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소네 야스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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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소네 야스히로(일본어: 中曽根康弘, 1918년 5월 27일 ~ )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제71·72·73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였으며, 1947년의 제23회 중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20회 연속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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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약력
- 1918년 5월 27일 군마 현 다카사키 시에서 태어남.
- 1941년 3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 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 내무성에 입성.
- 1941년 8월 해군경리학교 졸업.
- 1944년 11월 해군병비국 근무.
- 1945년 10월 군대해산에 따라 내무성으로 복귀, 관방조사부 근무.
- 1947년 4월 25일 제23회 중의원 선거에 군마3구에서 출마해 당선.
- 1959년 6월 18일 과학기술청 장관에 임명(제2차 기시 개조내각).
- 1966년 12월 신정동지회 결성에 참여, 대표로 선출됨.
- 1967년 11월 25일 운수성 장관으로 취임(제2차 사토 내각).
- 1970년 1월 14일 방위청 장관으로 취임(제3차 사토 내각).
- 1970년 9월 14일 레어드 미국 국방장관과의 회담에서 미군기지의 반환 및 공동사용에 관한 문제를 협의.
- 1970년 10월 21일 제4차 방위력정비계획의 개요를 발표.
- 1971년 7월 5일 자유민주당 총무회장으로 취임(제3차 사토 개조내각).
- 1972년 7월 7일 통상산업성 장관 겸 과학기술청 장관으로 취임(제1차 다나카 내각).
- 1974년 12월 9일 자유민주당 간사장에 취임(미키 내각).
- 1977년 11월 28일 자유민주당 총무회장에 취임(후쿠다 개조내각).
- 1980년 8월 9일 행정관리청 장관으로 취임(스즈키 내각).
- 1982년 11월 25일 제11대 자유민주당 총재에 당선, 다음날 제71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됨.
- 1983년 1월 11일 한국을 방문해 총 40억달러의 경제협력 지원에 합의.
- 1984년 1월 5일 현직 총리대신으로는 최초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
- 1985년 4월 1일 민영화된 일본담배산업주식회사(구 일본전매공사)와 일본전신전화주식회사(구 일본전신전화공사)가 영업을 개시.
- 1985년 8월 15일 총리대신 자격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
- 1985년 9월 22일 플라자합의 채택.
- 1985년 10월 15일 한국·중국 등의 비판으로 야스쿠니 신사 추계대제의 참배를 중지한다는 의견을 표명.
- 1985년 10월 25일 레이건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엔고·달러저를 추진하기로 합의.
- 1986년 7월 6일 제38회 중의원 및 제14회 참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이 각각 300석과 143석을 획득해 큰 승리를 거둠.
- 1986년 10월 28일 참의원 본회의에서 국철의 분할·민영화 관련 법안을 가결.
- 1987년 4월 1일 민영화된 JR그룹 7개사가 영업을 개시.
- 1987년 10월 20일 자유민주당 후임 총재로 다케시타 노보루를 지명.
- 1989년 5월 25일 리크루트 사건으로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증인으로 소환심문.
- 1989년 5월 31일 자유민주당 탈당.
- 1991년 4월 26일 자유민주당으로 복당.
- 1996년 비례구의 종신 1위가 됨.
- 2003년 5월 2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로부터 정년제 도입을 위해 은퇴를 요청받아 비례대표 공천을 받지 못함. 차기 중의원 선거 불출마와 의원직 사퇴 의사를 표명하여 정계로부터 사실상 은퇴.
[편집] 총리 재임
[편집] 장기 집권
1982년에 제72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한 뒤 행정개혁 추진과 “전후 정치의 총결산”을 제창하여 1987년까지 총리로 재임하여, 역대 4위의 장기정권이다. 다만 정권 발족 초기에는 자신의 파벌 사람을 앉히는 것이 상식이라고 여겨지던 내각관방 장관직에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 파벌의 고토다 마사하루를 기용하고, 당간사장에는 니카이도 스스무를 임명하여 총 7명의 다나카파 각료를 채용해 “다나카소네 내각” 등으로 비판받았다. 한편 개헌에 대해서 총리 재임 당시에는 표명하지 않았지만, 교육기본법의 재검토나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 ‘자학사관의 재검토’ 등을 일컬어 “전후 정치의 총결산”이라고 평가했기 때문에 좌파 세력으로부터 “우익 반편이”나 “군국주의자”라며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1983년의 제37회 중의원 선거와 1986년의 제38회 중의원 선거에서는 현직 총리이면서 1위로 당선되지 않았다(당시는 중선거구제). 이것은 역대 총리로는 유일한 기록이다. 1위로 당선된 것은 모두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인데, 총리 역임자끼리 같은 선거구(군마 3구)에서 대결한 것이 된다.
[편집] 미·일 관계
미·일 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일본측의 방위비 증액을 요구하는 미국과의 골이 깊어졌지만,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의 친밀한 관계(일명 론+야스)를 쌓는 것에 성공했다. 또한 “일본은 침몰하지 않는 항공모함이다”고 발언한 것이나, “일본과 미국은 운명 공동체”라고 하는 등 미·일 안전보장체제를 강화했다. 한편 미·일간의 통상·경제 마찰이 심각해졌기 때문에, 미국의 무역적자에 대처하기 위해 일본국민에게 수입품(특히 미제)의 구입을 호소하기도 했다.
[편집] 민영화 추진
일본전매공사, 일본국유철도 및 일본전신전화공사를 민영화시켰다. 이를 즈음해 국민으로부터의 지지도 안정에 접어들어 1986년의 제38회 중의원 및 제14회 참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이 각각 300석과 143석을 획득해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 때 당칙의 총재 3선 금지 조항이 개정되어 3선에 성공하게 된다.
[편집] 퇴임
그러나 선거중에 도입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매상세를 도입하려고 한 때로부터 “공약 위반”이라고 지적되어 지지율이 급락했고, 1987년의 통일 지방선거에서는 자민당이 패배하기도 했다. 하지만 매상세 도입을 철회한 뒤에는 지지율이 다시 부활해, 1987년 10월에 ‘뉴 리더’로 불리던 다케시타 노보루·아베 신타로·미야자와 기이치 가운데 다케시타를 후계로 지명하고 11월에 퇴임한다. 나카소네의 회고에 따르면 다케시타의 경우 ‘대장성 장관을 오래 한데다 야당과의 절충에도 능란해 도입에 실패한 매상세를 성립시키고, 당을 안정화 시킬 수 있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었으며, 당시 병상에 있던 쇼와 천황의 서거 등에 대비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고 한다.
[편집] 정계 은퇴
2003년 총선거에서 비례구로 출마하지 못하자, 불출마를 선언하고 은퇴했다.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제도가 바뀔때 그는 비례구 종신 1위가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특례를 누린다는 비판이 늘어나자,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재는 당의 두 원로, 나카소네와 미야자와 기이치에게 은퇴를 권고했다. 이는 당 집행부가 보장한 일을 고이즈미 총재가 일방적으로 파기해 권고한 것으로, “극히 무례한 일이다”라는 비판도 불렀다. 나카소네와 미야자와 양 전 총리는 2000년의 총선거에서는 특례로 자민당이 도입했던 정년제(73세)의 대상외가 되었었다.
[편집] 바깥 고리
전 임 스즈키 젠코 |
제71·72·73대 일본 총리 1982년 11월 27일 ~ 1987년 11월 6일 |
후 임 다케시타 노보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