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호르미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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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미스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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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호르미스다(라틴어: Sanctus Hormisdas, 이탈리아어: Papa Ormisda)는 제52대 로마 교황(재위: 514년 7월 20일 - 523년 7월 19일)이다.
호르미스다는 로마 교회의 대부제였으며 이름으로 보아 페르시아나 동방 계열 출신이고 모계의 영향을 받은 이름인 듯 하며 그의 아들 실베리오도 후에 교황이 되었다.
호르미스다가 교황이 되자 아카키우스 분열이 종식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호르미스다는 라우렌시오 잔류 추종자들을 교회로 불러들여 화해하고 전임 교황을 초대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에게 파비아의 주교 엔노디우스와 카티나의 주교 포르투나투스를 사신으로 보내어 사정을 타진하였다. 동방 교회와의 분열은 호르미스다가 제시한 것과 거의 일치를 보았으나 4년 뒤에야 종식될 수 있었다. 합의를 보기로 한 내용은 이러하다. 공의회의 기준으로 명확하게 승인하고 황제의 요구에 주교들은 명백하게 서명해야 하며 주교들은 자기 교구에서 공적으로 정통성을 고백하고 단성론자들은 각각 이름을 불러 단죄해야 하며 그들은 증인들 앞에서 교황의 공증인들을 통하여 기초한 올바른 신앙 진술서에 서명해야 하고 추방된 주교들의 사건은 로마 교회가 다시 심사하며 정통을 박해하여 고소된 주교들은 교황에게 유보된다.
호르미스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에 도움이 된다면 그곳에 가기로 약속했다. 불행하게도 황제가 권좌의 위험을 극복하자 공의회 개최를 잠정적으로 미루고 로마의 원로원을 충동질하여 로마 교회에게 반기를 들게 하였다. 새 사절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되었으나 그들은 푸대접을 받고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와중에 황제가 죽고 정통파 황제 유스티누스 1세가 즉위하였다. 그는 조카인 조언자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도움을 받아 즉시 칼케돈 공의회의 정통성을 회복시키고 로마 교회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분열을 종식시키게 하였다. 로마 교회에서는 주교 2명, 신부 1명, 부제 2명, 공증인 1명을 파견했다. 로마 교회의 사절단이 519년 3월 25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자 도시 성 밖에서 유스티니아누스의 영접을 받은 후 장엄하게 입성하여 원로원과 동방 교회의 총대주교 4명의 옹위를 받고 있는 유스티누스 1세를 만났다. 사절단은 서명을 받기 위해 그곳에 갔으므로 토론은 거절했다. 3일 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요한 2세와 모든 주교들과 수도원의 장상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모여 호르미스다가 만든 신앙 진술서에 서명하고 아카키우스, 제논,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이름을 목록에서 제거하였다. 사절들은 동방에 여러 달 머물면서 서명을 받고 친교를 회복시켰다.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기 전에 단성론자들과 화해를 시도해 온 스타키아 출신 테오파스키테스 수도자들이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중에 고통을 당했다는 주장을 하였으나 그 주장이 단성론과 같다는 이유로 완강히 거절했다. 이들은 로마 교회에 가서 항의하는 소동을 벌였으나 추방되었다. 호르미스다는 단성론자들이 칼케돈 공의회의 규정을 받아들이도록 유스티누스 1세에게 서신을 보내 칼케돈 공의회와 교황 레오 1세의 책(Tomus)으로 모든 것이 충분하다고 설명하고 어떤 새로운 규정도 승인하지 않았다.
전 임 심마코 |
제52대 교황 514년 7월 20일 - 523년 7월 19일 |
후 임 요한 1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