의 토대를 다졌다.[5]
1783년에 생원이 되고 1789년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 승정원의 가주서, 예문관검열, 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794년 10월에 경기도 암행어사로서 연천, 삭녕 등을 암행하고 이듬해 1799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자 천주교 신봉에 대한 소명 상소를 올리고 사퇴해야 했다. 그해 7월에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이어 병조참지, 좌부승지, 곡산부사 등을 지냈다. 1799년에 형조참의가 되었는데 곧 탄핵으로 사퇴하였다.
[편집] 천주교 박해 연루
1800년 천주교에 대해서 온건한 정책을 펴던 정조 임금[6]이 승하하자, 이듬해 정월 조선 천주교회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천주교 탄압령을 시작으로 신유박해라는 대박해를 받게 된다. 이는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남인을 제거하기 위한 노론의 정치적 공격으로, 이 박해에 정약용과 그의 두 형인 정약전(둘째 형), 정약종(셋째 형)도 연루되었다. 정약용과 그의 둘째 형 정약전은 정약종과는 달리 이미 천주교를 버린 뒤였으나,[7] 노론에서는 이미 이들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약종만 천주교 신자일 뿐, 정약전과 정약용은 천주교에 무관심한 비신자라는 점이 확인되면서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그리하여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되었으며, 정약종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처형되었다.[8]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의 이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저술 대부분이 이루어졌다.
1818년 8월에 귀양이 풀려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1836년 2월 22일에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편집] 저서
- 기타저서
- 《맹자요의》
- 《논어고금주》
- 《춘추고징》
- 《역학제언》
- 《상서지원록》
- 《주역심전》
- 《사례가식》
- 《상례사전》
- 《악서고존》
- 《상서고훈》
- 《매씨서평》
- 《모시강의》
- 《삼미자집》(三眉子集)[9]
[편집]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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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학
- 마현 다산마을
[편집] 주석
-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 노자가 지은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 ↑ 금장태 (2005년 7월 10일). 《실천적 이론가 정약용》. 경기도 파주: 이끌리오, 26쪽.
- ↑ 한국방송 한국사 傳, '홍역으로부터 조선을 구하다. 명의 이헌길', 2008년 2월 16일자 방영.
- ↑ 금장태 (2005년 7월 10일). 《실천적 이론가 정약용》. 경기도 파주: 이끌리오, 33쪽.
- ↑ 정조는 노론 진영에서 천주교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자, “사교(邪敎)는 자기자멸할 것이며, 정학(正學)의 진흥으로 막을 수 있다.”라는 논리로 이를 거부했다.
- ↑ 초기 조선교회의 양반 신자들은 교황청에서 백여 년의 신학 논쟁 끝에 조상 제사를 교리적 이유로 금지하자, 천주교 신앙을 버렸다.
- ↑ 《생활성서》2007년 8월호 '세 형제 이야기'/생활성서.
- ↑ 정약용이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았다가 나았는데, 그때 오른쪽 눈썹에 그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뉘어 삼미(三眉)라 불렸다. 이 《삼미자집》은 정약용이 10세 이전에 지은 글을 모은 문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