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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 (장군) - 위키백과

김종서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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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金宗瑞, 1390년~1453년)는 조선의 문신이자 명장이다.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제(節齋), 시호는 충익(忠翼)이다.[1] 김종서는 흔히 무인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열여섯 살에 문과에 급제한 문관 출신이다. 그의 6진 개척을 통한 북방 경영이 워낙 커다란 업적이기도 하고, 그의 생애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러한 오해가 생겼다. 조선 초까지는 조선의 북방 국경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최윤덕의 4군과 김종서의 6진 개척으로 인하여 국경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한 현재의 위치로 결정되었다.

목차

[편집] 생애

김종서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 2년(1390년)에 전남 순천에서 휘 수(諱)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지만, 어려서 부터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김종서는 열여섯 살인 태종 5년(1405년)에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세종 원년(1419년)에 사간원 우정언으로 임명된 후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꾸준히 관료로서 성장해 나갔다.

1433년(세종 15년)에는 함길도(함경도) 관찰사로 부임받아 국경지역의 사령관으로 파견되었다. 세종은 김종서에게 명하여, 고려윤관이 쌓은 9성 중에 공험진이 어디인지를 실제로 확인해서 보고하라고 하였고, 그것을 확인한 후에, 김종서로 하여금 공험진을 되찾으려고 하였다. 그 과정 중에 개척된 것이 6진인데, 다시 반환하자는 반대론이 상당했다고 당시 의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2]

김종서는 집현전 학사들과 더불어 세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이후 문종이 즉위한 지 얼마되지 않아 그가 죽었는데, 단종을 잘 보호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는 정치적 야심이 큰 수양대군을 의식해서 그런 말을 남겼을 가능성이 크다. 단종 즉위 후, 그의 유명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정권을 장악하여 왕위찬탈을 획책하려는 야망을 품던 수양대군에 의해 계유정난 중 그가 보낸 자객들에게 철퇴를 맞고 심한 부상을 입어 자기 며느리의 친정집으로 피신했으나, 양정과 이홍심 등에게 발각되어 목이 잘려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거사 다음 날 아침에 자신의 아들인 김승규를 비롯해 황보 인, 조극관, 민신, 이양 등과 함께 대역모반죄라는 누명을 쓰고 저자거리에 효시(梟示)당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한 여파는 매우 커서, 그 당시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던 이징옥이 김종서의 죽음은 물론이고, 조정에서 자신이 김종서와 가깝다는 이유로 파직하고 박호문을 도절제사로 임명해 함길도로 보낸 것에 대한 분노가 폭발해 박호문의 목을 잘라 대금황제라 칭하며 난을 일으켰고, 이는 1467년이시애의 난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1746년, 영조 때 신원되어 누명을 벗었다.

[편집] 6진 개척

남부 만주지방에는 만주족들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조선의 국경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 이민족을 '야인'(野人)이라고 불렀는데, 후에는 여진족으로 알려졌다. 고려 때부터 교역을 통하여 회유하기도 하고 무력으로 정벌하기도 하였지만 여진족과의 마찰은 계속 이어졌다. 조선 초에는 영변 이북지방으로 조선의 지배가 미치지 못하고 있었는데, 세종 이후로 조선이 안정되면서 국토가 침탈될 상황에 이른 북방에 주목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의 북방 진지는 정도전이 공주에 설치한 경원부였는데, 계속되는 여진족의 침입으로 방어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던 세종 15년(1433년)에 여진족 사이에 내분이 발생했고, 세종은 김종서를 임명하여 국토 회복 작업을 지시하였다. 김종서는 함길도 관찰사로 부임한 뒤 흩어진 민심을 추스르고, 함길도 남부 지방의 농가 2,200호를 경원부와 같은 북방 진지인 영북진으로 이주시켰다. 김종서는 먼저 회령을 공격하여 회령진을 설치하고 경원부도 더 북쪽인 경원으로 이동시키고, 경원부가 있던 지역에는 공성현을 설치하였다. 또한 종성과 온성에도 진을 설치 하여 동북면의 국경을 확정하였다. 김종서는 그후 세종 22년(1440년)에 형조판서로 임명되어 중앙 정계로 돌아온다. 세종의 북방 개척은 영토를 확장하는 의미뿐만 아니라 농토가 없는 농민에게는 새로운 생활 터전을 마련해주고, 국토를 균형있게 개발하여 국력을 증대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편집] 시조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속에 찬데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
썩은 저 선비야 우리 아니 대장부냐
어떠타 나라에 큰공을 누가 먼저 세우리오

[편집] 김종서를 연기한 배우들

[편집] 더 보기

[편집] 주석과 참고 자료

  1.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2. <간도를 되찾자> 간도분쟁 정계비 이전에도 있었다.
다른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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