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e also ebooksgratis.com: no banners, no cookies, totally FREE.

CLASSICISTRANIERI HOME PAGE - YOUTUBE CHANNEL
Privacy Policy Cookie Policy Terms and Conditions
스탈린그라드 전투 - 위키백과

스탈린그라드 전투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소련 병사들이 잔해 속에서 나와 돌격하고 있다.
날짜 : 1942년 8월 21일 - 1943년 2월 2일
장소 : 소련, 볼고그라드
결과 : 독일 : 개전 이후 최대 피해
소련 : 결정적 승리이자 전쟁의 전환점
교전국
나치 독일의 국기 나치 독일
이탈리아
루마니아의 국기 루마니아
헝가리의 국기 헝가리
소비에트연방의 국기 소비에트연방
지휘관
파울루스
만슈타인
호트
추이코프
슈밀로프
로코소프스키
예료멘코
바투틴
말리노프스키
보로노프
병력
약 50만 명 + 지원군
독일 제6군
독일 제4기갑군
이탈리아 제8군
루마니아 제3군
루마니아 제4군
헝가리 제2군
약 170만 명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남서전선군
돈 전선군
피해 상황
74만 명 사상
9만 1천 명 포로
최소 75만 이상 사상
최소 4만의 민간인 사망

스탈린그라드 전투 (러시아어: Сталинградская битва, 독일어: Schlacht von Stalingrad)는 1942년 8월 21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스탈린그라드(현재 이름은 볼고그라드) 시내와 근방에서 소련군과 추축군간에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전투에서 약 200만 명이 사상하였으며 인간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이 전투는 독일 제6군과 다른 추축국 군대의 스탈린그라드 포위와 이후의 소련군의 반격으로 이루어져있다.

이 전투는 전쟁의 전환점이 된 것외에도, 때로는 강제적인 명령으로 유지되긴 했지만 독일군과 소련군 양쪽의 훈련도와 승리에 대한 의지가 명백히 드러났다. 소련군은 독일군의 맹공으로부터 스탈린그라드를 방어했다. 이 전투를 기점으로 소련군의 전투력이 대폭 향상되어 독일군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목차

[편집] 배경

[편집] 모스크바 공방전과 소강상태

1941년 6월 22일 독일군과 추축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소련을 침략했다. 1941년 여름과 가을에 극심한 타격을 입은 소련군은 12월의 모스크바 공방전을 기점으로 반격에 나섰다. 탈진하고 겨울장비가 부족한데다가 늘어진 보급로를 가졌던 독일군은 모스크바에 대한 진격을 정지할수밖에 없었다.

1942년 봄까지 독일군은 전선을 안정화시켰다. 중앙집단군의 손실이 컸기때문에 모스크바에 대한 재공격은 기각되었다. 독일군의 군사철학은 무방비한 곳을 공략하여 최대의 성과를 얻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모스크바에 대한 공격은 적에 의해 충분히 예상할수 있는 것이라고 봤다. 게다가 독일 육군최고사령부(OKH)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이 참전했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히틀러는 미국이 유럽전에 참전하기 전에 동부전선을 끝내거나 또는 최소하려고 했다. 그래서 코카서스의 대유전지대를 점령하여 소련군의 연료를 고갈시키고 부족한 독일군의 연료문제도 해결하며 최종적으로는 북아프리카에서 동진하는 에르빈 롬멜군과 중동에서 합류하려고 하였다.

[편집] 스탈린그라드의 중요성

러시아내전에서 스탈린은 백군의 공세로부터 짜리친(당시 스탈린그라드의 명칭) 방위에 큰 공훈을 세웠다. 후에 스탈린이 공업화를 밀어붙이면서 이곳은 각종 공장이 건설되어 급속도로 개발되었고, 자랑스럽게 자신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스탈린그라드의 이름은 1925년 그의 공산당 동료들이 스탈린에게 선물한 결과이다.

히틀러에게 있어 스탈린그라드 점령은 몇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이곳은 카스피 해와 북부 러시아를 잇는 수송로인 볼가 강의 주된 산업도시였고, 이곳을 점령하면 코카서스로 전진하는 독일군의 좌익의 안전이 확보되었다. 게다가 스탈린의 이름이 붙은 도시를 점령한다는 것은 이념적으로나 선전면으로 소련에 큰 타격을 입힐수 있었다. 스탈린도 이점을 알고 있었고, 총을 들수 있는 모든 사람을 이곳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1]

이 시점에서 소련군은 독일군에 비해 고도의 기동을 실행할 능력은 떨어졌다. 그러나 기갑부대의 전술보다는 짧은 소화기가 위력을 발휘할 시가전에서는 소련군의 이런 단점이 많이 상쇄되었다.

[편집] 청색 작전

독일 남방집단군은 코카서스의 유전지대를 점령하기 위해 러시아 남부의 스텝지대를 꿰뚫는 공세를 시작하였다. 히틀러에게 있어 유전지대의 점령은 다른 장군들이 권고하는 모스크바 점령보다 더 중요한 목표였기 때문에, 러시아 남부전선에 더 많은 병력과 지원을 했다. 여름 공세의 암호명은 "청색작전(독일어: Fall Blau)" 이었다. 여기에는 독일 6군, 17군, 4기갑군, 1기갑군이 참가했다. 1941년 점령한 우크라이나의 각 지점에서 공세를 개시하기로 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작전에 참견해서 집단군을 두 개로 나누었다. 파울 루드비히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가 지휘하는 남부 A집단군은 제17군과 제1기갑군과 함께 코카서스로 진격을 계속하도록 했고,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제6군과 호트의 4기갑군을 포함하는 남부 B집단군은 동진하여 볼가강 연안의 스탈린그라드를 공략하라고 명령했다. B집단군은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가 지휘했다.

청색 작전의 원래 이름은 지그프리트 작전(독일어:Unternehmen Siegfried) 이었다. 그러나 1942년 4월 5일, 히틀러는 이 작전 명을 청색 작전으로 바꾸고,각 부대에 명령서를 하달했다. 작전은 4단계로 나누어졌다.

  • 1단계- 보로네쥐를 점령하여 측면에서의 소련군의 위험을 제거한다.
  • 2단계- 돈 강을 도하하여 돈 강 너머의 소련군을 격파한다.
  • 3단계-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하여 철로를 점거한다.
  • 4단계- 소련 남부 코카서스 유전 지대를 장악하고, 이란 국경까지 진격한다.

청색작전의 개시일은 원래 1942년 5월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에 참가하기로 되어 있던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이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 포위에 참가중이었기 때문에 6월에 세바스토폴이 함락될 때까지 몇 차례 연기되었다. 이 동안 세미욘 티모셴코가 지휘하는 소련군의 춘계 공세가 시작되었으나, 독일군은 대규모로 병력을 동원하지 않고 이미 배치되어 있던 병력으로도 소련군 공세를 막아냈다. 그래서 2차 하리코프 전투에서 소련군의 돌출부를 잘라버리는 전투가 행해져 5월 22일에는 소련군의 대규모 병력이 포위되었다.

청색 작전은 최종적으로 6월 28일에 개시되었다. 독일군의 공격은 성공적으로 시작되었다. 소련군은 넓은 스텝 초원에서 거의 저항을 하지 못하고 동쪽으로 무질서한 패주를 시작했다. 저항선을 구축하려는 여러 시도가 다른 독일군 부대의 측면포위로 좌절되었다. 소련군은 7월 2일 하르코프 북방의 포위망과 일주일 후 밀레노보와 로스토프 근방의 포위망에 갖혀 각각 섬멸되었다.

그동안 헝가리 제2군과 독일 제4기갑군은 보로네쥐 공세를 개시하여 7월 5일 함락시켰다.

독일 청색 작전 상황도
독일 청색 작전 상황도

스탈린그라드를 향하는 B집단군의 초기진격은 매우 순조로워서 히틀러는 이에 소속된 제4기갑군이 코카서스로 동진하는 A 집단군에 합류하도록 명령했다. 이는 6군과 4기갑군이 같은 도로를 사용하게 되어 지역의 부족한 도로사정과 맞물려 대규모의 교통 정체를 야기했다. 이 지연은 매우 길어서 적어도 1주간의 진격이 기체되었다. 이렇게 되자 히틀러는 다시 마음을 바꿔 다시 4기갑군에게 스탈린그라드 공략에 합류하도록 명령했다.

7월의 하순까지 독일군은 소련군을 돈 강까지 밀어붙였다. 이 시점에서 독일군은 동맹국인 이탈리아군, 헝가리군, 루마니아군을 이용하여 방위선을 구성하고 있었다. 독일 제6군은 스탈린그라드로부터 수십km까지 접근했고 그들의 남방에 있던 4기갑군은 시의 공략을 위해 북방으로 진격로를 돌렸다. 남방에서는 A집단군이 코카서스를 향해 돌진중이었으나 진격속도는 둔화되었다. A집단군은 B집단군을 지원할수 없는 먼 남쪽까지 진출하였다.

이제 독일군의 의도는 소련군 지휘관들에게 분명해졌다. 소련군의 7월 작전계획은 스탈린그라드를 방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독일군의 공세앞에 동쪽으로 후퇴하던 소련군 부대는 스탈린그라드에 진입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스탈린그라드의 동쪽은 폭이 넓은 돈 강이었고, 강을 넘어 다른 소련군 부대들이 배치되었다. 이런 부대들이 새로 62군으로 재구성되었다. 그리고 인근의 64군(슈밀로프 중장 지휘)과 함께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을 이루었다.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은 안드레이 예료멘코대장이 지휘했고, 시내에 포진한 62군은 처음에 로파틴 중장이 사령관이었으나 그가 수비에 비관적이었고 병력을 볼가강 너머로 후퇴시켰기 때문에 바실리 추이코프 중장으로 교체되었다.(결과적으로 이는 성공적인 것이었음) 소련군의 목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시를 사수하는 것이었다.

[편집] 스탈린그라드 시가전

[편집] 초기전투

전투는 시가에 대한 독일공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도심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다.

전투에 나서는 소련 공장노동자들
전투에 나서는 소련 공장노동자들

스탈린은 방위부대의 사기를 위해 민간인이 시를 떠나 피난가는 것을 금지하였다. 피난행렬이 방위부대의 소통에 방해되면 안된다는게 그 이유였다. 여자와 아이를 포함한 민간인들이 방위망을 구성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8월 23일 단 하루의 대규모 폭격으로 많은인명이 죽고 많은 건물들이 돌과 잿더미로 변했다. 이날 독일 공군 폭격기 600대가 도시에 공격을 개시해서 불지옥으로 만들었고, 시민 약 4만여 명 이상이 사상하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2]

소련군의 초기의 방어 임무는 제1077 방공연대가 맡았는데, 이 부대는 주로 고사포를 보유하여 지상목표에 대한 교전법은 거의 훈련받지 않은 여성지원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대원들은 그들의 위치를 고수하여 진격해 오는 독일 전차와 교전했다. 독일군 제16기갑사단은 제1077연대의 모든 37개의 고사포를 모두 파괴하거나 우회할때까지 이들과 싸워야했다고 한다. [3] 전투의 초기에는 직접적으로 군수물자를 생산하지 않은 노동자들이 대거 시의 방위에 참가하였다. 한동안 탱크는 계속 시내의 공장에서 생산되었고, 도색도 되지 않거나 조준경도 없는, 갓 출고된 탱크를 공장노동자 자원자들이 몰고 전선에 나갔다.

8월 하순까지 독일 B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 북쪽에서 볼가강에 이르렀다. 남쪽을 향한 다른 진격도 이어졌다. 9월 1일까지 소련군은 독일군의 포병과 폭격에 노출되어 위험한 볼가강 도하를 통해서만 스탈린그라드 내의 부대들에게 보급과 지원을 행할수 있었다.

[편집] 치열한 시가전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 위에서 소련군 제62군과 제64군은 무너진 집과 공장을 이용하여 방어거점을 구축할수 있었다. 전투는 치열했고 잔혹했다. 이 도시에 처음 도착한 소련군 사병의 평균 예상생존시간은 24시간 미만이었다. 1942년 7월 27일에 내려진 스탈린의 227호 명령에 따르면 상부의 명령없이 위치를 벗어나는 모든 자는 즉결처분에 처해졌다. 사수 아니면 죽음이었다. 어쨌든 수많은 소련군 후퇴병과 탈주병이 이런 즉결처분으로 사살되었다. 물론 스탈린그라드에 투입된 독일군도 커다란 손실을 보고 있었다.


독일군의 군사원칙은 전차, 보병, 공병, 공군의 지상지원이 잘 조화된 협공작전이었다. 소련군은 여기에 대응하여 항상 독일군에게 가능한 가깝게 접근전을 시도했다. 추이코프는 이런 전법을 "껴안기"라고 불렀다. 이런 전법 때문에 독일군 보병은 홀로 화력지원 없이 싸우거나 혹은 자군의 화력지원에 의한 손실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문에 이런 전법은 독일군의 근접 지상지원과 포병지원을 무력화시켰다. 모든 거리, 공장, 집, 지하실, 계단에서 사람과 사람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독일군은 이런 시가전을 농담삼아 생쥐전쟁(Rattenkrieg)이라고 불렀다. 이는 부엌에서 쥐가 도망가면 또다시 거실에서 쥐잡기를 해야하는 것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특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마마이 언덕이었다. 이곳은 주인이 수없이 바뀌었다. [4] 어떤 반격때에는 소련군이 하루에 1개 사단을 잃기도 했다. 또한 거대한 사일로로 만들어진 곡물 저장소에서는 전투가 너무 근접전으로 벌어져 소련군과 독일군은 서로의 숨소리까지 들을수 있었다. 전투는 여기서 몇주간 계속되었는데 독일군이 최후로 적을 소탕했을때 겨우 40구의 소련군 시체를 발견했다. 그들은 저항의 규모로 볼때 더 많은 소련군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던 것이다. 시의 다른부분에서는 야코프 파블로프가 지위하는 소련군 소대가 한 아파트 빌딩 전체를 요새화하였다. 이 빌딩은 시의 중앙광장을 한눈에 내려다 볼수 있었다. 병사들은 이곳을 지뢰밭으로 둘러쌌고 창문에 기관총을 배치하였고, 지하실의 벽에 틈을 내어 통신을 용이하게 했다. 이 빌딩은 나중에 "파블로프의 집"이라고 불렸다.

양군의 손실은 막심했기 때문에, 계속 새로운 부대가 시내로 투입되었다. 특히 소련군은 수천킬로 밖의 시베리아나 극동에서 지원군을 끌어오기도 했고, 심지어는 해군의 수병까지도 동원했다. 시베리아에서 달려온 알렉산드르 로딤체프 지휘하의 제13근위보병사단은 마마이 언덕을 비롯한 각종시가전에서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대활약을 했다. 그는 생사기로의 위기에서 (15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던) 스탈린그라드 중앙역 벽에 "로딤체프의 친위부대원들이 여기서 조국(로디나)를 위해 싸웠고 잠들다." 라고 갈겨썼다.

독일군은 돌파구가 보이지 않자 중화기를 시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들중에는 구경 800mm의 열차포(별명 도라)도 있었다. 한편 소련군도 독일군이 도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볼가강 동안에 대규모의 포병을 배치하여 독일군을 계속 포격하였다. 독일군의 전차는 높이가 8미터가 넘는 폐허더미 속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게다가 소련군은 부서진 빌딩에 대전차포를 엄폐해 놓고 있다가 전진해 오는 독일군 전차를 공격했다.

소련군 저격수도 교묘히 폐허를 이용하여 독일군에게 큰 손해를 입혔다. 가장 유명한 저격수는 제1122 보병연대의 이반 시도렌코인데, 대전이 끝날때까지 약 500명을 사살하였다.[1] [2].

다른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도 전투 기간중 242명을 사살하였다. 그는 또 독일군의 악명높은 저격수 하인츠 토르팔트를 사살했다고 알려졌지만, (이것은 에너미 엣더 게이츠로 영화화 되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하인츠 토르팔트 (혹은 에르빈 쾨니히)는 소련측이 만들어낸 가공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스탈린과 히틀러에게 있어서 스탈린그라드는 실제의 전략목표보다 더 중요한 최우선순위가 되었다.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전략예비군을 모스크바 방면에서 볼가강 저지로 이동시켰고, 항공기도 모든 지역에서 스탈린그라드 방면으로 동원했다. 양군의 지휘관들의 막대한 긴장에 시달렸다. 독일군 지휘관 파울루스는 눈가에 심한 경련이 생겼고, 추이코프는 습진때문에 양 손을 붕대로 완전히 감쌀 정도였다. 양측의 병사들도 근접전투가 야기하는 심한 긴장감속에 지냈다.

[편집] 11월의 소련군 위기

스탈린그라드의 공장에 대한 공격
스탈린그라드의 공장에 대한 공격

독일군은 3개월동안 수많은 전사자를 남기고 느리고 값비싼 댓가를 치른 전진끝에 11월에 최후로 볼가강의 강둑에 도달했고, 폐허로 변한 시의 90%가 넘는 곳을 장악하여 남아있는 소련군을 두개의 고립지대에 가두었다. 더욱이 볼가강의 유빙이 볼가강 동안에서 시내로 보급을 실어 나르는 소련 배들의 도강을 방해했다. 그러나 시내, 특히 마마이 언덕과 북쪽의 공장지대에서는 계속 전과 다름없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붉은10월 공장"과 "펠릭스 제르진스키 트랙터공장", "바리카디 대포공장" 주위의 전투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소련군과 독일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동안, 바로 옆의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전차와 무기를 수리했고, 공장 자체에서 전투가 벌어질 때도 있었다. 한편 코카서스로 향하는 A집단군의 진격도 순조로워 대유전지대인 바쿠에 도착했지만, 이미 소련측은 채유시설을 파괴하여 독일군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편집] 소련군의 반격

[편집] 반격작전의 입안

가을에 스탈린그라드 방면의 전략적 작전지도를 맡은 바실레프스키주코프는 시내로 병력을 축차투입하는 것으로는 독일군을 격퇴할수 없다는것을 깨닫고 대규모 공세를 통해 전세를 뒤집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스탈린의 승인을 얻어 일반적인 공세작전을 입안했다. 작전계획은 독일군을 시내에 붙잡아두고, 양측면을 공격하여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시에는 겨우 거점을 유지할수 있을만큼만 병력을 지원했고, 시의 서북쪽과 서남쪽의 스텝지대에 대규모 병력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이 작전은 "천왕성 작전"으로 명명되었으며 독일 중앙집단군을 겨눈 화성 작전과 함께 실시될 예정이었다. 독일군은 특히 북쪽 좌익이 약했는데, 이곳은 독일군에 비해 훈련이 덜되고 장비도 부족한데다 사기도 엉망인 이탈리아군과 헝가리군, 루마니아군이 수비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취약점은 소련군에게 간파되었다.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이 가능할때마다 독일군 대신 주로 약한 이탈리아군을 상대로 돌파구를 뚫었듯이, 소련군도 이러한 점을 이용해서 비독일 추축국군을 공격목표로 삼았다. 이 공세의 준비기간 동안 주코프는 개인적으로 전선을 방문했는데 이것은 고위지휘관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5] 이 전투는 3년 전 주코프의 할힌골 전투(노몬한 사건)와 매우 유사했다. 주코프는 할힌골에서 두 갈래로 적을 돌파, 포위하는 협공전법을 이용해 일본군 제23사단을 궤멸시켰다. [6] 이는 독일군이 소련군에게 자주 써먹었던 양갈래 돌파전법(독일어: Keil und Kessel) 과도 거의 비슷했다.

[편집] 측면의 위협

치열한 시가전동안 B집단군의 측면을 보호하는 독일군, 이탈리아군, 헝가리군, 이탈리아군은 사령부에 계속 지원요청을 했다. 장비가 불충분하고 훈련도가 낮은 헝가리 제2군이 스탈린그라드 북방의 정면 200km를 수비하고 있었다. 이것은 매우 얄팍한 수비로 1-2km 의 전선을 일개 소대가 맡는 꼴이었다. 소련군 부대들은 강의 남쪽 기슭의 여러 곳을 장악하고 있었고 이것은 B집단군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시 자체만을 강조했고, 측면에 대한 지원요청은 거부했다. 독일군 측면에 대한 소련군의 대폭적인 증강은 매우 비밀리에 수행되었지만 각종 정찰과 포로심문에 통해 독일측에서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독일군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는 측면에 대한 위험을 지적하며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히틀러의 집착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소련군의 병력증강에 대한 정보를 허무맹랑한 일로 일축하면서 할더를 10월 중순 쿠르트 차이츨러로 교체하였다.


[편집] 천왕성 작전

소련 "천왕성작전" 반격(9월19일-9월28일)
소련 "천왕성작전" 반격(9월19일-9월28일)


11월 19일 소련군은 드디어 천왕성 작전을 개시했다. 3개 야전군(1근위, 5전차, 21군)으로 이루어진 남서전선군이 바투틴 대장지휘하에서 북쪽에서부터 내려오기 시작했다. 남서 전선군은 총 18개 보병사단과 8개 전차 여단, 2개 자동차화여단, 6개 기병사단, 1개 대전차 여단의 대병력을 보유했다. 이 부대는 독일 제 6군의 북쪽 측면을 수비하던 루마니아군을 겨누었다. 루마니아군은 이전부터 계속 독일측에 증원과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이는 거부되었다. 소련군의 맹공앞에 병력도 열세였고 장비도 불충분했던 루마니아 제3군은 산산히 부숴져 흩어졌다. 11월 20일에서는 남쪽방면에서도 두개의 야전군으로 이루어진 로코소프스키 중장 지휘하의 돈 전선군의 공세가 시작되어 보병만으로 이루어진 루마니아 제4군단을 분쇄했다. 두 갈래의 전선군은 이틀 후 스탈린그라드 서쪽 칼라치에서 만나 독일 제6군을 둘러싸는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했다. 소련측은 이 만남을 기록영화로 찍어 선전했지만, 이것은 나중에 만들어진 연출이었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사용 가능한 카메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편집] 포위된 독일군

[편집] 공중보급

소련군의 협격포위로 25만여 명의 독일과 루마니아군, 그리고 약간의 크로아티아 출신의 의용병 부대가 거대한 포위망에 갖혔다. 포위망 안에는 또한 만 명에 달하는 소련 민간인과 [5], 전투 중에 독일군이 잡은 수천 명의 소련군 포로가 있었다. 독일 제6군 전체가 포위망에 갖힌 것은 아니고, 5만여 명은 포위망 밖에 있었다. 포위망 구성을 마친 소련군은 사주방위선을 구성하여 안쪽의 탈출시도와 바깥쪽의 구원시도를 모두 대비했다.

히틀러는 9월 30일 대중연설에서 독일군이 절대로 시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소련의 포위 직후 열린 회의에서 독일군 사령관들은 즉시 돈강 서안의 전선으로 새로운 돌파구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당시 공군의 총참모장인 한스 예숀네크과 함께 바바리아 지방의 오베르잘츠베르크 별장에 있었다. 히틀러는 예숀네크에 포위된 제6군에 공중으로 보급할수 있겠냐고 물었는데,그는 별생각없이 공군은 "공중가교"로 할수 있다고 대답했다. 이 "공중가교"로 구원군이 구성될 때까지 독일군은 포위망 안에서 싸우게 될 것이다.

이런 "공중가교"는 사실 처음이 아니었고, 규모는 적었지만 1년전 모스크바 공방전 직후 데미얀스크 고립지대에 갖힌 독일군에 성공적으로 사용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데미안스크에서는 일개 군단이었지만, 이번 경우는 일개 야전군 전체였다. 또한 그동안 소련군 전투기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훨씬 개선되어 있었다. 그러나 데미얀스크의 성공은 히틀러에게 확신을 주었고, 공군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도 며칠후 여기에 찬성했다.

제4항공함대(Luftflotte 4)의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은 이 계획의 번복을 요청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독일 제6군은 공중보급을 받게 되었다. 제6군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단위부대였으며 거의 정규 독일 야전군의 두배의 규모였다. 게다가 제4기갑군의 한개 군단도 함께 포위되어 있었다. 고립지대에 대한 공중보급이 불가능하다는것은 명백했다. 독일 공군의 수송능력은 크레타 전투 이후 증원되지 않았다. 그래서 일일 수송 가능량은 최대한 300톤 정도였지만, 고립지대에 안의 일일 필요보급량은 500톤이어서 필요량에 훨씬 못미쳤다. 그러나 히틀러는 괴링의 계획을 지지했고, 포위망안의 부대에 "항복절대불가"의 명령만을 반복했다.

공중보급 계획은 즉각 실패로 드러났다. 소련군의 밀집된 대공포화와 전투기는 독일군 공군의 수송기들에 심한 손실을 입혔다. 또한 악천후도 독일군의 수송효율을 저하시켰다. 결국 평균적으로 일일 필요량의 10%만 보급할수 있었다. 게다가 가끔씩 엉뚱한 수송물자가 도착하기도 하였다. 어떤때는 20톤의 보드카와 여름군복을 가져왔는데, 이것은 이 상황에서 전혀 필요없는 것들이었다. [7] 안전하게 도착한 수송기는 돌아올때 사령부에서 재능이 있다고 판단된 지휘관들이나 기술적 전문가들, 그리고 부상병들을 날라왔다. 제6군은 기아에 시달리고 있었고, 조종사들은 도착한 물자를 나르는 병사들이 너무 지치고 굶주려서 음식을 나를수 없다는 것에 충격받았다. 독일 총참모장 차이츨러는 스탈린그라드의 고난에 충격을 받아서 스스로 음식을 줄였다고 한다. 이렇게 몇주간 계속해 수척해지자 이를 본 히틀러는 화를 내면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도록 개인적으로 명령했다.

[편집] 토성작전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주위의 위치를 공고히 했고, 포위망을 줄이기 위한 전투를 개시했다. 12월 포위를 모면한 독일 제4기갑군을 주축으로 구성된 돈 집단군은 만슈타인 지휘하에 포위된 독일군을 구출하기 위해 "겨울폭풍 작전"(독일어:Unternehmen Wintergewitter)을 개시하였으나 소련군은 이를 격퇴하였다. 다시 한번 혹독한 러시아의 동장군이 찾아와 볼가강이 결빙하여 소련군의 보급은 쉬워졌다. 그러나 시내에 포위된 독일군은 식량, 난방연료, 의약품 부족에 시달렸고, 수많은 병사들이 동상, 영양실조,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12월 16일 소련군은 다시 두번째 공세인 토성작전을 개시하였다. 이것은 추축군을 돈강 넘어로 몰아내고 로스토프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만약 이것이 성공한다면 코카서스를 향해 진격하던 독일 A집단군까지 포위가 되어 독일 남부집단군 전체가 붕괴하는 꼴이었다. 독일군은 대규모 지원부대가 도착할때까지 남아있는 소규모 부대로 "기동방어"를 시도하였다. 소련군은 로스토프에 근접하지 못했지만, A 집단군을 코카서스로부터 후퇴시켰고, 만슈타인으로 하여금 스탈린그라드에서 250km 후방으로 물러서게 하였다. 게다가 소련군이 독일군의 공항을 겨눈 타친스카야 기습이 성공하여 독일공군의 수송능력은 상당히 감소되었다. 이제 독일 제6군은 모든 구원군의 희망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독일군 최고사령부는 제6군에게 이를 알리지 않고, 계속 희망을 가지고 위치를 고수하도록 명령했다. 몇몇 독일군 장교들은 파울루스에게 위치를 고수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무시하고 포위망을 뚫어 스탈린그라드를 탈출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명령불복종은 생각할수조차 없었던 파울루스는 이를 거부했다. 또한 이러한 포위망 돌파는 포위 초기 몇주에는 가능했지만, 그 이후에는 연료가 부족하여 불가능했다. 기아에 허덕이던 독일군이 혹독한 소련의 겨울에 걸어서 이런 소련군의 포위망을 뚫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5]

[편집] 소련군의 승리

[편집] 파울루스의 항복

포위망에 갖힌 독일군은 소련군의 맹공때문에 시의 외곽으로부터 시내로 철수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공중보급이 이루어지던 피톰닉과 굼락크 두 공항을 잃었다. 독일군은 이제 기아에 허덕일뿐만 아니라 실탄도 떨어져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소련군이 포로를 처형할 것이라는 생각에 결사적 항전을 계속했다. 특히 히비라고 불리는 소련군 출신 독일부역자들은 잡히면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때문에 결사적이었다. 그들을 공격하던 독일군을 역포위한 소련군은 포위망을 강화하여야만 했다. 다시한번 피비린내 나는 시가전이 시작되었고, 이번에는 독일군이 볼가강 강둑으로 밀려났다. 1943년 1월 소련군은 1. 모든 포로에 대한 안전보장, 2. 독일군 환자와 부상병에 대한 의료지원, 3. 포로의 개인소지품 소지허가, 4. 정규 식량 지급, 5.전쟁이 끝난 후 송환 등의 조건을 내걸고 파울루스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냈다. 이는 심리전 차원에서 선전삐라로 만들어져 포위된 독일군에게도 뿌려졌다. 그러나 파울루스는 이를 거부했고 다시 전투가 재개되었다.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자신의 집권 10주년 기념일인 1월 30일에 원수로 승진시켰다. 지금까지 포로가 된 독일의 원수가 없었음을 상기시키며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자결하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보낸것이다. 하지만 다음날 소련군이 폐허가 된 백화점 건물에 차렸던 사령부로 진입하자, 파울루스는 이런 히틀러의 기대를 저버리고 항복하고 말았다. 2월 2일 항복한 독일군 포로는 22명의 장성급을 포함한 91,000명이었다. 이들은 기아와 질병에 싸울기력을 잃어 도저히 더이상 싸울수 없었다. 처음에 스탈린그라드에 갖혔던 25만 명의 추축국 병사 중, 이렇게 항복한 포로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사망했다. 파울루스의 항복에 대해 히틀러는 "그는 영광속에서 영원히 살수 있는 길을 앞두고 모스크바로 가는 길을 택했다."며 화를 냈다.

[편집] 항전을 계속한 추축국 병사

한편 2월 2일 대부분의 추축군 병사들이 항복했다는 공식적인 소련군의 발표와는 달리, 독일측의 다큐멘터리 영화 《스탈린그라드》에 따르면 11,000명이 넘는 독일군과 추축국 병사는 항복을 거부하고 계속 저항했다고 한다. 이것은 싸우다 죽는 것이 소련의 포로가 되는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그랬을 것이다. 이들은 파울루스의 항복 이후 약 한달이 지난 1943년 3월까지 지하실이나 하수도에 은신하며 저항했다. 소련군의 소탕작전에 의해 이들의 수는 계속 줄어들었고, 3월까지 거의 소탕되거나 항복하였다. 이 다큐멘터리에 나온 소련군 문서에 따르면 이렇게 저항한 2,418명이 사살되었고 8,646명이 포로로 잡혔다. [8]

[편집] 영향

[편집] 사상자의 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인류역사상 가장 큰 단일 전투였다. 이것은 199일간 지속되었다. 전투의 범위가 광대했고, 사상자수가 지나치게 많을 것을 두려워 한 소련정부의 금지때문에 정확한 집계도 어려웠다. 전투 초기에 독일군은 소련군에게 심한 손실을 입혔다. 그러나 소련군이 독일군의 측면(주로 루마니아군)을 돌파하여 독일 제6군의 나머지를 포위하기 전에도 독일 제6군은 이미 큰 손실을 입고 있었다. 어떤 때는 독일군이 시의 90%를 장악하기도 했으나 소련군 장병들은 독일군의 점령지구 안에서 필사적으로 싸웠다. 독일 제4기갑군의 일부도 스탈린그라드 주변의 소련군의 반격때 심한 손실을 입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전투에서 추축국의 병력손실(전상, 전사, 포로 등 포함)이 850,000명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한다. 독일이 400,000명, 루마니아가 200,000명, 이탈리아가 130,000명, 헝가리가 120,000명에 달하는 인명손실을 본 것이다.[7] 전투에서 살아남아 포로가 된 9만 명도 1943년 봄에 대부분 티프스로 사망했고, 그후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랜기간동안 소련에 억류되어 전후복구사업에 강제동원되다가 최종적으로 1955년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자는 50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독일도 소련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다루긴 마찬가지였다. 5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출신 독일부역자(히비:Hiwi)들도 소련군에 사살되거나 잡혀 처형되었다. 각종 문헌자료에 따르면 소련군의 손실은 총 1,129,619 명이라고 한다. 478,741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650,878명이 부상당했다. 그런데 이 숫자는 작전의 범위를 넓게 잡아 추산한 것이다. 또한 독일 제6군과 제4기갑군이 시내로 진격해 온 첫주의 공습에서 4만여 명의 소련 민간인이 시내나 교외에서 사망했다. 시 이외의 민간인의 총 사망자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전체적으로 소련과 추축국의 전체 인명피해는 170만에서 200만으로 추정된다.

[편집] 기념과 의의

마마이 언덕에 세워진 85m높이의 "모국러시아" 상
마마이 언덕에 세워진 85m높이의 "모국러시아" 상

영웅적인 방어전을 기념하여 스탈린그라드는 1945년 영웅도시의 칭호를 받았다. 전후 1960년대에는 시를 내려다보는 마마이 언덕에 "모국 러시아" 를 상징하는 거대한 입상이 세워졌다. 이 근처에 스탈린그라드 전투 기념관이 세워졌으며, 오늘날까지 당시에 부서졌던 건물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소련 62군과 64군을 지휘했던 추이코프와 슈밀로프도 사후 이 곳에 묻혔다. 곡물저장소와 2개월간 독일군의 포위에 견딘 파블로프의 집도 보존되어 현재까지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오늘날까지 마마이 언덕에서는 뼈나 조각난 쇳조각이 발견되곤 한다. 이것들은 전투의 치열함과 독일 침략자들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독일군은 포위된 가운데서도 주목할만한 군기를 보여주었다. 독일군이 이런 규모로 악조건하에서 포위된 것은 처음이었다. 포위 말기에는 식량과 의복이 부족하여 많은 독일병사들이 동사하거나 아사했다. [5] 그러나 군기는 엄정히 지켜졌고, 상관에 대한 복종도 저항이 의미없어질때까지 지켜졌다. 파울루스 원수는 빨리 포위망을 빠져나오라는 다른 독일 장군들(특히 구원군을 이끌었던 만슈타인)의 권고나 권유에도 불구하고 실탄과 식량이 고갈될 때까지 위치를 고수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에 복종했다. 그래서 지휘관이었던 파울루스의 항복 이전에 소련군에게 항복한 독일군의 수는 매우 적었다.

이후 독일군은 수세에 몰리게 된다. 1943년 초봄, 만슈타인은 스탈린그라드의 승리에 고취되어 너무 깊숙히 추격해온 소련군을 섬멸하여 일시적으로 공세를 취하기도 하지만(제3차 하르코프 전투 참조), 독일군의 병력과 자원은 이미 스탈린그라드에서 지나치게 소모되었고 더이상 소련군을 압도할만한 힘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조적으로 소련군은 초기의 패배를 딛고 이 전투를 기점으로 병기와 전법을 대폭 개량하여 독일군과 대등하게 싸울수 있는 전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편집] 참고자료

본문은 영문위키백과의 본문을 대부분 그대로 번역한 것이므로 영문위키백과의 참고자료를 소개한다

  • Гриф секретности снят: Потери Вооруженных Сил СССР в войнах, боевых действиях и военных конфликтах: Стат. исслед./ Г. Ф. Кривошеев, В. М. Андроников, П. Д. Буриков. — М.: Воениздат, 1993. С. 178—182, 369—370. ISBN 5-203-01400-0
  • Beevor, Antony [1999]. Stalingrad (in English). Viking Press, Penguin Books. ISBN 0-14-024985-0 (Pbk).
  • MacDonald, John [1986]. Great Battles of World War II (in English). London: Michael Joseph, pp. 94.
  • http://stalingrad-info.com/stalingrad1942.htm
  • Craig, William [1973]. Enemy at the Gates: the Battle for Stalingrad (in English). New York: Penguin Books. ISBN 0-14-200000-0.
  • http://www-cgsc.army.mil/carl/resources/csi/drea2/Maps.html#map17
  • MacDonald, John [1986]. Great Battles of World War II (in English). London: Michael Joseph, pp. 98.
  • Stalingrad - OSA III - Stalingradin taistelu päättyy. Retrieved on 2007-07-16.

[편집] 더 읽기

  • Overy,Richard, 류한수(옮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지식의 풍경, 2003 (옮긴이가 원저의 오류나 착오까지 바로 잡을 정도로 매우 번역이 잘된 책으로서, 독소전쟁의 배경이나 개요(특히 소련측에서)를 보기에는 좋은책)
  • 김종화, 《스탈린그라드 전투》, 세주통상, 1995 (저자의 지나친 반공적인 기술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공식적인 역사책에 나오지 않은 여러 일화를 다루고 있음)
  • 《세계 제2차대전-소련군의 반격》,한국일보타임라이프, 1992 (모스크바 공방전 직후부터 스탈린그라드전투까지의 상황이 잘 서술됨)
  • Beevor, Anthony, 안종석(옮김),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서해문집, 2004 (번역에 약간의 오류가 눈에 띄기는 하지만 독일측의 입장에서 잘 서술)

[편집] 주석

  1. MacDonald, John, Gerat Battles of World War II, 1986, Michael Joseph, London, pp. 94
  2. G.Zhukov, Reminiscences and reflections (Moscow, 1985) pp.83-4; Werth, Russia at War, pp.448-9.
  3. http://stalingrad-info.com/stalingrad1942.htm
  4. Craig,William,Enemy at the Gates: the Battle for Stalingrad,1973,Penguin Books,New York
  5. Cite error: Invalid <ref> tag; no text was provided for refs named Beevor
  6. http://www-cgsc.army.mil/carl/resources/csi/drea2/Maps.html#map17
  7. Cite error: Invalid <ref> tag; no text was provided for refs named Craig
  8. ,Stalingrad - OSA III - Stalingradin taistelu päättyy, http://video.google.com/videoplay?docid=8717261858113724758 }}


aa - ab - af - ak - als - am - an - ang - ar - arc - as - ast - av - ay - az - ba - bar - bat_smg - bcl - be - be_x_old - bg - bh - bi - bm - bn - bo - bpy - br - bs - bug - bxr - ca - cbk_zam - cdo - ce - ceb - ch - cho - chr - chy - co - cr - crh - cs - csb - cu - cv - cy - da - de - diq - dsb - dv - dz - ee - el - eml - en - eo - es - et - eu - ext - fa - ff - fi - fiu_vro - fj - fo - fr - frp - fur - fy - ga - gan - gd - gl - glk - gn - got - gu - gv - ha - hak - haw - he - hi - hif - ho - hr - hsb - ht - hu - hy - hz - ia - id - ie - ig - ii - ik - ilo - io - is - it - iu - ja - jbo - jv - ka - kaa - kab - kg - ki - kj - kk - kl - km - kn - ko - kr - ks - ksh - ku - kv - kw - ky - la - lad - lb - lbe - lg - li - lij - lmo - ln - lo - lt - lv - map_bms - mdf - mg - mh - mi - mk - ml - mn - mo - mr - mt - mus - my - myv - mzn - na - nah - nap - nds - nds_nl - ne - new - ng - nl - nn - no - nov - nrm - nv - ny - oc - om - or - os - pa - pag - pam - pap - pdc - pi - pih - pl - pms - ps - pt - qu - quality - rm - rmy - rn - ro - roa_rup - roa_tara - ru - rw - sa - sah - sc - scn - sco - sd - se - sg - sh - si - simple - sk - sl - sm - sn - so - sr - srn - ss - st - stq - su - sv - sw - szl - ta - te - tet - tg - th - ti - tk - tl - tlh - tn - to - tpi - tr - ts - tt - tum - tw - ty - udm - ug - uk - ur - uz - ve - vec - vi - vls - vo - wa - war - wo - wuu - xal - xh - yi - yo - za - zea - zh - zh_classical - zh_min_nan - zh_yue - z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