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심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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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마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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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심마코(라틴어: Sanctus Symmachus, 이탈리아어: Papa Simmaco)는 제51대 로마 교황(재위: 498년 11월 22일 - 514년 7월 19일)이다.
전임 교황 아나스타시오 2세의 선종 이후 약간의 문제가 일어났다. 로마 성직자단의 대다수와 비잔티움 제국과 동고트족에 대한 아나스타시오 2세의 유화 정책에 반대했던 성직자들까지 합세하여 사르데냐 출신의 부제 심마코를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교황으로 선출하였으나 소수의 성직자들은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서 부제 라우렌시오를 교황으로 선출하자 문제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양측이 동고트 족의테오도릭의 결정을 요청하자 왕은 상황 설명을 경청한 후 심마코를 지지하였다.
심마코는 499년 3월 1일 로마 지방 공의회를 소집하여 성직자단의 선거 운동을 금지시키고 다수 표를 얻은 자가 선출되는 규정을 만들었다. 라우렌시오는 양보하고 노체라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나 라우렌시오의 지지자들은 테오도릭에게 상소하여 심마코가 교회의 재산을 다른 목적에 사용했다든지 알렉산드리아의 교회가 지키는 부활 대축일을 모든 교회가 지키고 있는데도 그 날짜와 다른 날을 지키도록 명령했다고 비방하였다.
재위 중 소위 라우렌시오 분열이 일어났다. 심마코는 라벤나에 소환되어 테오도릭를 만나고자 하였으나 그것이 함정인 줄을 알고는 피해 버렸다. 심마코의 도주는 테오도릭를 분노케 하였다. 그리하여 테오도릭은 알티눔의 주교 페트루스를 로마 교회의 관찰사로 임명하여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게 하였다. 심마코가 이탈리아 주교회의에 참여하기로 동의하자 테오도릭은 로마에서 심마코를 재판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어느 종교회의도 교황을 재판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마코가 회의장으로 가는 동안 심마코의 지지자들은 라우렌시오의 지지자들을 길에서 만나 서로 싸우게 되었는데 일부 성직자들이 죽는 사태도 일어났다. 심마코는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돌아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회의가 속개되어 팔마나무 회의로 알려져 있는 제4회기에서 교황은 하느님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재판받지 않는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후 심마코는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되어 교회의 재산 관리권을 가지게 되었다. 테오도릭은 라우렌시오가 교황이 되도록 이미 허락하였으므로 심기가 불편하였다. 그 후 로마는 4년간 언쟁과 소란의 연속이었고 거의 모든 교회의 소유권은 라우렌시오의 지지자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양측은 유인물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부제 디오스코루스가 테오도릭과 중재를 벌여 로마의 평화를 회복시키자 라우렌시오의 지지자들은 교회의 재산권을 심마코에게 넘겨주고 점차적으로 심마코에게로 돌아갔다.
심마코는 라우렌시오 분열을 계기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서한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에게 보냈으나 아카치우스 분열을 종식시키지는 못하였다. 안티오키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황제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으므로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심마코의 도움이 필요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와서 논쟁 중인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헤리클레아에서 공의회를 개최하도록 요청하였으나 그 서신은 심마코의 후임자가 접수하였다.
심마코는 재위 중 성 베드로 대성당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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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대 교황 498년 11월 22일 - 514년 7월 19일 |
후 임 호르미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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