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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 (오호십육국) - 위키백과

후진 (오호십육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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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後秦 384년~417년)은 오호십육국시대 강족 출신의 무장 요장에 의해 건국된 나라이다. 건국자의 이름을 따서 요진(姚秦)이라고도 부른다.

목차

[편집] 역사

후진의 지배집단 요씨는 후한시대부터 중국에 들어와 삼국시대를 거쳐 서진시대까지 계속 이리저리 옮기면서 세력을 키웠다. 오호십육국 시대에 들어서 족장 요익중(姚弋仲)은 전조, 후조에게 차례로 복속하였다가 후조의 황제 석호가 죽자 자립하였다가 다시 염위에게 위협을 받자 동진에 복속을 표명했다.

352년 요익중이 죽고 다섯째 아들 요양(姚襄)이 뒤를 계승하여 본거지인 관중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진하다가 후조로부터 독립한 여러 세력에게 저지당해 대패해 동진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독자적인 활동을 계속했기에 동진의 토벌군과 여러차례 싸우게 되었다. 한때 크게 이겨 동진의 수도 건강에까지 육박했지만 동진의 환온의 북벌군에게 대패하여 평양으로 도망쳤다. 요양은 군을 정비한뒤 서쪽으로 진격하여 관중을 장악한 전진과 싸웠으나 연패하고 붙잡혀 살해당했다.

357년 요양이 죽자 동생 요장이 부족을 이끌고 전진에게 항복했다. 전진의 황제 부견은 요장을 중용하여 요장은 전진의 천하통일 사업에 종사하여 많은 공적을 세웠다. 383년 전진이 비수의 전투에서 동진에게 대패하여 급속히 세력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384년 요장은 전진에서 독립한 서연을 토벌하려다 패배했기 때문에 부견의 노여움을 두려워해 위수북쪽 마목으로 도망쳤다.

384년 마목으로 도망친 요장은 한인인 천수(天水)의 윤씨들의 협력으로 맹주가 되어 대장군-대선우-만년진왕을 칭하고 백약원년이라고 원호를 정했다. 이것이 후진이었다. 후진이 성립되었을때 관중은 전진과 서연이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었고, 그보다 세력이 약한 후진의 요장은 서연에게 인질을 보내 복종을 맹세했다.

385년 서연은 전진의 수도 장안을 함락하고 전진의 주력을 거의 전멸시켰다. 요장은 장안이북의 각지역을 차례로 점령하고 같은해 장안에서 도망쳤던 부견을 살해했다. 다음해 장안을 점령했던 서연이 내란이 발생해 40만명의 백성을 데리고 관중을 벌이고 동쪽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되자 장안일대의 관중지역은 공백상태가 되었고, 요장은 힘들이지 않고 장안을 점령했다.

386년 요장은 장안을 상안(常安)이라 고치고, 이곳을 수도로 삼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같은해 전진의 잔존세력도 포우에서 즉위한 부등에 의해 통합되었다. 부등은 동쪽으로 전진해 관중 각지에 있던 전진의 잔존세력을 규합해 후진을 포위했다. 후진은 각지에서 전진군에게 패해 387년에는 안정과 상안의 2도시만 남았을 정도였다. 부등군은 진영에 부견의 상(像)을 놓고 전투을 벌일때는 필히 상앞에서 복수을 맹세했다. 또한 병사들은 팔에 [죽어야 쉴수 있다]란 말을 세기고, 살해한 후진군의 병사를 먹을정도로 장절한 전투를 벌였다.

389년 후진은 대계(大界)에서 전진군의 주력을 크게 격파하고 이후 전진군은 대규모 공세는 없었다. 요장은 관중각지에서 전진에 대해 우세를 차지했으나, 부등도 교묘한 외교술로 후진 포위망을 유지했다. 393년 요장은 병이 생겨 후사을 아들 요흥에게 맡기고 사망했다. 다음해 요장의 사망소식을 들은 부등은 남은 병력을 모두 모아서 후진을 공격했으나, 요흥은 이를 폐교(廃橋)에서 전투를 벌여 격파했다. 뒤이어 마모산에서 부등을 살해했다. 이로써 후진에 의한 관중통일이 실현되었다.

[편집] 후진의 전성기

관중을 통일한 후진의 요흥은 394년 황제에 즉위했으나 후진의 군권은 요흥말고도 숙부인 요서와 姚碩徳도 독자적으로 갖고 있었기 때문에 요흥은 항상 2명의 숙부에게 의견을 물으면서 일족의 결속과 국내의 안정에 노력했다. 396년 북위의 주력이 후연공격에 나섰고, 후진은 북위와의 사이을 둔 오르도스을 점령하고, 399년 내분이 계속되던 동진으로부터 낙양등 한수, 회수이북의 여러 성을 빼앗았다. 400년 후진의 姚碩徳은 농서지역으로 진격해 서진을 멸망시키고, 구 서진왕 걸복건귀을 상안으로 이송했다. 401년 요흥은 걸복건귀을 완주로 돌려보내어 姚碩徳의 후량원정에 종사시켰다.같은해 姚碩徳는 후량의 수도 고장을 공격해 항복시키고 후량에 연금되었던 구마라습을 상안으로 데려왔다. 또한 후량이 항복한 것에 하서 여러정권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어 서량, 북량, 남량은 뒤이어 후진에게 종속했다. 이로써 하서는 후진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402년 북위는 다시 오르도스로 진출해 후진과 적대관계에 들어갔다. 같은해 북위군이 후진의 영토에 침입한것을 계기로 요흥은 관중, 하동의 병력을 북위로 보냈으나 주력이 시벽(산서성 양분현)에서 북위군에게 포위당해 대패했다. 이로 인해 후진의 하북진출은 좌절되었다. 403년 약체화된 후량은 겨우 정권을 유지했으나 후진영토로 이주했고, 대신 후진이 고장을 직접통치하게 되었다. 같은해 동진이 환현에 의해 찬탈당하자 후진은 이 기회을 노려 다시 회하이북을 석권했다. 또한 405년 姚碩徳이 진령을 넘어 후구지을 항복시켰다. 이 시점에서 후진은 최대영토을 가지게 되었다.

[편집] 후진의 쇠퇴

405년말 환현을 물리치고 동진의 실권을 장악한 유유는 그 강대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잃어버린 영토을 회복하기 위해 나섰다. 유유는 후진에게 한수유역의 12군을 돌려줄것을 요구하였고, 요흥은 유유와의 대결을 피하기 위해 이것을 승낙했다. 406년 남량의 압력에 굴복해 양주 고장을 양도하게되어 하서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다. 407년 산동의 남연과 사천의 후촉은 동진의 유유에게 압력을 받았기에 후진에게 종속하는것을 거부했다. 이렇게되자 후진은 동진과의 대결을 피할수 없었다. 같은해 후진에게 복속했던 후구지가 동진에게로 넘어갔다. 한편 후진국내는 407년 오르도스에서 혁련발발의 와 409년 농서에서 걸복건귀의 서진이 자립하게되어 국력이 급속히 쇠퇴했다.

410년 후진의 종속국이던 남연이 동진에 의해 멸망당하자 후진의 국제적 입장은 흔들리게 되었다. 같은해 요흥은 후촉, 노순과 함께 3방향에서 동진을 공격했다가 대패하고, 역으로 동진은 411년 노순을 413년에는 후촉을 멸망시켜 국력는 갈수록 강대해져 갔다. 후진은 이제 독자력으로 동진과 대항할 수 없기에 413년 북위와 인척관계을 맺고 후원을 얻게 되었다.

414년 요흥이 병으로 쓰러지자 아들 요필이 상안에서 반기를 일으켜 이를 진압하려고 요흥의 여러아들이 각지에서 거병했다. 이것을 요흥이 요필의 직위을 해체하는 형식으로 수습했으나 다음해 415년 요필이 다시 반기를 일으켰다. 이 반란도 당시 황태자였던 요홍에 의해 수습되어 겨우 용서받았다. 그해 외부에서는 하나라의 혁련발발에 의해 경수유역이 공격당하여 후진의 다수의 장수를 잃었다. 416년 요흥이 중병에 걸려 병석에 눕자, 아들 요음은 이를 기회로 삼아 동생 요경아, 천수의 윤중, 윤홍, 대장군 윤원, 구 후량왕 여륭등과 함께 상안궁에 공격해 들어왔다. 요흥은 궁중의 변고를 듣고 병든몸을 이끌고 태극전앞에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금군병사는 기뻐하여 분투해 반란군을 진압했다. 하지만 요흥은 이 반란을 진압한 직후 붕어했다.

[편집] 후진의 멸망

후진의 황제 요흥이 죽자 후진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416년 요흥의 아들 요홍이 후진황제에 즉위하자 동생 요선이 형망에서, 요의가 포반에서, 종제 요희가 안정에서 각자 반기을 들었고, 또한 각지에서 강족과 흉노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외부에서는 하나라가 상방과 미까지 쳐들어와 상안을 놀라게 했고, 후구지와 서진도 여러번 침공을 되풀이 하였다. 거기에 요흥의 죽음을 들은 동진의 유유는 4방향에서 대군을 이끌고 후진을 공격했다.

후진의 군주 요홍은 이러한 내우외환의 상황에서 모든 군권을 숙부인 요소에게 맡겼다. 요소는 일족의 반란을 순식간에 평정하고 하나라군을 격파해 국내을 진정시킨뒤 파죽지세을 거듭하던 동진군을 동관에서 저지했다. 이러한 요소의 활약에 동진군으로부터 [요소의 기운은 관우을 덮을 정도다]라고 말할정도로 눈부셨던 것이었다. 417년 대장군 요소가 진중에서 사망하자 이제 더이상 후진을 지탱할 인물은 없었고, 동진은 동관을 함락하고 후진의 방어선을 차례로 돌파해 상안을 공격해 함락했다.

후진의 군주 요홍은 건강으로 보내져 참수되고, 후진은 이로써 3대 34년만에 멸망했다. 또한 요홍에 대해선 처형직전에 산속으로 도망쳐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편집] 후진의 문물

현존하는 후진의 문물은 초당사(草堂寺), 기공사장별(記功賜将莂;386년)、여헌묘표(呂憲墓表;402년)、여지묘표(呂他墓表;402년)、부씨여정정조상(苻氏女静貞造像;407년)등이 있고, 이 시기 기년문서(紀年文書)로 투르판 문서 1점이 존재한다. 천수의 맥적산 석굴에는 후진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석불이 남아있다. 또한 현존하지 않는 문물로써 건초자웅도(建初雌雄刀;386년)가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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