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클레멘스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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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스 5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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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클레멘스 5세(라틴어: Clemens PP. V, 이탈리아어: Papa Clemente V)는 제195대 로마 교황(재위: 1305년 6월 5일 ~ 1314년 4월 20일)이다. 세속명은 베르트랑 드 고트(프랑스어: Bertrand de Goth)이다.
1260년경 프랑스의 보르들레에서 태어났다. 오를레앙과 볼로냐에서 교회법을 공부한 후 1295년 코맹주의 주교, 1299년 12월 보르도의 대주교가 되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선종으로 추기경단이 둘로 갈라져 있을 때에 프랑스의 개입으로 1305년 교황으로 선출되어 프랑스의 필리프 4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리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이 때부터 교황청에 프랑스의 영향력이 한층 강화되었다. 교황은 선출된 후 로마로 가기를 원했으나 외부적인 여러 상황, 특히 보니파시오 8세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에 살기로 하고 필리프 4세와 보니파시오 8세의 일을 설득하여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겨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아비뇽에 정착하였다. 이리하여 1309년부터 1377년까지 교황들은 프랑스 국왕의 권세에 굴복하여 아비뇽에 체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교황청 운영을 위한 과다한 세금 징수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민주의가 앙양되어 결국 두 교황을 뽑는 사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아비뇽 유수기는 속권이 교권을 장악한 중세 시대의 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교황은 재위 중 추기경을 24명 임명하였는데 그중 22명은 프랑스 사람이어서 추기경단에 이탈리아 사람이 수적으로 불리하자 그들의 원성을 듣게 되었다. 교황은 친척들에게 많은 특혜를 주어 그들을 교황청 행정요원으로 등용하였다. 이 또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심기를 불쾌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
필리프 4세와의 관계에 있어서 교황은 처음에는 교회의 권익을 수호하였으나 암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아 차츰 약해지기 시작했다. 보니파시오 8세의 일을 왕에게 유리하게 해주었고 조건부로 기욤 드 노가레를 용서하였다. 한편 교황은 1313년 교황 첼레스티노 5세를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성전 기사단 소송으로 인해 필리프 4세와 교황 사이가 좋지 않았다. 노가레가 성전 기사단을 없애버릴 계획을 세워 성공하였다. 심한 고문으로 기사 54명이 억울한 누명을 받아 화형을 당하자 교황의 심기는 대단히 불편하였으나 그들의 강압에 못 이겨 굴복하고 말았다. 성전 기사단의 처형은 훗날 마녀 단속에도 적용되어 잔인무도한 고문 수단을 묵인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전 임 베네딕토 11세 |
제195대 교황 1305년 6월 5일 ~ 1314년 4월 20일 |
후 임 요한 22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