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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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찬(閔泳瓚, 1873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여흥, 자는 국보(國寶)이다.
[편집] 생애
여흥 민씨 세도가의 실세였다가 임오군란 때 피살된 민겸호의 차남으로, 민영환이 그의 형이고 고종과는 외사촌 간이다. 백부인 민승호가 명성황후의 아버지인 민치록에게 입적되었기에 민영환과 민영찬 형제는 명성황후의 조카로도 통칭된다.
한살 차이로 같은 또래인 순종과 어릴 때 함께 공부했으며, 1889년 과거에 합격해 홍문관에서 관직을 시작해 요직에 근무했다. 1897년에는 한성은행 부장(부은행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특파대사로 파견되었고 1902년 주프랑스 공사에 임명되었다. 1903년 스위스에서 열린 적십자회의에도 참가하는 등 외교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다. 1904년 육군참장에 오르고, 1905년 훈1등에 서훈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민영환은 이에 항거해 자결했고, 프랑스에서 공사로 일하고 있던 그도 고종의 을사조약이 무효라는 서신을 해외에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귀국해서는 새로운 실세로 떠오른 친일파 송병준에게 민영환 명의의 토지를 강탈당하는 등의 일을 겪었고[1], 이후 일제에 협력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를 지냈다.
광복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조사를 받은 적이 있으며,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1949년 반민특위 조사 당시, 민영환 사후 편모만 남아 있었기에 망명이 어려워 회유에 따라 중추원에 참가했으나 회의에서 발언이나 건의를 한 적은 없고, 그나마 가산을 곧 탕진해 중국으로 도피하느라 오래 활동하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영국인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민영찬의 딸을 그린 것으로 알려진 그림 〈민씨가의 규수〉(1938)가 남아 있다.[2]
[편집] 참고자료
- 민영찬(閔泳瓚) - 한국학중앙연구원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1949-08-13). [반민특위조사기록]피의자신문조서/민영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7년 12월 7일에 읽어봄.
[편집] 주석
- ↑ 이성규. ""부평땅은 송병준이 1925년에 판 땅" - 전우용 박사, "민영환 소유 땅 송병준이 '강탈' 의혹" 자료공개", 《오마이뉴스》, 2003년 12월 25일. 2008년 6월 5일에 읽어봄.
- ↑ 이충렬. "푸른 눈에 비친 옛 한국, 엘리자베스 키스 전시회 ② - 신부 행렬 쫓다가 물에 빠진 화가 '기덕'", 《오마이뉴스》, 2006년 10월 14일. 2008년 6월 5일에 읽어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