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 (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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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北魏 ; 386년 ~ 534년)는 중국 남북조시대 선비(鮮卑)족 탁발부(拓跋部)에 의해 화북에 건국된 왕조이다. 국호가 위나라 였기에 전국시대 위(魏)나라와 삼국시대 조조의 위(魏)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북위라고 불리고 있다. 기타 후위(後魏), 원위(元魏), 대위(代魏)란 호칭을 사용하기도 한다.
목차 |
[편집] 역사
탁발부 261년 탁발역휘(拓跋力徽)가 조조의 위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이것이 훗날 위나라을 국호로 정하게 되는 한가지 이유가 되었다. 서진은 이들 세력을 이용해 북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산서북부의 땅을 주어 살게했다. 오호십육국 시대에 대(代)나라를 건국하였으나 탁발십익건(拓跋什翼健)의 시기 전진(前秦)에게 멸망당했다. 십익건의 손자 탁발규(拓跋珪;도무제(道武帝))는 전진이 비수의 전투에서 대패하여 쇠퇴한 시기를 틈타 386년 대나라 왕을 칭하고 자립했다. 이후 1년후 국호를 위나라로 정했다.
도무제는 고비사막계, 정령족, 흉노족을 토벌하여 오르도스 일대를 지배하에 두고, 중국으로 진출을 개시해 하북성 일대를 영유하고 있던 후연을 공격해 397년 수도 중산(中山)을 함락하고 후연을 멸망시키고, 중원에 안주했다. 398년 수도를 평성(平城)으로 옮기고, 그 부근 태행산맥 동쪽의 6주의 백성 46만명을 강제이주시켰다.
도무제는 중국 전통의 국가체제을 채용하여 탁발부 밑에 있던 여러 부족을 해산시키고, 족장이하 부족민은 모두 중국의 호적에 편입시켜 한족과 혼합시켰다. 더불어 한족 출신의 명족(名族) 인재을 등용하여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로써 북조 귀족제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이후 명원제(明元帝)는 남조 송나라를 공격해 하남을 빼앗고, 이어 태무제(太武帝)는 하(夏), 북연(北燕), 북량(北凉)을 차례로 멸망시켜,439년 화북을 통일하였다. 서역에서 조공을 바쳐오는 나라만 해도 20여개국에 이르니 북위의 국세는 크게 울려퍼졌다. 이때부터 중국은 남북조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태무제는 내정을 정비하면서 또한 남조 송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 회남과 강북을 빼앗았고, 이때 도사 구겸지가 도교교단을 확립하고, 한인 관료 최호와 손을 잡고, 태무제에게 진언하여 폐불을 단행하게 하였다.(삼무일종의 폐불 첫번째) 이시기에 선비족의 한인동화와 도시귀족화가 진행되면서 서서히 북위 내부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6대 효문제(孝文帝)의 시기 풍태후(馮太后)의 섭정때 유교적인 예법을 채용하고, 균전제을 시행하면서 삼장제을 확립했다. 풍태후의 사후, 친정을 개시한 효문제는 493년 수도를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그는 선비족의 복장과 언어를 금지하고, 성씨도 중국풍으로 바꿔 탁발씨를 원씨(元氏)로 고치고, 선비족과 한족명족과의 통혼을 장려하면서 한족문화와 동화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북위의 문화는 크게 발전하였으나 일면 지금까지 내려온 선비족 고유의 소박한 상무정신은 사치와 문약으로 바뀌게 되었다.
효문제 사후 어린 효명제(孝明帝)을 대신해 섭정한 영태후(靈太后)는 정치를 하면서 불교에 심취해 전국에 사탑을 건립하여 재정을 어지럽혀, 국내에 도적이 봉기하고, 그동안 누적된 한화정책에 대한 선비족의 불만은 523년 6진의 난을 초래하여 북위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6진은 원래 북위의 수도 평성을 지키던 6곳의 군사기지로 이곳엔 왕실계통의 유력자들이 머물면서 국경을 지켰기에 대우가 좋았다. 하지만 급진적인 한화정책과 수도의 이전으로 인해 대우가 소홀해 지면서 그 불만이 누적되어 6진의 난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영태후는 효명제를 독살하고 후계자를 세우지만 6진의 난의 진압과정 중 대군벌으로 성장한 산서성 삭현지방의 흉노족 이주영(爾朱榮)이 군대를 이끌고 낙양에 들어와 효장제(孝莊帝)를 옹립했다. 이주영은 528년 태후와 후계자를 황하에 던져버리고, 승상이하 대신 1,000명을 처형했다.(하음의 변(河陰의 變)
이주영은 6진의 난을 평정하고 진양(晋陽)에서 조정을 움직였으나 이주씨 휘하의 장군 고환(高歡)이 그 폭정을 비판하여 이주씨와 대립하고 532년 낙양에 들어와 이주씨에 의해 세워진 절민제(節閔帝)을 폐위하고 효무제을 세웠다. 고환은 이주씨 일당을 각지에서 격파하여 정권은 그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효무제는 이번엔 고환의 전횡을 싫어해 낙양을 탈출해 장안(長安)으로 도망쳐 우문태(宇文泰)에게 의지하자, 고환은 효정제(孝靜帝)을 옹립하고 534년 수도를 업으로 옮겼다. 같은해 우문태는 효무제을 살해하고 문제(文帝)를 즉위시키니 이로써 북위는 동서로 분열하게 되었다. 역사상 이것을 동위, 서위라 부른다. 동위의 정권은 모두 고씨의 손에 있어, 고환의 아들 고양(高洋)이 재상이 되어 550년 효정제로부터 제위을 빼앗아 북제(北齊)을 건국했다. 서위에서도 주권은 우문씨가 차지하여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宇文覺)이 556년 공제(恭帝)을 폐위하고 다음해 북주를 건국하니 이로써 동서 양위는 멸망했다.
[편집] 모사자귀제도
북위에선 외척의 내정간섭을 막기위해 실시한 모사자귀제도라는 잔혹한 제도를 실시했다. 이것은 후궁에게서 아이를 얻으면 생모을 죽이고, 아이는 따로 키우는 상황이 발생했다.
[편집] 주요 명신 및 명장
- 최호
- 양대안
[편집] 역대황제
묘호 | 시호 | 성명 | 연호 | 사용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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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헌명제 (献明帝) <태조 추숭> |
탁발식(拓跋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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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태조 (北魏 太祖) 초익열조 (初谥烈祖) (서위문제개위열조 <西魏文帝改为烈祖>) |
도무제 (道武帝) (초익선무제 <初谥宣武帝>) |
탁발규(拓跋珪) | 등국(登国) | 386년—396년 |
황시(皇始) | 396년—398년 | |||
천흥(天興) | 398년—404년 | |||
천사(天賜) | 404년—409년 | |||
북위 태종 (北魏 太宗) |
명원제 (明元帝) |
탁발사(拓跋嗣) | 영흥(永興) | 409년—413년 |
신서(神瑞) | 414년—416년 | |||
태상(泰常) | 416년—423년 | |||
북위 세조 (北魏 世祖) |
태무제 (太武帝) |
탁발도(拓跋燾) | 시광(始光) | 424년—428년 |
신가(神麚) | 428년—431년 | |||
연화(延和) | 432년—434년 | |||
태연(太延) | 435년—440년 | |||
태평진군(太平眞君) | 440년—451년 | |||
정평(正平) | 451년—452년 | |||
— | 남안경수왕 (南安敬壽王) |
탁발여(拓跋余) |
승평 혹은 영평(承平, 永平) | 452년 |
북위 공종 (北魏 恭宗) <고종 추숭> |
경목제 (景穆帝) |
탁발황(拓跋晃) | — |
— |
북위 고종 (北魏 高宗) |
문성제 (文成帝) |
탁발준(拓跋濬) | 흥안(興安) | 452년—454년 |
흥광(興光) | 454년—455년 | |||
태안(太安) | 455년—459년 | |||
화평(和平) | 460년—465년 | |||
북위 현조 (北魏 顯祖) |
헌문제 (献文帝) |
탁발홍(拓跋弘) | 천안(天安) | 466년—467년 |
황흥(皇興) | 467년—471년 | |||
북위 고조 (北魏 高祖) |
효문제 (孝文帝) |
원굉(元宏)[1] 탁발굉(拓跋宏) |
연흥(延興) | 471년—476년 |
승명(承明) | 476년 | |||
태화(太和) | 477년—499년 | |||
북위 세종 (北魏世宗) |
선무제 (宣武帝) |
원각(元恪) | 경명(景明) | 500년—503년 |
정시(正始) | 504년—508년 | |||
영평(永平) | 508년—512년 | |||
연창(延昌) | 512년—515년 | |||
북위 숙종 (北魏 肅宗) |
효명제 (孝明帝) |
원후(元詡) | 희평(熙平) | 516년—518년 |
신귀(神龜) | 518년—520년 | |||
정광(正光) | 520년—525년 | |||
효창(孝昌) | 525년—527년 | |||
무태(武泰) | 528년 | |||
— | 경애공주 (敬哀公主) |
원씨 | - | 528년 |
— | 소공제 (少恭帝) |
원쇠(元釗) | 건의(建義) | 528년 |
북위 숙조 (北魏 肅祖) <경종 추숭> |
문목제 (文穆帝) |
원협(元勰) | — | — |
— | 효선제 (孝宣帝) <경종 추숭> |
원소(元劭) | — | — |
북위 경종 (北魏 敬宗) |
효압제(孝庄帝) (초익무부제 <初谥武怀帝>) |
원자유(元子攸) | 건의(建義)[2] | 528년 |
영안(永安) | 528년-530년 | |||
— | 현문제 (顯文帝) |
원호(元顥) | 효기(孝基) | 529년 |
건무(建武) | 529년 | |||
— | 장광경왕 (長廣敬王) |
원엽(元曄) |
건명(建明) | 530년-531년 |
— | 순제 (順帝) |
원열(元悅) | 경흥(更興) | 530년 |
— | 절민제 (節閔帝) |
원공(元恭)[3] | 진태(普泰) | 531년-532년 |
— | 안정순문왕 (安定順文王) |
원랑(元朗)[4] |
중흥(中興) | 531년-532년 |
— | 무목제 (武穆帝) <효무제 추숭> |
원회(元懷) |
— | — |
— |
효무제(孝武帝) |
원수(元脩)[5] |
태창(太昌) | 532년 |
영흥(永興) | 532년 | |||
영희(永熙) | 532년-534년 |
주석
- 효문제의 명령하에 국성을 고쳐 탁발씨을 원씨로 변경하였다. 표에서도 효문제 이후 일율적으로 원씨성을 사용하였다.
- 효압제 등극후 개원하지 않았다.
- 《위서》을 쓰기전에 폐제,《북사》、《북제서》에서 절민제로 기록되었다.
- 《위서》을 쓴 후 폐제.
- 《위서》쓴후 출제,《북사》、《북제서》효무제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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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 | 북위 · 동위 · 서위 · 북제 · 북주 |
남조 | 송 · 제 · 양 · 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