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징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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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징궈 (중국어 정체: 蔣經國, 간체: 蒋经国, 병음: Jiǎng Jīngguó, 장경국, 1910년 4월 27일 ~ 1988년 1월 13일 )은 중국 국민당의 정치지도자이자 중화민국의 정치인이다. 장제스의 맏아들로 중화민국 정부의 요직을 거쳤고, 1972년부터 78년까지는 중화민국 수상, 1978년부터 죽을 때까지 총통이었다.
[편집] 생애
장징궈는 장제스와 그의 첫번째 부인인 마오푸메이의 아들로 저장 성 펑화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장제스는 그를 엄격하게 공부시켰으며 아들에게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고 무심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출처 필요] 1925년 그는 모스크바로 가서 공산주의를 공부하고자 했는데 당시는 제1차 국공합작으로 이러한 흐름이 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장제스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모스크바 손중산대학에서 칼 라데크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공산주의를 열정적으로 공부했으며 어느정조 트로츠키주의로 기울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따로 그를 불러 트로츠키주의를 부인하라고 요청하고 그가 수락하자 그 때 소련 공산당에 가입이 허락되었다고 하는데 나중에 장징궈는 이를 부인했다.
1927년 장제스가 4.12사건으로 공산당을 학살하자 장징궈는 이를 맹렬히 비판하고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소비에트 연방에 남을 것을 선언했다. 그는 레닌그라드에 있는 톨마체프 중앙군사정치학교를 졸업하고 우랄 산맥의 철강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1935년 벨로루시 여자와 결혼했다. 장징궈는 1936년에도 아버지의 정책을 비난했지만, 나중에는 아버지에 대한 비난이나 소련에 체류한 것 등이 모두 강요에 따른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1937년 중국에서 장제스가 공산당과 새로운 연합전선을 구축하자 스탈린은 장징궈가 소련을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
중국으로 돌아온 장징궈는 아버지의 국민당 정권에서 일을 했다. 국공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상하이에서 국민당의 인기를 만회하고자 부패한 관리와 기업가를 엄단했고 화폐개혁을 하는등 꺼져가는 국민당의 불꽃을 살리려는 노력을 경주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처음에는 효과가 있는듯 싶었으나 나중에 그의 계모인 쑹메이링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장제스는 장징궈를 물러나게 하였다. 그후로 그와 쑹과는 평생 관계가 좋지 않았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본토를 장악하고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후퇴했다. 장징궈는 타이완 정부의 군대와 안보기관의 책임자로 국민당을 지휘했고, 1965년에는 국방장관이 되었다. 1972년 총리로 임명했다. 1973년 장제스가 병석에 누운 뒤에 장징궈는 사실상 중화민국의 통치자로서 군림햇다.
그는 정부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정실인사를 배격했으며 본토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던 입법원과 행정원에 타이완 원주민 출신 인사들을 더 많이 기용하여 정부의 지지 기반을 넓혔다. 1970년대 국제적으로 중국이 개방되고 많은 나라들이 중국과의 국교수립을 위해 타이완 정부와 외교관계를 단절하자, 그는 타이완의 정치적 독립과 외교관계를 계속 유지하려고 애썼다.
1988년 그는 심장마비와 출혈로 78세를 일기로 죽었다.
[편집] 같이 보기
전 임 옌자진 |
제6-7대 중화민국 총통 1978년 ~ 1988년 |
후 임 리덩후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