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 정식 명칭 리보니아의 그리스도 기사 수도회 (劍友騎士修道會, 라틴어: Fratres militiæ Christi Livoniae, 독일어: Schwertbrüderorden)은 1202년에 리보니아(지금의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의 대부분 지역)의 제3대 주교 알브레히트 폰 북스회프덴이 창설한 기사 수도회이며, 1204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정식 인가와 축성을 받았다. 기사단은 독일 출신의 전사적인 수사들로 구성되었으며, 리보니아 기사단, 검의 형제 기사단, 도검 기사단, 그리스도의 민병대라고도 불렀다. 1236년 시아울리아이 (사울레) 전투에서 완패당한 후 다음해인 1237년, 독일 기사단에 흡수되었다.
[편집] 역사
12세기 중반, 리보니아에서는 뤼베크와 브레멘에서 독일인 상인들과 같이 온 독일인 선교사들과 현지의 이교도 원주민들 간의 알력이 나날이 고조되어 소규모 전투가 빈발하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1199년에 리보니아 주교구의 주교로 발령받은 시토회 출신의 알베르트는 이 지역 교회를 지키고 이교를 신봉하는 원주민들에 대한 선교활동을 위해 1200년 3월 동방 십자군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그는 이때 모인 병사들을 자신의 가신으로 삼아 훈련시킨 후, 리가로 이동하여 그곳 지역 주민들을 공격하여 복속시켰다. 또한 1201년에는 자신의 주교좌를 리가로 이전시켰다. 이를 위한 사전준비로서 알베르트는 1202년에 리보니아 검의 형제 기사단이라는 이름의 상설 군사기구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기사단의 활동 덕분에 리보니아는 대부분 정복되었으며 에스토니아도 1218년 기사단이 북쪽을 공략하면서 점령되었다.
그러나 정복당한 이교도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와 전투 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적들을 잔인하게 살육하면서 기사단의 악명은 멀리 로마에까지 알려지게 된다. 결국 기사단을 진정시켜 활동을 제약하려고 온 교황 특사에게까지 무례한 행동을 일삼았다. 악명으로 인해 고립이 심화되어가던 기사단은 이윽고 1236년 리투아니나군에 참패를 당하였다. 다음해 1237년 독일 기사단에 흡수 합병되면서 와해된다.
[편집] 역대 기사단장
- Vinno von Rohrbach 1202-1209 Herrenmeister Schwertbrüderorden
- Volquin Schenk von Winterstein 1209 - 1236 Herrenmeister Schwertbrüderorden
- Hermann Balk 1237–1238 Landmeister Deutscher Orden fff.
- Dietrich von Grüningen 1238–1242 und 1244–1246
- Andreas von Stierland 1248–1253
- Anno von Sangerhausen 1253–1256
- Burchard von Hornhausen 1256–1260
- Werner von Breithausen 1261–1263
- Konrad von Mandern 1263–1266
- Otto von Lutterberg 1266–1270
- Walther von Nortecken 1270–1273
- Ernst von Rassburg 1273–1279
- Konrad von Feuchtwangen 1279–1281
- Wilken von Endorp 1281–1287
- Konrad von Herzogenstein 1288–1290
- Halt von Hohembach –1293
- Heinrich von Dinkelaghe 1295–1296
- Bruno 1296–1298
- Gottfried von Rogga 1298–1307
- Conrad von Jocke 1309–1322
- Johannes Ungenade 1322–1324
- Reimar Hane 1324–1328
- Everhard von Monheim 1328–1340
- Burchard von Dreileben 1340–1345
- Goswin von Hercke 1345–1359
- Arnold von Vietinghof 1359–1364
- Wilhelm von Vrymersheim 1364–1385
- R. von Eltz 1385–1389
- Wennemar Hasenkamp von Brüggeneye 1389–1401
- Konrad von Vietinghof 1401–1413
- Diderick Tork 1413–1415
- Siegfried Lander von Spanheim 1415–1424
- Zisse von Rutenberg 1424–1433
- Franco Kerskorff 1433–1435
- Heinrich von Bockenvorde 1435–1437
- H. Vinke von Overbergen 1438–1450
- Johann Osthoff von Mengede 1450–1469
- Johann Wolthuss von Herse 1470–1471
- Bernd von der Borch 1471–1483
- Johann Fridach von Loringhofe 1483–1494
- Wolter von Plettenberg 1494–1535
- Hermann Hasenkamp von Brüggeneye 1535–1549
- Johann von der Recke 1549–1551
- Heinrich von Galen 1551–1557
- Johann Wilhelm von Fürstenberg 1557–1559
- Godert (Gotthard) Kettler 1559–15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