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야마 도미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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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야마 도미이치(일본어: 村山富市, 1924년 3월 3일 ~ )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오이타 현 오이타 시 에서 태어났다. 제81대 내각총리대신과 일본사회당 위원장, 사회민주당 당수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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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약력
[편집] 총리 취임 이전
- 1924년 오이타 현 오이타 시에서 태어남.
- 1946년 메이지 대학 전문부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 1955년 오이타 시의원 선거에 일본사회당 공천으로 출마해 당선. (이후 3선)
- 1963년 오이타 현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 (이후 3선)
- 1972년 12월 10일 중의원 총선거에 출마해 당선.
- 1991년 도이 다카코 일본사회당 위원장의 후임 다나베 마코토에 의해 국회대책위원장으로 취임.
- 1993년 9월 25일 일본사회당 위원장으로 취임.
- 1994년 5월 하다 쓰토무의 사회당을 배제한 신당 구상에 격노해 연립정권에서 이탈했지만, 당 내에서 연립 잔류파와 이탈파가 대립.
- 1994년 6월 24일 하다 내각이 총사직
- 1994년 6월 29일 중의원에서 수반으로 지명되어 결선투표 끝에 가이후 도시키를 꺾고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됨에 따라, 자민-사회-사키가케 연립내각이 발족.
[편집] 총리 재임
- 1994년 7월 국회 연설에서 ‘자위대 합헌, 일·미 안보 견지’를 표명해 독단으로 일본사회당의 정책 전환을 강행. (원고에서는 일·미 안보 ‘유지’로 표현되었으나, 연설중 ‘견지’라고 발언.)
- 1995년 1월 한신·아와지 대지진 발생시 정부 대응이 늦었다고 비판되어 내각 지지율이 급락.
- 1995년 3월 옴진리교에 의한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 발생.
- 1995년 6월 전일본공수의 하네다발 하코다테행 여객기가 공중 납치. 범인은 옴진리교의 교주 아사하라 쇼코의 석방을 요구(다만 범인은 신자는 아니었다).
- 1995년 5월의 지방선거와 7월의 참의원 선거에서 일본사회당이 대패. 무라야마 총리가 사의를 표명했지만, 여당측의 만류로 개조내각을 출범시키는 것으로 그쳤다.
- 1995년 7월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아시아여성기금)을 발족.
-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
- 1996년 1월 5일 총리직에서 사퇴한다고 발표하고, 연립정권에서 자민당의 하시모토 류타로 총재를 수반으로 하는 새 정권 수립에 합의했다. 이어 1월 11일에 하시모토 내각이 출범.
[편집] 총리 퇴임 후
- 1996년 1월 19일 일본사회당이 사회민주당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초대 당수로 취임.
- 1996년 9월 신당 사키가케의 하토야마 유키오가 제창한 신당 구상에 사민당 소속의 의원 30명이 이탈. 중의원 해산을 앞두고 도이 다카코 중의원 의장을 당수로 옹립함.
- 1998년 6월 사민당이 자민당과의 정권 협의를 파기해 연립정권이 붕괴.
- 1999년 노나카 히로무와 함께 북조선을 방문.
- 2000년 5월 14일 내각총리대신 재임중에 뇌경색로 쓰러진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가 급서, 무라야마가 중의원 본회의에서 조사를 낭독함.
- 중의원에서 내각총리대신 역임자를 위한 조사는 제1야당의 당수가 실행하는 것이 통례.
- 통례대로라면 민주당 대표였던 하토야마 유키오가 실행하지만, 오부치 게이조 전 총리의 유족측이 거부했다. 그러한 이유로 예외적으로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고, 야당 소속의 중의원 의원이었던 무라야마가 조사를 읽었다.
- 2000년 6월 중의원 해산과 함께 정계를 은퇴.
- 2000년 10월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 이사장으로 취임.
[편집] 주요 활동
[편집] 무라야마 담화
1995년 8월 15일에 열린 전후 50주년 기념식에서 내각 회의 결정에 근거해, 일본이 태평양 전쟁 이전이나 전쟁 중에 행했다고 생각되는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했다. 이 ‘전후 50주년의 종전기념일을 맞아’, 통칭 무라야마 담화는 이후의 정권에서도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역사 견해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보수적인 의원 등에 의해 무라야마 담화와 다른 견해의 발언이 문제가 되어, 중국 및 한국 정부로부터 반발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었다. 진보적인 입장에서는 이 담화를 두고 ‘결국 나쁘다고는 생각하지만 일본정부는 어쩔수 없이 태평양 전쟁에 말려든 것이다’라는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명칭에는 무라야마 개인의 담화로 표현되지만, 이는 내각회의의 결정을 거친 담화로, 무라야마 개인의 사적인 견해가 아닌 당시 정부의 공식 견해이다.
[편집] 피폭자 원호법의 제정
[편집] 리사이클법(재활용법)의 제정
[편집] 미나마타 병 환자 구제
[편집]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 설립
1994년 8월, 종군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민간 기금에 의한 위문금 지급 구상을 발표하고, 1995년 7월에 총리부와 외무성 관할하에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을 설립했다. 이를 통해 1997년 1월, 처음으로 한국인 위안부에게의 위문금 지급이 시작되었다. 무라야마 내각이 출범하기 이전에, 국비를 이용한 손해배상이나 정부의 사죄를 요구하는 소송이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다른 나라와 조약을 체결했을 때 이러한 문제는 해결이 완료되었다는 입장으로, 국비를 이용해 위안부에 대해 손해배상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방침을 고수했다. 무라야마의 구상에서는 정부가 기금을 설립하고, 이에 소요되는 자금은 민간의 지원으로 하는 것으로, 직접적인 국비의 투입을 피하는 동시에 모금에 의한 국민의 진지한 생각이 표현되는 것으로, 양자의 주장을 포함하면서 문제 해결을 도모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기금의 초대 이사장으로는 하라 분베에, 2대 이사장으로는 내각총리에서 퇴임한 무라야마가 취임해 6억여 엔의 모금액을 이용해 위안부 피해자의 생활지원과 함께 여성의 명예 및 존엄과 관련된 사업을 진행해 왔다. 필리핀, 한국, 타이완 등에서 지원사업을 전개했으며, 인도네시아 사업이 종료될 것으로 예정된 2007년 3월에 해산하기로 발표되었다.
전 임 하타 쓰토무 |
제81대 일본 총리 1994년 6월 30일 ~ 1996년 1월 11일 |
후 임 하시모토 류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