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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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李厚洛, 1924년 2월 23일~)은 울산에서 태어나 제3공화국 시절에는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제4공화국 초창기에는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박정희 정권의 대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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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3월 23일 1기로 임관하였다.
1948년에는 육군 정보국 차장을 지냈으며, 5·16 군사정변에서 그는 크게 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에 의해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을 지내고,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락은 김형욱과 같이 국민들에게 원성을 많이 받는 부정부패의 원흉으로 지탄받았고, 1969년 10월 20일, 3선 개헌 직후, 박정희는 이후락을 주일 대사로 내보내고, 김형욱과 같이 해임시킨다. 1970년 12월 21일에 박정희는 이후락을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하고, 1971년의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선거 총지휘권을 맡겼다.
제 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당선되고, 박정희는 이후락을 1972년 5월에 평양에 보내 북한의 김일성을 만나게 했다. 1972년 5월 4일 새벽, 김일성과의 사상초유의 남북 비밀회담을 열었다. 이날의 밀담은 남북한 당사자가 강대국에 대한 공동 경계심을 확인하고 남북간 합의를 도출해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루고자 강조한 말이 오갔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마침내 7·4 남북 공동성명 을 발표한다.[1]
1972년 10월 17일 유신이 선포되고, 1973년 12월 1일 이후락은 3년간 지킨 중앙정보부장의 자리에서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이 '박정희의 후계자는 이후락이다.'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킨 소위 윤필용 사건에 의해 해임당한다.
그 후, 정계에서 물러났다가, 1979년 민주공화당의 유정회 의원이 되었으나,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암살되자, 그는 완전히 정계에서 물러났다.
[편집] 부록
[편집] 참고 자료
[편집] 바깥 고리
- 쩜억개, 한국의 명문가문 제 1편 "이후락가" (서프라이즈, 2005)
[편집] 주석
전 임 김계원 |
제6대 중앙정보부장 1970년 12월 21일 - 1973년 12월 2일 |
후 임 신직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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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일균은 직무대행. |
전 임 김원규,최형우 |
제10대 국회의원(울산시·울주군) 1979년 3월 12일 - 1980년 10월 27일 무소속 최형우 |
후 임 이규정,고원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