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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 위키백과

서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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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
기본 정보
본명 정현철(鄭鉉哲)
출생 1972년 2월 21일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
장르 댄스, 갱스터 랩, 얼터너티브 록, 뉴 메탈, 얼터너티브 메탈, 록 발라드
활동 시기 1992년 ~ 1996년, 1998년 ~ 현재
웹사이트 http://www.seotaiji.com/

서태지(1972년 2월 21일 ~ )는 대한민국의 대중 음악가이다. 본명은 정현철(鄭鉉哲)이다.[1]

목차

[편집] 약력

[편집] 어린 시절

1972년 2월 21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에서 1남 1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재동초등학교를 거쳐 대동중학교 2학년 때인 1986년에 친구들과 하늘벽이라는 밴드를 만들었다. 음악에 심취한 그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는 달리 중학교 3학년때는 전교 537명중 꼴찌를 할 정도로 공부와는 멀어지게 된다. 이듬해 원치않게 서울북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부모님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드디어 자퇴서를 제출하고 고등학교 중퇴에 이르게 된다. 대학로를 전전하다가, 멤버구인광고를 보고 활화산이라는 밴드에 합류하게 되었다. 하지만 활동을 하기전에 해체가 되었고, 이후 그는 우연히 들린 우드스탁에서 이중산씨를 만나 그의 밴드에서 베이시스트로 잠시 활동하게 된다. 어느날, 그의 연주를 유심히 본 당시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에게 스카웃된다. [2]

[편집] 시나위 시절

당시 최고의 밴드였지만 1년에 한 두번 방송에 출연할 정도로 에 대한 인식이 열악했다. 그리고 시나위의 리더 신대철의 권위적인 행동과 그 와의 의견대립으로 인해 서태지는 시나위를 탈퇴한다.

[편집] 서태지와 아이들 1집

본격적으로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 그는 〈난 알아요〉, 〈환상속의 그대〉 등을 만들게 된다.그리고 1991년 양현석이주노를 만나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한다.이후 1992년 4월 서태지와 아이들 1집 《난 알아요》를 발표 하기에 이른다. MBC의 특종 TV연예에 데뷔하게 된 그들은 방송 3사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를 모두 석권했으며, 가요역사상 유일하게 앨범 수록곡 전곡이 가요차트 50위안에 들었다. 그리고 TV저널 올해의스타상, 서울가요대상 최고 인기상, 스포츠서울 올해의 가수상, 대한민국 영상음악 대상 골든디스크상, MBC 10대가수가요제 최고인기가요상과 신인가수상, KBS 가요대상 15대 가수상등 그해 가요계에 부여된 모든 상을 휩쓸었다. 이와 더불어 데뷔 음반 《난 알아요》은 데뷔앨범으로는 최다판매량인 17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한국어로 랩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음악, 대중음악의 역사를 바꾼 앨범, 한국에 진정한 댄스음악을 등장시킨 앨범 등 엄청난 호평을 듣게 된다.[2]

[편집] 서태지와 아이들 2집

1993년 6월 2집 《하여가》를 발표해서 국내 최초로 더블밀리언셀러를 기록했으며 다시한번 각 방송사 및 언론사의 가요차트 1위를 휩쓸었고, 아시아뮤직페스터벌 한국대표참가, 대한민국 영상음반 대상, SBS 서울가요대상 작곡상, 기획상, 올해의가수상, 최고인기가수상, MBC 10대가수가요제 대상, KBS 가요대상 들 가요 시상식을 다시한번 휩쓸었다. 〈하여가〉의 힙합음악에 국악을 접목시킨 음악과 〈수시아〉의 158비트 빠른 멜로디는 2000년대테크노 열풍에 한발 앞서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3] [2] 이 음반 또한 2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다.

[편집] 서태지와 아이들 3집

1994년 8월 3집 《발해를 꿈꾸며》를 발표하고, 이번 앨범 부터는 댄스 음악에서 으로의 회귀를 선언했다. 일례로 3집에서는 한 곡의 댄스곡도 없었다. 이는 당시 댄스음악을 바래왔던 10대 대중들에게 실망을 주기 충분했고, 서태지에 실망한 팬들이 안티팬으로 변하기도 했다. 또한 이른바 '사탄설'이 퍼지기 시작했다. 〈교실이데아〉를 거꾸로 들어보면 사탄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는 괴소문이 전국에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서태지는 사탄이다' 라는 소문이 온라인에서 퍼졌고, 언론에도 크게 보도되어 자살설, 동성애자설, 임신설 등이 퍼졌다. 이러한 괴소문들은 MBC 뉴스데스크 등에서 〈교실이데아〉를 직접 돌려틀어 사실무근임을 밝혀내면서 잠잠해졌다.[4]

3집은 또한 강한 메시지 지향성 때문에 관심과 논란을 일으켰다. 상업가요를 표방하는 사랑 이야기에서 탈피해 남북통일, 교육 현실 그리고 마약 문제까지 그동안 민중가요 등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내용이 수록되었다. 특히 뉴 메탈 색채를 강하게 드러낸 〈교실이데아〉는 교육 현실을 직설적으로 꼬집으면서 10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당시 기성세대로부터는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서태지가 음악에서 이야기한 통일, 교육, 마약 등 사회 비판적인 주제와, 그의 가사속에서 보이는 사회를 보이는 시각, 그에 대한 (주요 팬인) 10대들의 반응 때문에 서태지 담론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1994년 대한민국 학계와 언론계가 뽑은 '광복50년 한국을 바꾼 100인'에 가수로서는 최초로 선정되는등[5] 다양한 일들이 있었지만, 정작 그가 시도한 음악적 변화 자체는 큰 대중적 주목을 끌지 못했다.[4]

[편집] 서태지와 아이들 4집

1995년 10월에는 느리고 무거운 갱스터랩이라는 장르를 소개한 4집 앨범 《컴백홈》을 발표하였다. 비주류성 음악으로 인기를 못끌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가고 이들의 앨범은 발매 첫날 30만장이 팔리는 등 총 200만장 이상이 팔려 당시까지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상 세번째 더블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각 방송사 가요순위 1위를 휩쓸고, 〈컴백홈〉을 듣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학생의 이야기가 각 방송사 뉴스를 통해 전파를 타면서, 3집에 이어 사회적인 문제를 다룬 서태지에게 문화대통령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게 되었다.

또한 공윤의 심의에 의해 가사 전달이 되지 못한 시대 유감 은 정태춘 씨의 심의 철폐 운동과 시너지를 일으켜 현재 공윤의 사전심의 철폐에 공을 세웠다고 알려지고 있다.[6]

그러나 1996년 1월 31일 성균관대학교 유림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새로움에 대한 부담과 이에 따른 창작의 고통 그리고 화려할때 미련없이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돌연 그룹 해체와 은퇴를 선언하며 미국으로 떠났다. 이날 서태지의 갑작스러운 은퇴소식은 전 사회적인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각 방송사 9시뉴스의 메인 뉴스가 되었고, 각 일간지의 일면을 장식했다. [4]

[편집] 서태지 솔로 1집(통산 5집)

2년 전 돌연 은퇴를 선언하며 미국으로 가버렸던 서태지가 1998년 7월 모습도 전혀 비추지 않은 채 갑자기 5집 앨범 《테이크 투》(Take Two)를 발표하였다. 6곡의 노래와 3곡의 간주곡이 담긴 28분짜리 소형 앨범으로, 특이하게도 보라색 케이스에 담겨 발매되었다.

서태지의 5집은 그의 은퇴 번복에 대한 논란과 짧은 러닝타임 문제(총 28분) 등으로 논란이 많았으며, 음악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는 서태지의 지지자와 반대자의 논쟁이 주를 이루었다. 서태지의 팬들은 해외의 평론가들에게 5집에 대한 평가를 의뢰하여, 서태지의 5집 앨범은 'Rock-extreme 이주의 밴드'등 음악 평론 사이트에서 호평을 얻는다. 반면 서태지의 반대자들은 28분짜리 EP 수준의 앨범을 정식 앨범의 돈을 주고 팔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현재 서태지 솔로 1집은 재발매가 되어 구입이 쉽지만, 재발매 이전에는 2~3배의 프리미엄이 붙었던 앨범이다.

[편집] 서태지 솔로 2집(통산 6집)

은퇴후 4년 7개월 만인 2000년 8월 11일에 서태지가 인터넷을 통해 컴백을 알렸고, 8월 31일 김포공항을 통하여 모습을 보였다. 바로 솔로 6집 《울트라맨이야》 를 들고 대중앞에 모습을 들어냈다. 서태지가 한국에 오던날 김포공항은 수천여명의 팬들과 수백명의 기자들로 마비상태가 되었다.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단 한번도 주류로 나온적이 없었던 뉴 메탈(Nu Metal. 한국에서는 '하드코어 록'으로 불려짐.)을 시도한 음악들은 많은 화제가 되었다. 20000909 그의 컴백콘서트는 추석특집으로 MBC에 방송되었고,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그주 일요일에 재방송까지 하였다. [4]2001년부터 ETPFEST[이티피페스트]라는 글로벌 콘서트를 개최하여, 2002년과 2004년, 지금까지 3회 공연하였다.(Eerie Taiji People FESTival: 괴기한 태지 사람들의 축제)

서태지의 통산 앨범판매량은 1천만장을 넘겼다.

[편집] 서태지 솔로 3집(통산 7집)

2004년 1월 7집 앨범 《Live Wire》를 발표하였다. 4년의 공백을 불식시키듯 50여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그해 최다음반판매량을 기록하여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2004년 5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한·러 수교 120주년을 기념하여‘서태지 라이브 인 블라디보스토크’을 개최하였다. Watch out 과 Zero Live Album(CD&DVD)을 발표한 후 새로운 8집 음반을 작업 중이다.

[편집] 15주년 기념 앨범과 솔로 4집(통산 8집)

2007년 12월, 데뷔 15주년 기념앨범 [&] SEOTAIJI 15TH ANNIVERSARY 를 발매하고, 2008년 8월 15일, 잠실주경기장에서 열리는 ETPFEST를 통해 컴백할 할 예정이다.

[편집] 영향

[편집] 10대 취향의 댄스음악의 등장

90년대의 대중가요계는 현철, 주현미, 태진아를 중심으로한 트로트신승훈, 박정운등을 중심으로 한 발라드가 그 중심에 있었고, 댄스음악은 이미 하락세를 거듭했다. 그리고 여전히 10대들은 침묵해야만 했다. 그들은 새로운 문화를 원했고 1992년 2월 뉴키즈 온더 블록 방한 소동에서 일부나마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이 공연을 보기위해 2만여명의 여학생들이 공연장을 찾았는데, 열광을 넘어선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상 초유의 광란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공연 시작 20여분만에 공연이 중단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이 와중에 200여명이 넘어지고 그로인해 100여명이 부상, 그리고 1명의 여고생이 사망하는 사건마저 일어났다. 그동안 풀곳이 없어서 쌓여왔던 사회의 소외계층이었던 10대들의 욕구가 너무나 갑작스럽게 단 한번의 공연이라는 너무나 작은 기회속에서 폭발된 결과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은 10대 취향의 댄스음악의 등장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편집] 뮤직비디오의 활성화

80년대 초반 미국의 MTV가 개국되면서, 음악문화에서 뮤직비디오란 새로운 장르가 한 부분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한국에서는 날로 발전하는 미국의 뮤직비디오 문화에 비해 뮤직비디오란 개념조차 확립되지 않은 가라오케에서 사용하는 영상음악만이 존재했다. 방송과 가수들은 음악의 한 문화로서 뮤직비디오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며,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개념도 미비했다.

하지만, 서태지는 이 뮤직비디오를 자신의 음악에 있어서 표현의 한 도구로 삼았다. 방송에서 적극적으로 뮤직비디오를 활용했으며, 당시 한국의 촬영기술은 미비했지만 더이상 영상음악이 아닌 그 구성에 있어서 미국의 뮤직비디오와 같은 수준의 완성도 높은 뮤직비디오를 만들어냈다.[7]

[편집] 기획사와 가수 관계의 재정립

가요계에서 기획사 시스템은 가수 개인의 의사나 희망보다는 매니저와 기획사의 요구에 따라야 하는 불합리한 제도였다. 서태지 역시 데뷔당시 이 악습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자신이 만든 음악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마스터 테입을 들고 기획사들을 전전했고, 당시 유대영이라는 기획자를 만나 앨범을 만들고, 방송에 데뷔를 할 수 있었다. 기획사는 당연히 서태지를 재능있는 음악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팔릴 것 같은 상품으로 봤고, 이에따라 최 단시간 많은 이윤을 내기위해 하루에도 3~4차례씩 방송무대에 오르길 강요했으며, 이로인해 최소한의 수면과 식사등 기본적인 건강관리 및, 가장 중요한 음악적 연구에 대한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어찌보면 가요계의 시스템 안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서태지는 이 악습을 끊어냈다. 데뷔 후 3개월이 지나서 서태지는 매니저와 결별 선언했다. 이때부터 서태지는 지금까지 본인의 모든 스케쥴 및 관리를 자신이 직접 하기 시작했고, 이 후 요요기획을 설립 기획사와 매니저에 가수가 고용되어있는 시스템이 아니라 가수가 기획사와 매니저를 고용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러나 서태지의 등장으로 인한 가요계의 변동으로 인해, 상품성이 보장된 서태지와 같은 그룹들을 만들어 파는 기획사가 난립하게 되었고 덕분에 서태지처럼 뜰 수 있다는 그들의 조건 때문에 오히려, 기획사의 노예같은 그룹들이 지금까지도 생겨나게 된것은 아이러니 하다고 밖에 볼 수 없다.[출처 필요]

[편집] 저작권,초상권 개념의 확립

1990년대 초 까지 저작권, 초상권이라는 단어는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1992년 9월 국내 비디오 산업의 첫 저작권 분쟁[출처 필요]으로 기록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뮤직비디오 판권 소송으로 그 존재를 드러냈다. 이 사건의 출발은 전 매니저와 결별을 하기 전 서태지와 아이들의 뮤직비디오 판권을 놓고 매니저가 서태지의 동의 없이 한 비디오 제작자와 판권계약을 했던 일에서 출발한다. 서태지는 서태지대로 자신이 고른 제작회사와 판권계약을 마친상태였다. 이로인해 동시에 두 곳에서 서태지와 이이들의 뮤직비디오가 발매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외에도 몇몇 프로덕션에서 불법으로 뮤직비디오를 제작해 이미 시판을 하고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태지는 이들을 고소하고, 뮤직비디오에 대한 저작권을 들어 서태지는 이들과의 싸움에서 이겼다. 이와 더불어 시중에는 이미 불법 영상집들과 나이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품들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사진이 불법으로 인쇄되어 싸구려 상술의 일환으로 팔리고 있었다. 이들에 대해서도 서태지는 초상권이라는 당시로서는 정말 생소했던 개념을 들어 철저히 대응해나갔다.

[편집] 발표 음반

이 부분의 본문은 서태지의 음반들입니다.

지금까지 서태지는 서태지와 아이들로 4장, 솔로 활동으로 7장의 앨범을 발표하였다. 발표하는 앨범마다 한국에서는 소개되지 않은 해외의 영향력 있는 음악 장르들이었던 랩(Rap), 갱스터 랩(Gangster Rap), 뉴 메탈(Nu Metal), 랩 메탈(Rap Metal)을 선보였으며, 동시에 자신의 음악적 뿌리인 헤비 메탈 음악에 대한 꾸준한 사랑으로 커다란 대중적, 음악적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교육제도, 청소년 가출, 사회비판, 심의제도 비판, 장애인, 낙태 문제를 다룬 사회적인 가사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여, '문화 대통령'이라는 별명까지 얻는다.

정규 앨범 외에도 다수의 라이브 앨범과 베스트 앨범을 발표한 서태지는 2008년 7월 중순, 4번째 솔로앨범이자 통산 8번째 정규앨범을 발매예정이다.

[편집] 예명에 대해서

  • 서태지 인터뷰 중에 예명 내용을 발췌한 전문이다.
이동연 : 말 나온 김에 예명에 대해 질문드리겠는데 당신의 예명인 '서태지' 가 어떻게 지어진 것일까 추측이 많습니다. 어떤 이는 영어 '스테이지'의 음차라고도 하고 어떤이는 일본 그룹 인 'X '의 전직 베이스 연주자였던 taiji의 예명을 본떴다는 설이 있는데 실제로는 어떤 것인지..

서태지 : 제가 일단 이름을 과격하게 짓고 싶었어요. 오래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인상적인 이름을 짓고 싶었고, 거꾸로 이름같지 않은 이름을 짓고도 싶었어요. 아까 말한 것은 관계가 없고요, 그냥 제가 좋아하는 글자가 '태'자와 '지'자인데, 그렇잖아요. 보통 남의 이름 중에서 좋은 글자 있으면, 한 번 써 보고 싶어 하잖아요. 그래서 '태'자와 '지'자를 합성해서 이름을 지었고요. 성은 여러개를 붙여 봤는데, 그 중에서'서'자가 제일 잘 어울리더라구요. 그래서 아무 뜻도 없이 '서태지'라고 지었죠.

 
— 유토피아를 꿈꾸며 內 대담 인터뷰 중
  • 원래 서태지의 한자 이름은 없으나, 중국어권에서는 徐太志(쉬타이즈)로 통용되고 있다.

[편집] 같이 보기

[편집] 주석

  1. http://cnbnews.com/category/read.html?bcode=28433
  2. 2.0 2.1 2.2 (추억의 LP 여행) <서태지와 아이들> 서태지上, 《주간한국》, 2005년 1월 12일
  3. 대중음악 100대 명반 30위 서태지와 아이들 ‘서태지와 아이들Ⅱ’ 《경향신문》, 2007년 12월 6일
  4. 4.0 4.1 4.2 4.3 (추억의 LP 여행) <서태지와 아이들> 서태지下, 《주간한국》, 2005년 1월 19일
  5. 『광복50년 한국을 바꾼 100인』 월간중앙 별책부록, 1995.
  6. '동백아가씨'가 금지곡 된 진짜 이유 오마이뉴스, 2005년 1월 30일
  7. [영상문화의 이해]영상문화의 이해 - 서태지와 뮤직비디오 2005년 4월

[편집] 바깥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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