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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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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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서재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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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4년 1월 7일 조선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
사망 | 1951년 1월 5일 미국 필라델피아 노리스타운 몽고메리 병원 병사 |
거주지 | 대한민국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충청남도 대덕군, 서울시 미국 샌프란시스코, 펜실베니아 윌크스베리, 워싱턴 D.C., 필라델피아 |
국적 | 대한민국 미국 |
직업 | 정치가, 의사, 독립운동가 |
배우자 | 뮤리엘 암스트롱 |
자녀 | 스테페니, 뮤리엘 |
부모 | 서광언(부), 성주 이씨(모) |
서재필(徐載弼, 1864년 1월 4일~1951년 1월 5일) 또는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 미국 귀화명)은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본관은 대구, 호는 송재(松齋)이며, “피제손”[1]이라고도 자칭했다.
목차 |
[편집] 생애
[편집] 갑신정변 이전
1864년 외가가 있는 전라남도 보성에서 서광효와 성주 이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재필이 태어나던 해, 아버지 서광효가 진사 시험에 합격하자, 경사가 겹쳤다 하여 서재필의 아호를 ‘쌍경(雙慶)’이라 정하였다. 하지만, 서재필은 부모와 그리 오래 지내지 못하였다. 서광효의 6촌 형제 중 서광하가 아들이 없자, 서광효는 7살의 서재필을 서광하의 양자로 보낸 것이다.[2]
서광하의 부인이자 서재필의 양어머니는 세도가문 안동 김씨 출신이었는데, 서재필을 입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서울에서 이조참판 벼슬을 하고 있던 동생 김성근의 집에 서재필을 보낸다. 그리하여 서재필은 김성근의 집에 머물면서 과거 시험을 준비하였다. 18세 되던 1882년 과거(증광시, 병과3)에 급제하였다. 처음 받은 직책은 경서 인쇄 및 관인을 관리하는 ‘교서관 부정자(校書館 副正字)’였다.
벼슬에 오르면서 서재필은 본격적으로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를 갖게 된다. 서재필은 먼 친척 뻘 되는 서광범을 통해서 개화파의 중심인물인 김옥균과 조우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옥균은 12살 연하의 서재필을 ‘동생’이라 불렀고, 서재필은 김옥균을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당시 개화파는 서울 서대문에 자리한 봉원사를 중심으로 결속하고 있었다. 봉원사에는 개화파 승려인 이동인이 주지로 있었는데, 부산 출신인 이동인은 어려서 일본말을 배워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고, 서양 문물에 관한 서적들을 일본에서 들여와 당시 개화파들에게 제공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유길준, 이동인 등은 모두 한 때,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문하생들었기 때문에 서로 잘 알고 있었다. 후일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봉원사에 비밀리 모여 서양 문물에 대한 책을 읽고 시국을 논하면서 자연스럽게 ‘개화당’을 형성하여 결속을 다지게 된 것이다. 서재필은 이 중 가장 어린 나이였다.
국방력을 키워야한다는 생각을 가진 김옥균의 권유로 1883년 서재필은 14명의 평민출신 청년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 당도한 서재필 일행은 6개월 간 게이오 기주쿠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6개월 간은 토야마 육군 유년학교에서 신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 1884년 조선으로 돌아온 사관생도들은 고종에게 신식 사관학교를 설립할 것을 간청하였고, 고종은 서재필을 사관장으로 삼아 조련국(操鍊局)을 만들 것을 윤허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청나라와 명성황후 측의 반대로 결국 무산되었다. 서재필을 비롯한 사관생도들은 궁궐수비대로 편입되었다.
[편집] 갑신정변
1884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과 더불어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신분제 폐지, 문벌 폐지, 청나라에 잡혀간 대원군의 복귀 등을 담은 혁신 정강을 발표하였다. 일본의 토야마군관학교에서 훈련받은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전위대로 나서 공을 세웠고, 병조참판 겸 정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갑신정변 당시 그는 토야마군관학교에서 같이 훈련받은 생도들과 함께 한때 개화당에 참여하였다가 배신한 환관 유재현를 처단하였고, 문신 조영하(趙寧夏)와 민태호(閔台鎬)를 고종이 지켜보는데에서 살해하였다.[3]
그러나, 갑신정변이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만에 실패로 끝나자, 일본으로 도피하였다가 일본에서도 상황이 좋지 않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형성된 친청파 민씨정권은 갑신정변 주역들을 역적으로 몰았고, 서재필의 부모를 비롯하여 3명의 친형제가 사약을 받거나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였다. 관가에 기생으로 보내지기로 된 서재필의 부인은 죽는 편이 낫다고 판단하여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당시 서재필에게는 두 살난 아들이 있었는데, 나라에서 굶겨서 죽였다고도 하고, 아이가 굶주림에 지쳐 죽은 어머니의 젖을 물었는데 어머니 몸 속에 있던 독이 아이 몸 속에도 퍼져 죽었다는 설도 있다. 서재필 자신은 1년 간 일본에 피신해 있었지만, 갑신정변 주역들을 둘러싸고 일본-청나라 사이의 외교문제가 생기자, 김옥균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은 선교사가 써준 소개장을 들고 샌프란시스코로 넘어가게 된다.
나중에 갑신정변을 회고하면서 서재필은 갑신정변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두 가지 이유를 지적하였는데, 첫 번째는 개화파들이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외세, 특히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의존하였다는 점이다. 이후 서재필의 활동을 보면 이 두 가지 각성이 서재필에게 얼마나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편집] 1차 미국 망명
영어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곳에서 서재필이 처음 구한 일자리는 가구점의 광고지를 붙이는 일이었다. 서재필은 다른 노동자들이 하루 5마일을 다닐때 10마일을 뛰어 다니면서 일했다. 저녁에는 YMCA야간학교를 통해, 주말에는 교회를 다니며 영어를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서재필은 어느 교회 신자를 통해 홀렌벡(John Wells Hollenbeck)이라는 사업가를 소개받는다.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탄광업을 통해 많은 돈을 번 대부호이자 자선사업가였던 홀렌벡은 서재필에게 미국에서 정식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1886년 서재필은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펜실베이니아 주 윌크스 배리(Wilkes-Barre)에 당도하여 "해리 힐만 아카데미(Harry Hillman Academy)"라는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서재필은 해리 힐만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수학 등 여러 과목에서 우등생이 되었고, 특히 웅변을 잘 하여 웅변대회에서 입상도 하고, 졸업식에서는 대표로 고별 연설도 하였다. 서재필은 교장 집에서 집안 일을 도우며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는데, 마침 법관으로 퇴임한 교장의 장인이 함께 살고 있어서 그에게서 미국의 역사 및 민주주의 제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서재필은 1888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되는데, 홀렌벡이 손수 지어주었다는 설도 있다. 필립 제이슨은 "서재필"을 거꾸로 하여 "필재서"로 만든 다음, "필"을 "필립(Philip)"으로 "재서"를 "제이슨(Jaisohn)"으로 음역한 것으로, Jaisohn이라는 성의 철자는 미국인들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고유한 철자 표기였다. 서재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홀렌벡은 서재필을 불러 놓고, 이미 입학허가를 받은 라파예트(Lafayette) 대학에서 일단 공부를 마치고 그 다음 프린스턴 신학대를 졸업하여 조선에 선교사로 돌아가겠다는 것을 서면으로 약속하라고 말했다. 그래야만 앞으로 더 서재필을 지원해 주겠다는 것이다. 당시 역적의 신세에 묶여 조선으로 돌아 갈 수 없었던 서재필은 홀렌벡의 서면 약속 제안을 거절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은인과 결별하게 된다.
서재필은 라파예트 대학을 중퇴하고 일자리를 찾아 워싱턴으로 떠났는데, 그가 찾은 일자리는 미육군의학박물관에서 중국과 일본에서 온 의서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의학 서적을 번역하면서 서재필은 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1889년 컬럼비안 대학(Columbian University, 현 조지워싱턴대학의 전신) 야간학부에 입학, 1892년 미국에서는 한인 최초로 세균학 전공으로 의학사(M.D.)가 되었고, 1893년 정식 의사면허를 받았다. 유태인 및 유색 인종은 의대에 입학할 수 없었던 당시 사정에 비추어 보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컬럼비안 대학 재학 중이던 1890년 6월 10일 한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받게 되었는데, 황인종에게 시민자격을 부여하지 않던 당시의 제도에 비추어보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서재필은 1894년 한 호텔에서 뮤리엘 암스트롱(Muriel Armstrong)을 만나 연애를 시작, 같은 해 6월 결혼식을 올렸다. 뮤리엘은 제임스 뷰캐넌 전 대통령과 사촌 형제이자 남북전쟁 당시 철도우편국을 창설했던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George Buchanan Armstrong)의 딸로 그 아버지는 이미 작고한 상태였지만, 의붓아버지가 워싱턴에서 유명 인사였던 탓에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 서재필과 뮤리엘 암스트롱은 두 딸 스테파니(Stephanie Jaisohn)와 뮤리엘(Muriel Jaisohn)을 두었다. 서재필은 의사 개업을 하였으나, 인종차별로 생계유지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신혼 살림도 워싱턴에 있던 조선공사관에 방을 빌려 차렸다. 1895년 가을, 서재필은 10년전 헤어졌던 박영효를 워싱턴에서 만나게 되고, 그의 권유로 같은 해 12월 조선으로 돌아가게 된다.
[편집] 독립신문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명성황후를 정점으로 한 민씨 정권이 몰락한 후 개혁내각이 들어서자 박영효의 권유로 망명 10년만인 1895년 12월 조선으로 귀환하였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일본 동경의 토야마 사관학교를 방문하였고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났으며, 다시 일본을 출발하여 12월 25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외무협판(지금의 외교부 차관)자리를 제수받았으나 거절하고, 형식적으로만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을 순한글과 영어로 발간하였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창간호에서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 여성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언문'을 공식적인 인쇄 언어로 채택하며 띄어쓰기를 도입한다고 밝혔다. 독립신문을 통해 서재필은 독립된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내부적으로는 교육 확대 및 산업 발전을 강조하였고, 그를 위해 의무 교육 도입, 서양 과학 기술의 도입, 식생활과 위생의 개선에 대한 여러 가지 안들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한 쪽에 의존하면 조선이 위험에 처할 수 있으니, 외부적으로는 중립외교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일 이외에도, 서재필은 목요일마다 배재학당에 나가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등의 학생들에게 세계사를 가르쳤고, 학생 토론 모임인 협성회를 지도하였다. 그리고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고, 이 일을 집행하기 위해 이완용을 비롯한 정부 관료 중심의 독립협회를 조직했다. 초기 관료 중심의 독립협회를 탈바꿈시켜 대중 토론회를 조직하였고, 이 토론회는 만민공동회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독립협회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의회 설립 및 입헌군주제로 개혁을 추진하였다.[4]
그러나 1898년 러시아 및 일본의 추방 압력과 고종을 비롯한 조선 정부의 권유로 독립신문을 윤치호에게 인계하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편집] 2차 미국 망명
미국-스페인 전쟁에 군의관으로 잠시 참전한 이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 나중에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재정적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고등학교 동창과 동업으로 문구 및 인쇄 사업을 시작하였고, 10년 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적으로 Philip Jaisohn & Co. 를 운영했다.
1919년 3·1 운동 소식을 듣고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의회(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하였다. 1919년 4월 13일에서 15일까지 3일 동안 열린 이 행사에는 이승만, 정한경, 유일한, 조병옥, 노디 김, 안창호가 설립한 국민회 간부 등 150여명의 한인들이 참여하였으며, 서재필과 개인적 친분이 있던 미국인 인사들도 참석하였다.
서재필은 제1차 한인의회에 대표 기도자로 참석한 Floyd Tomkins 목사를 설득,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고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할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한국친우회는 당시 미국내 정계 및 학계에 포진한 친일세력에 대항하여 조직된 기독교 네트워크로 미국 내 20여개 도시에 지부를 두었으며,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에도 각각 하나의 지부를 두었다. 한국친우회에서는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박해에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였고, 미국의 정치인사들이 이를 시정하기 위해 일본에 압력을 행사할 것을 요구하였다. 1920년 3월 1일에는 한국친우회 뉴욕지부 행사에 약 1000여명의 회원이 참석하여 한국의 3.1운동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었다.
미국에서 일본이 벌이고 있던 조직적 선전활동에 대항하고, 미국인들에게 조선의 사정을 알리기 위해, 자신이 사용하던 사무실에 한국통신부‘Korea Information Bureau’를 설립한 후 《Korea Review》를 발간하였다. 서재필은 《Korea Review》 통해 미국 대통령에게 공개 편지를 보내 1882년 맺어진 조미수호조약을 준수하라고 요구하였다.
1921년 이승만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워싱턴에서 열린 평화군축회의에 파견되었다. 조선독립문제를 국제회의 석상에서 공식적으로 다루어줄 것을 요구하는 《Korea's Appeal》을 각국 대표들에게 제출하였지만, 일본의 방해와 미국의 반대로 끝내 무산되었다.
서재필은 독립운동을 위해 몇 년동안 사업을 돌보지 못했고, 개인 재산을 많이 지출함으로써, 1924년 법적인 파산을 맞게 된다. 파산으로 극도로 생계가 곤란해진 서재필은 1926년 62세의 나이에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특별학생으로 입학하여 의업을 재개하였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승리가 조선의 해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77세에 미군 징병검사관으로 자원봉사하기도 했다.
[편집] 해방 후
이승만을 견제할 만한 인물을 찾고 있던 미군정의 하지 중장은 과도입법의회 의장 김규식의 추천을 받고 서재필에게 여러 차례 귀국 요청을 하였다. 몇 차례 요청을 고사했던 서재필은 미군정 최고고문 겸 과도입법의회 특별의정관으로 초빙받아 1947년 7월 1일, 귀국하였다. 하지 중장에게 자문을 하고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라디오 연설을 통해 민주주의, 교육,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9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 결정이 나고 대통령 선거 일정이 잡히자 백인제, 최능진, 김대중을 비롯한 1,929명이 서재필에게 초대 정부 대통령으로 추대하고자 하니 대통령 출마를 승낙해 달라는 내용의 요청서를 보냈으나, 서재필은 '미국 시민으로 남겠노라'며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이념 대립을 딛고 통일된 조국을 건설해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1948년 9월 11일 미군정을 따라 인천항을 떠났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5일 전쟁의 충격 속에 87세의 일생을 마쳤다.
[편집] 뒷 이야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고, 1994년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본가는 충남 논산이었으나 출생지는 외가가 있던 전남 보성지여서 현재 보성에는 당시의 외가를 복원한 ‘서재필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편집] 참고 자료
- 임창영, 《서재필 박사 전기》(공병우 글자판 연구소, 1987)
- 이정식, 《구한말의 독립투사 서재필》(서울대 출판부, 2004)
- 이광린, 〈서재필의 개화사상〉, 《동방학지》Vol.18,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78
- 조정희, 〈개화기 서재필의 사상에 대한 고찰〉, 《공자학》Vol.9, 한국공자학회, 2002
[편집] 주석
- ↑ 주진오 (1993). 〈교과서의 독립협회 서술은 잘못되었다〉, 역사문제연구소 편: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1》. 역사비평사, 31~40쪽. “그러나 그는 귀국 후 단 한 번도 자신을 이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고 필립 제이슨 또는 피제손으로 표기하였다”
- ↑ 김도태 (1948-07). 《서재필박사자서전》. 서울: 수선사, 31~32쪽.
- ↑ 갑신정변 다시 보기 - 근대화 10년 늦춘 '실패한 혁명', 2003-03-17, 프레시안
- ↑ 유영렬, 〈독립협회의 민권사상연구〉, 《사학연구》22호, 한국사학회, 1973, 68~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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