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핌 리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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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러시아어: Трофи́м Дени́сович Лысе́нко, 1898년 9월 29일 ~ 1976년 11월 20일)는 소비에트 연방의 생물학자로 1930년대에 리센코주의로 알려진 농업 학설에 입각하여 소련의 농업 정책을 펴나갔다. 그는 후천적으로 얻은 형질이 유전된다는 주장을 하였는데, 이 학설은 생물의 유전성은 전적으로 유전자에 달려 있다는 당대의 유전학설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리센코주의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여파는 과학계 뿐만이 아니라 정치와 사회의 전반에 걸친 것이었다.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리센코는 ‘맨발의 과학자’로 영웅시되었고 대부분 조작으로 얻어진 그의 연구 성과는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 스탈린의 지지를 등에 업은 리센코는 자신의 학설에 반대하는 과학자들의 숙청에 앞장섰다. 특히 위대한 생물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가 비밀경찰인 엔카베데(НКВД)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은 리센코의 책임이 크다.
리센코주의 농업 정책은 196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죽음 이후 어느 정도의 이전 체제 비판이 가능해지면서 소련의 과학자들은 리센코주의에 맞서기 시작했다. 1962년에는 저명한 물리학자들인 야코프 보리소비치 젤도비치, 비탈리 긴즈부르크, 표트르 카피차가 리센코 학설의 비과학성과 리센코의 과학적 정적 탄압을 고발하고 나섰다. 1964년에는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과학아카데미 총회에서 리센코를 다음과 같이 비난하였다.
- “그는 소비에트 연방 생물학, 특히 유전학의 부끄러운 후진성에 대한 책임과 사이비 과학을 유포시킨 것, 모험주의, 학문의 격하, 그리고 수많은 진짜 과학자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해고하고 체포하고 심지어 죽인데에 대한 책임이 있다.” [1]
여론이 리센코에 불리하게 기울어지면서 1965년 리센코는 실각하고 소련에서의 리센코주의 농업 정책은 끝이 났다. 그러나 리센코주의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수년간 더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