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한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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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한(嫌韓) 또는 반한감정(反韓感情)이란 대한민국·한국 문화·한국인 등을 싫어하는 부정적 또는 적대적 감정으로, 대체로 일본인 등 외국인에 의한 감정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 조선족, 한국계 일본인이나 미국인 등 북조선과 재외 한민족을 포함하는 경우가 있다. 보통 국가로서 대한민국을 싫어하는 감정과 민족으로서의 한민족을 싫어하는 감정이 쉽게 결합된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상 많은 많은 충돌이 있었던 주변국-일본 및 중국-과의 사이의 전통적인 감정적 마찰과 더불어 근대 이후에 서양의 여러 나라와 교류를 시작하면서 생긴 문화적 편견이나 오해, 근래에는 대한민국의 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국내에 유입된 개발도상국 국가 출신의 이주민들에 대한 차별 등 복합적인 이유로 반한감정이 생겨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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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용어
여러 외국 중 반한감정이 가장 심한 일본에서는 혐한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으며, 반한(反韓), 염한(厭韓) 등의 용어도 경우에 따라 쓰인다. 중국에서는 반한정서(反韓情緒) 또는 반한주의(反韓主義) 등의 말이 쓰이고 있다. 일본측 설명에 따르면, 혐한이란 용어는 적극적인 반대보다는 소극적인 혐오감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한다.
[편집] 일본의 반한 감정(혐한)
일본의 반한감정은 소위 혐한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내용과 강도에서 가장 강력하다.
[편집] 혐한의 탄생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이 근대국가로 발돋움하자,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탈아입구(脫亞入欧) 사상에 따라 그때까지 대등한 이웃나라였던 조선과 중국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은 서양인에 대한 열등감이 변질된 우월의식과 멸시감으로 변질되었다. 메이지 신정부의 국서에 대해 전통적 의례절차를 들어 이를 거부했던 조선에 대해 일찌기 사이고 다카모리 등이 정한론을 제기한 바 있으나, 정부의 주류는 일본의 국력이 아직 모자라다는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동아시아의 전통적 패권국인 중국과 서구 강국인 러시아를 물리쳤다는 자부심에 넘친 일본은 기존의 서양 모방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야마토 민족의 우수함을 선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열등한 조선인과 중국인상을 조작하여 부각하는 데 열심이었다. 이러한 국가적 세뇌로 말미암아 불과 반세기만에 일본인의 조선 및 중국에 대한 관점은 완전히 바뀌었다.
1890년대 후반부터 조선이 일본의 간섭 상태에 들어가면서 조선인의 디아스포라가 시작되었다.[출처 필요] 경술국치 이후 정식으로 조선이 일본의 영토가 되자, 국경이 없어지면서 조선인의 일본 이주가 시작되어, 식민지 말기의 징용 인구까지 포함 최대 400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일본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재일 조선인 1세대를 형성한 이들은 일부 유학생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리던 사람이었으며, 일본에서 일종의 게토를 이루어 저임금에 시달리면서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식민지인이라는 멸시에 더해 궁핍한 생활을 하던 이들에 대해 일본인은 멸시와 편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회적 편견은 지금까지 뿌리깊게 내려오고 있다.
일제 패망과 더불어 일본에 잔류한 상당수의 재일 조선인은 주로 일본의 공산당 계열에서 활동하면서 차별에 맞서 민족해방과 교육 등을 부르짖으며 전후 투쟁에 가담했으나, 반공사상의 GHQ에 의해 대부분 저지되었으며, 이러한 활동은 일본의 우익에 의해서는 조선인 = 빨갱이라는 식의 흑색선전을 용이케 하였다.
재일 조선인은 외국인 신분에서 오는 각종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능력이 있어도 공직에 취업할 수 없었으며, 이 때문에 그들의 직업 또한 특정 분야에 한정되게 되게 되었다. 그들이 선택한 직업 중 하나가 파칭코이며, 일부는 야쿠자의 일원이 되기도 하였는데, 기존의 편견에 더하여 이런 사실들이 특정 부각되면서 편견의 악순환이 되었다.
한편 혐한(嫌韓)이라는 용어는 1990년대 전반 무렵부터 일본의 보수/우익계의 언론매체가 2004년까지 한국 정부 쪽에 의한 개별 배상권의 방기나, 일본 정부로서는 당시에 몇 억 달러의 경제협력금을 지불하여 이미 이야기가 끝난 상태인 것을 무시하고(한일 기본 조약을 말함. 단 이것은 대한민국 정부 대상이며, 한국 정부의 요청에 의해 개인에 대한 배상 청구권이 무효가 되었기 때문에, 개인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배상을 반복하여 요구하는 한국 여론에 대해 일본인이 반발하는 현상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기 시작한 말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일본은 한국을 군사 독재국가라는 부정적 시선에서 서울 올림픽의 성공및 소련의 붕괴 등 냉전이 자본주의 진영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민주주의 국가의 일원이라는 긍정적 시선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진보진영을 대변하는 사회당이나 일본 교원 노동 조합, 각종 노동 단체, 진보/좌파 계열의 매체들은 북조선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일 없이 한국에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여 한국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는 자세를 보이기 시작한다.(사회당은 처음에 남북에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었지만, 1970년대에 북조선에 우호적인 쪽으로 변했다. 그 후, 이 시기에 이르러 다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좌파 진영의 인식 변화와 더불어, 한국에 대한 비판은 진보진영 주도하의 군사독재에 대한 비판에서, 우파 진영에 의한 민족주의적 비판으로 바뀌었다.
비슷한 시기에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후에 미국에 의해 이식된 전후 민주주의와 평화주의, 일본제국 시기의 전쟁과 행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려는 자유주의 사관(自由主義史観)이 대두되었다. 이 사관이 탄생하는 요소의 하나로 한국인이 일본에 대해 나타내는 반일 감정에 대한 반발(=혐한)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 사관은 그때까지 일본내에서 주류적인 역사관이었던 “한국은 일본 군국주의의 희생자이며, 피해자”라고 보는 풍조에 대한 보수적인 반동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한국에 대한 강한 반감·경멸심을 가지는 일본인을 증가시키는 영향을 주었다. 동시에 한국인의 반일 감정도 동반 상승시키는 효과도 가져다 주었다. 즉 혐한과 반일이 상호 영향을 주는 관계가 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반일 감정은 식민지 경험에 따른 효과와 국가적으로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3대 국책으로 삼은 반공·반일·반중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일본의 혐한과는 수십년 정도의 단절이 있다.
[편집] 인터넷에서의 혐한
1990년대 후반이 되자, 일본에서 “혐한”이라고 하는 감정과 행동은 그 말과 함께 인터넷의 보급을 계기로 크게 퍼지기 시작한다. 이것은 오프라인 미디어에서는 제한적으로밖에 접할 수 없었던 한국·한국인·한국 문화에 대한 혐오감을 담은 정보를 인터넷과 익명성이라는 도구와 조건을 통해 자유롭게 가공하고 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익명성을 특징으로 하는 일본 최대의 사이트인 2채널은 그런 정보들을 대량 생산·유통시키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일본인의 혐한 배설구 역할을 하고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과 북조선에 의한 일본인 납치사건이라는 두 가지 사건은 이러한 혐한의 기폭제 역할을 구실을 하였다. 일본인 납치 사건을 통하여 많은 일본인들은 한일관계에서 한민족은 피해자이고, 일본인은 가해자라는 종래의 인식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민족을 가해자, 일본인을 피해자로 바꾸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납치 사건 이후 약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나, 일본 언론에서 납치 문제와 북조선에 대한 적대적 기사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납치 피해자 중에서도 가장 어린 요코타 메구미가 언론에 집중적으로 부각되어 일본인들의 공분을 자아내게 했고, 이후 종래의 수세적인 방어의 입장에서의 혐한에서 공격적인 혐한으로 전환되었다.
[편집] 혐한 문화
2채널에서의 혐한은 2채널의 독특한 인터넷 문화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혐한이라는 말이 온라인상에 보급됨에 따라, 그런 혐한이라고 하는 행위에 불쾌감을 가지는 인간도 많아졌다. 특히 때를 가리지 않고 혐한적인 정보를 발신하는 인간, 혐한주(嫌韓厨, 주는 “주방”의 약어)로서 다루어지는 것이 많다. 또한 한국에 대해서 무례한 정보를 발신한 것만으로 혐한주로 무조건 단정짓는 인간을 마지못해서 한주나 혐한주주(嫌韓厨厨) 등이라고 부르는 일도 있다.
[편집] 혐한과 매스컴
책과 매스컴은 일반적으로 한국을 호의적으로 취급하고, 반일적인 정보나 한국 측에 잘못이 있는 뉴스를 의도적으로 작게 취급하고 있다. 또 요즈음의 한류붐은 덴츠 등에 의한 인공적인 작위인, 일본에서의 한국인 배우 팬의 대부분이 재일 코리안이며, 그 사람들은 한국인 탤런트가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한류붐을 가열시키고 싶은 세력이 내는 동원령을 받아 집결해 소란피우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 2005년의 “일한 우정의 해 2005” 일본측 실행 위원회의 부위원장에는 덴츠의 회장이 취임하고 있어, 이것을 주장의 근거가 이루는 견해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자사가 관련되고 있는 이벤트를 많이 북돋우는 것은 당연”이라고 하는 반론도 있다. 이러한 주장 자체의 모두를 긍정, 혹은 부정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NHK나 텔레비 아사히 “보도 스테이션”에서는, 겐카이나다에서의 한국계에 의한 뺑소니치기 사고(겐카이나다 해난사고, 玄界灘海難事故)나, 한국에서 일어난 “핵개발 의혹”(核開発疑惑)이나 “쓰레기 만두 문제”의 보도를 실질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또 비판되고 있는, 당시의 NHK 회장 에비사와 쇼니(海老沢勝二)가, 자사의 드라마를 그대로 두고 한국 드라마를 칭찬하고 있는 것을 봐도 분명하다. 2003년에 TBS에서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노무현 대통령이 출연했을 때에 100명이 관객으로서 프로그램에 참가했지만, 통역을 하기 전에 농담에 웃기 시작하는, 과반수의 사람이 ‘사랑해’를 한국어로 말할 수 있는 등, 극단적으로 한국어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사람이 집합하고 있다고 한 적도 있었다. 주장 자체는 하찮은 이야기의 하나로서 무시할 수 있어도, 한류붐 속에서 일어난 행위를 의문시하거나 비판하는 지식인·탤런트가 많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면, 한국인·조선인의 친구가 있는 이즈츠 카즈유키나 비트 타케시나 아카시야 삼마, 나카오 아키라, 이쥬우인 히카루, 야시키 타카진 등도 “한류” 비판의 코멘트를 발표하고 있다. 다행히도 그들이 맹렬한 비판의 폭풍우를 받을 것은 없었지만, 코멘트 그 자체도 중시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비판한 당사자가 나와 있는 프로그램 등으로 들을 수 있는 것 이외는 별로 표면화는 되지 않는다. 오히려 매스컴은, “한류붐을 비판하는 것은 적”적인 견해를 증대시키고 있다. 실제로 일본 텔레비전 프로그램 “더!정보 트우”로 “겨울의 소나타”의 비판을 한 마키히사 니코와 같이, 비판을 했지만 그 때문에 여성 주간지로부터 일제히 공격받는 탤런트까지 나오는 시말이 되었다.
혐한을 호소하는 사람들에 의한 매스컴 배싱의 배경에는, 이전부터 가끔 비판되고 있는 매스컴의 이른바 “병렬 체질”이 있다. 단지, 종래부터의 “병렬 체질”이라고 하나 다른 것은, 공공 방송인 NHK가 더해지고 있는 것이다. 혐한이 증가하는 계기가 된 2002년의 FIFA 월드컵·한국/일본 대회 개최 이전으로부터도 한국인 탤런트(윤손하, 이전에는 조용필 등)는 일본에 있고, 몇 개의 한국 드라마도, 방송 회수 등의 불완전도 있었지만 “겨울의 소나타”의 일본에서의 방송 개시 이전에 일본의 텔레비전국에서 방송되고 있었다(예 : “이브의 모든 것” 텔레비 아사히계). 후카다 쿄코와 한국인 배우 원빈 주연에 의한 일한 합작 드라마 “프렌즈”도 TBS로 제작되고 있다. 그러나 요즈음의 한류붐과 같은, 누구라도 명확하게 아는 폭발적인 고조는 별로 볼 수 없었다.
혐한파들은, “매스컴이 과잉에 한국에 아첨한 편향 보도를 실시하는 일로, 보다 혐한 감정을 강하게 하고 있다고 하는 주장에 귀를 기울여서!”, “일한 양국의 상호의 교류나 이해를 촉진한다고 하는 관점으로부터 말해도, 한국의 마이너스면을 함부로 숨기려고 하지 않고 비판하라!” 등으로 주창해 그들이 지적하는 “사실”에 발을 디딘 보도를 요구하고 있다.
[편집] 중국의 반한 감정
[편집] 중국 대륙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국가들은 중국과의 유대 관계를 중요시해 왔으며, 고조선과 삼국시대 고구려와 수·당과의 대결 및 통일신라의 성립기에 신라가 당을 축출해 낸 이후로 한족 왕조와는 직접적인 무력 충돌 없이 대체적으로 잘 지내왔다. 그러나 형식적인 조공 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던 한족 왕조는 한반도 국가에 대해 우월감을 가졌고, 중화사상에 의해서 동이로 폄하되었으며, 때때로 이를 과시해 왔다.
근대화 이후에 조선에 민족의식이 싹트고 중국의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지배력이 약해지자 조선도 종래의 사대적 관념에서 벗어나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졌다. 한국의 일제 강점기 동안엔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은 중국의 항일세력과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제휴관계에 있었으나,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에서 일본군에 소속되어 중국인과 총부리를 겨누게 된 조선인도 있었으며 이에 대한 반감도 생기게 되었다(가오리방즈). 일본의 패망 이후 중국 대륙이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나뉘어 내전에 들어가고, 한반도는 미소에 의하여 분할되어 역시 전쟁(한국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한국전쟁에 한국이 공산주의 세력과 자유주의 세력으로 나뉘어 내전에서 승리한 공산당이 장악한 중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이때의 개입으로 인하여 대한민국은 공산주의 국가이자 한반도의 통일을 방해한 중국이라는 적대감이 생기고, 중국의 입장에서는 이념적 대립과 더불어 자국 안보에 위협이 되는 미군의 최전방으로서 대한민국을 경계하게 된다.
이념에 의한 대립은 1990년대 이후 한중 수교와 더불어 중국이 한국의 주요 무역국이 되면서 약화되었으나, 중국과의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국내로 유입된 중국인 및 조선족과의 마찰과, 중국으로 건너간 한국인과 현지인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이후 중국의 경제적 성장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국가적 자신감을 회복한 중국이 동북공정 등 한족 중심 역사관을 정립하려는 의도로 대한민국의 큰 반발을 샀다. 중국은 대한민국 일각에서 부각되고 있는 간도나 만주의 회복 주장 등에 맞서서 한반도의 영토를 신라의 영역-한반도 중남부 이하의 영토-에 국한하여 축소하고 있다.
대한민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근래에 중국인의 반한 감정을 촉발시킨 원인 중 하나는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중국인은 한국이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 위해 심판 매수 및 불공정한 판정을 이용한 것으로 믿고 있다. 당시 외국 언론 중 가장 비판적인 논조를 많이 보였던 곳이 중국이었다.
최근에는 중국 기원의 문화를 한국기원으로 설명하는 한국기원설도 반한정서의 원인이 되고 있는데,(한국기원설이란 일본웹에서 붙인 용어임)이는 주로 혐한일본네티즌들이 수집하여 중국웹사이트등에 배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편집] 대만
오랫동안 반공이 국시였던 대한민국은 국민당 정권의 중화민국과는 형제 관계로까지 불리며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노태우 정부의 북방 외교에 따라 중화민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그 대신 중국과의 수교가 성립,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격하되자, 대만에서는 1992년 당시 태극기를 불태우는 등, 격렬한 반한 시위가 벌어지고, 현재까지 이 문제로 인해 대한민국에 대해 앙금이 남아 있다. 한편, 같은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를 경험한 두 나라지만 중국과의 대립에 의해 상대적으로 식민 지배를 긍정하는 친일적인 대만인은 일본인과 같은 입장에서 한국을 적대시하는 경우도 있다.
[편집] 미국의 반한 감정
[편집] 중일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의 반한 감정
[편집] 기타 국가의 반한 감정
그밖에 국가들의 경우 한국과 역사적인 이유나 정치적인 이유로 마찰을 빚은 경우가 적기 때문에 한국만을 특정하여 반한 감정을 갖는 경우는 드물며, 대부분 백인 우월주의에 의해 아시아인 또는 동양인에 대한 차별의 범주에 한국인이 엮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만, 유럽 일부 국가에서 한국이 개고기를 먹는 나라로 알려지면서 이에 대한 문화적 야유나 동물 보호론자들을 중심으로 한국에 대한 반발 감정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